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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케마 ②

기자명 김규보

“무엇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죽림정사 산책 중 여인 보고
영원한 것 없다는 것 깨달아
붓다 만나 외모 집착 벗어나
헛된 삶 살지 않으려 출가

죽림정사의 풍경은 남편의 말 그대로였다. 케마의 부탁대로 붓다가 제자들과 탁발하러 나간 시간에 맞춰 왔기에 간간이 새들의 지저귐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시선 닿는 곳곳에 꽃이 피어 있어 향기만으로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숲 속의 오솔길로 들어가 짙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산책했다. 지금껏 살아온 궁궐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이곳의 아름다움은 그것과 달랐다.

처음 가져보는 느낌에 취해 느릿느릿 걸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케마는 저도 모르게 수행자들의 처소 인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붓다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곤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붓다가 케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붓다를 시중들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자신보다 짙고 반짝이는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그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게 아니라면 존재하지 못할 아름다움이었다. 여인은 안면 가득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천상에서나 들을 법한 목소리였다. 누구도 자신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그간의 자신감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나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그것도 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구나. 나는 저 여인에 비하면 우스꽝스러운 원숭이에 불과하다.’

여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케마에게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하염없이 여인만 바라보던 중, 갑자기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그토록 하얗고 매끄러운 여인의 피부가 점점 쭈글쭈글해지고 머리카락도 푸석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눈꺼풀 위에서부터 주름이 흘러내려 눈을 덮었으며 맑게 빛나던 눈망울도 광택이 사라지고 초점을 잃어갔다. 천상의 목소리를 내며 노래 부르던 입술에서 누렇게 바래진 이가 하나둘씩 빠져나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이가 모두 빠지자 목소리도 옹알거리는 할머니의 그것으로 변해 버렸다. 여인은 기력이 다한 듯 고꾸라진 뒤 짧은 시간 헐떡이다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찰나의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름다운 외모로 좌절감을 안겼던 여인이 지금은 늙고 병든 모습으로 쓰러진 채 눈을 감았다. 충격을 받은 케마가 주저앉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보다 아름다운 저 여인도 끝내는 젊음을 잃고 늙어가 죽음에 이르게 되거늘, 나 또한 늙고 병들고 숨을 거두는 것을 피할 순 없겠지.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라는 믿음도 헛되고 헛된 망상에 불과했구나. 케마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챈 붓다가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케마여. 육신이 늙고 병들어 가는 모습을 잘 보았는가. 무엇도 영원하지 않고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무상의 진리가 이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리석은 이들만이 현재에 사로잡혀 육신에 집착하고 부질없는 것을 갈망한다. 이치를 바로 보면 집착과 갈망을 끊고 번뇌를 여읜다. 케마여. 이 이치를 바로 보고 바로 알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이로 남아 평생 집착할 것인가.”

붓다의 설법을 듣는 순간 케마는 외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다. 남편이 붓다의 말씀을 옮기며 육신을 피고름과 똥이 들어찬 가죽 주머니에 비유했던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피고름과 똥주머니에 집착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헛되이 보내왔던가. 케마는 이제부턴 단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고 발원했다. 붓다에게 인사를 드리고 기다리던 남편에게 가서 단호하게 말했다.

“왕이시여. 붓다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를 결정하였습니다. 갑작스런 부탁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 저의 결정도 왕께서 저에게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운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니 부디 제 출가를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43호 / 2018년 6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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