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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①

고구려, 율령반포와 불교공인으로 가장 먼저 고대국가 진입

건국설화 신라가 빠르지만
고구려·백제·신라 순 정설

고구려·신라 국가발전 시기
150~250년 선후 차이 보여

고구려, 중국과 투쟁 통해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돼

이미 전에 불교 전래됐지만
소수림왕 때 국가적인 공인

불교공인 등 고대국가 정비
요동과 만주, 한성까지 팽창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수도 안에 사찰 9곳 세워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제작된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제작된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고구려·백제·신라 3국은 고대국가로의 발전과정과 불교 공인에 선후의 차이가 있었다. 3국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37년, 백제는 B.C. 18년, 신라는 B.C. 57년에 각기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국가의 발전과정은 상당한 시차를 두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3국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영주(英主)들을 비교하여 보면 선후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왕위 계승권을 확립하여 고대국가 발전의 기반을 확립하였던 왕은 고구려의 6대 태조왕(太祖王, 53〜146?), 백제의 7대 고이왕(古爾王, 234〜286), 신라의 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356〜402) 등이다. 다음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을 통하여 국가의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이룩하였던 왕은 고구려의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371〜384), 백제의 14대 침류왕(枕流王, 384〜385), 신라의 23대 법흥왕(法興王, 514〜540) 등이다. 그 다음 대외적으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추진하여 전성기를 맞게 하였던 왕은 고구려의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3), 백제의 12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신라의 24대 진흥왕(眞興王, 540〜576) 등이다. 이로써 고구려와 신라의 국가발전 시기는 대략 150〜250년의 선후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불교를 공인한 시기만도 155년의 차이를 나타내주고 있다. 백제의 경우는 그 중간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대외적인 팽창시기와 불교 공인을 통한 정신적 통일을 추구한 시기가 뒤바뀌어 있음이 주목된다.

3국 가운데 가장 선진이었던 고구려는 전설에 의하면 B.C. 37년에 주몽이 이끈 부여의 일파가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의 환인(桓仁) 지방에 자리를 잡고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려 건국의 주체세력은 B.C. 128년 이전에 이미 28만 명의 커다란 연맹체를 형성하였던 예군 남여(濊君南閭)의 세력기반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되며, 독립 세력으로 대두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의 축출이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 위치한 퉁구(通溝)지방을 근거로 하여 발전하였는데, B.C. 75년 현토군을 몰아내어 한(漢)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현토군 통로를 절단함으로써 퉁구를 거쳐 부전고원을 넘어 원산만에 설치하였던 임둔군을 곧 자기 세력권 안에 넣고, 이어 서쪽으로 요동방면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같이 고구려는 중국민족과의 투쟁과정에서 성립하였고, 또 성장하여 갔다. 고구려의 중국과의 충돌은 고대국가의 기반을 확립하고 강력한 대외 발전을 추진한 태조왕대(53〜146?)부터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대내적인 왕권강화와 체제정비를 추진하는 한편, 밖으로 중국의 지배하에 있던 요하와 대동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여 동천왕대(227〜248)에는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과의 통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위(魏)의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초래하여 수도가 함락되었고, 이어 현토군과 낙랑군의 침입으로 동천왕이 멀리 동해안까지 피난을 가는 위기를 맞았다. 중국대륙에서는 곧 위가 진으로 교체되고, 이어 북방민족들의 침입으로 5호16국이 난립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고구려는 이 틈을 타서 요동에 대한 공격을 서두르는 한편, 미천왕 14년(313) 마침내 낙랑군을 축출하고 대동강 유역의 옛 고조선 고지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대방군을 차지하고 북으로 진출하여 오는 백제와 날카로운 대립을 하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대륙지역의 혼란으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이주해 오는 유이민들을 포용하면서 요동지방에 대한 본격적인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요동으로의 진출은 잇달아 흥기하는 새외민족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야만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요동을 둘러싸고 모용씨(慕容氏)·단씨(段氏)·우문씨(宇文氏) 및 한족 잔여세력과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강성하였던 모용씨의 전연(前燕)의 침공을 수차 받게 되었다. 고국원왕 12년(342)에는 모용황(慕容皝)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미천왕릉이 도굴당하였으며, 왕의 모친이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이어 41년(371)에는 북진하여 오는 백제군에게 왕이 평양에서 전사하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이러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의 지배체제를 재정비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상체계를 정립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국가체제의 정비와 사상체계의 정립에 앞선 성급한 대외팽창정책의 추진이 초래한 국가적 위기에 대한 자성의 결과였다. 이러한 역사적 임무를 맡고 등장한 인물이 고국원왕의 아들인 소수림왕(371〜384)이었다. 이리하여 소수림왕은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2년(372)에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하였으며, 다음해(373)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불교가 국가의 정신적 통일에 이바지한 것이라면, 태학은 새로운 관료체제를 위한 한자와 유교의 교육을 위한 것이었고, 율령의 반포는 바로 국가조직 그 자체의 정비였을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비로소 정치적·사상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게 되었으며, 장차 이루어질 밖으로의 발전의 터전을 이루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소수림왕대에 불교공인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이 가능하였던 데는 국제관계의 변화라는 대외적 조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소수림왕이 즉위하기 전년(370)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고구려와 날카롭게 대립하여 왔던 전연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전연의 태부 모용평(慕容評)이 내분하여 오자, 이를 잡아 전진에 보내줌으로써 친선의 뜻을 표하였다. 이에 전진왕 부견은 그 2년 뒤인 소수림왕 2년(372)에 친선사절을 보내면서 승려 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게 하였다. 부견은 호불(護佛)의 제왕으로 유명하거니와 서쪽으로 북중국의 통일에 주력하면서 동쪽의 고구려와는 친선을 통한 국경의 안정을 추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순도에 이어 왕 4년(384)에 승려 아도가 오자, 다음해(375)에 초(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어 각기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왕 7년(377)에 전진에 사신을 보내었고, 이어 왕 11년(381)에는 신라의 사신 위두(衛頭)를 대동하여 전진왕 부견을 대면케 하였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어 온 것은 소수림왕 이전부터였으나, 국가의 사절을 통한 공전을 계기로 비로소 공인되었던 것이다. 신라도 거의 동시에 불교전래의 계기를 맞았지만, 고구려와 달리 왕권의 강화와 국가의 발전이 아직 미숙하여 공인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이며, 무려 146년을 기다려야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소수림왕대 불교공인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적인 시책은 고대국가 체제의 완성이라는 의의 이외에도 고려할 점이 더 있다. 원래 동아시아 문명권을 형성하는 공통적인 요소로서는 한자와 유교, 율령제와 불교 등이 열거되는데, 소수림왕 때의 개혁 내용은 바로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당당히 동아시아 문명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게 되었다는 문명사적 의의를 갖는 점이다. 또한 다른 의미에서 고구려는 중국세력의 침입을 격퇴하여 한강 이남지역에서 백제와 신라가 발전하게 하여 줌으로써 한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선진국으로서 두 나라에 중국의 선진문화를 전달해 주는 매개체의 역할도 담당하였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대외적인 정복활동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광개토왕(391〜413)이었다. 이 왕의 위대한 정복 사업의 결과 서쪽으로 중국민족과의 투쟁의 목표이던 요동을 차지하고, 동북의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의 주인공이 되고, 남쪽의 백제를 쳐서 임진강과 한강 어간까지 영토를 확대하고, 또 신라에 들어온 왜의 군대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시키면서 신라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413〜491)은 부왕의 사업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극성기를 현출하였다. 장수왕은 특히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63년(475)에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함으로써 대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성기의 장수왕대에 앞서 고구려에서는 고국양왕 말년, 즉 광개토왕 즉위년(391)에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영을 내림으로써 불교를 국가종교로 선포하였는데, 그와 동시에 국사(國社, 社稷)를 건설하고, 종묘를 수리케 함으로써 국가의 제사제도를 정비케 하였다. 이로써 불교의 국교화와 함께 중국적인 사직과 종묘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적인 종교와 제사제도를 동시에 완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수왕 15년(427)에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어 새 국도를 경영하였다. 이 천도는 협착한 산골짜기의 야영(野營)도시로부터 넓은 평야에 자리 잡은 계획적인 도시로 발전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도에 35년이나 앞서 광개토왕 2년(392)에 평양에 9곳의 사찰을 세우게 하였던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평양 천도가 장기간에 걸친 계획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며, 정치도시·경제도시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도시·종교도시로서 수도의 기능이 확대 정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뒤 문자왕 7년(498) 7월에 금강사(金剛寺)를 세웠던 사실을 ‘삼국사기’에서 특기한 것은 뒷날 백제의 왕흥사나 신라의 황룡사에 비교되는 국찰의 창건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이제 고구려는 정치·경제·문화·불교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완비된 제도와 사상을 갖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삼국유사’ 요동성 육왕탑조에서는 당 도선(道宣)이 지은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을 인용하여 옛날 고구려의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요동성에 이르러 솥을 덮은 것 같은 3층의 토탑을 발견하고, 이곳에 7층 목탑을 세웠다는 사실을 전하며,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였던 아쇼카왕(Ẩsoka)이 염부제주(閻浮提洲, 인도)에 세웠다는 8만4천개의 탑과의 관련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자료에서의 ‘성왕’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요동성에 순행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그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게 된 광개토왕이나 장수왕일 것으로 보며, 성왕이라는 칭호나 아쇼카왕이 8만4천탑을 건설하였다는 전설과 관련시킨 내용으로 보아 전성기의 고구려왕이 전륜성왕으로도 관념되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요동성에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사당이 있었으며, 당태종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미녀를 단장하여 부신(婦神)으로 섬겼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아, 요동성에서는 불탑과 함께 시조 주몽을 모신 사당이 함께 숭배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43호 / 2018년 6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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