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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세종과 최만리의 본질을 보는 힘

기자명 김정빈

사물 보는 폭과 깊이의 확장이 불자 최고 덕목

백성위해 훈민정음 창제한 세종
집현전 일부 신료들 반대에도
가여운 백성 고충 먼저 생각해

자신의 처지에 맞는 지혜 필요
곧은 마음은 간혹 사심 되기도
지혜 계발해야 마음도 완벽해져

그림=근호
그림=근호

문화의 여러 분야에 두루 통달한 사람을 르네상스인이라고 한다. 서양인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대표적인 르네상스인으로 꼽는다. 그는 회화, 조각, 건축, 기계, 해부학 등 여러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괴테 또한 위대한 르네상스인으로서 무려 18개 분야에 걸쳐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르네상스인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건국 초기의 불안한 왕권을 안정시킨 태종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은 정치, 의례, 군사, 경제, 과학, 천문, 의학, 복지, 농사, 출판, 음악, 문학 등의 분야에 두루 통달한 임금으로 화려한 문화정치의 꽃을 피웠다.

세종대왕의 많은 업적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하지만 읽고 쓰기 쉬운 글자를 만들어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고자 했던 세종의 이 위대한 시도는 일부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반대자들을 이끈 사람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였다.

최만리는 1432년부터, 후에 군위에 올라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의 독선생을 지낸 적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인격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았다. 그는 공무에 있어서는 엄격했고, 사사로이는 따뜻한 성정을 갖고 있었다. 세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냉정하게 야단을 쳤지만 훌륭할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438년,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부제학이 된다. 이듬해에 잠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온 것을 제하면 그는 그때부터 1444년에 훈민정음에 대한 상소와 관련하여 사직할 때까지 부제학 자리를 지켰다. 그는 자신의 상소가 받아들여 지지 않자 낙향했고, 1년 후인 1445년에 죽었다.

세종과 최만리 사이가 틀어진 것은 세종이 불교에 관심을 기울인 일과 훈민정음을 반포한 일 때문이었다. 최만리를 비롯한 여러 대신이 한사코 세종의 궁궐 내에서 불사를 벌이는 일을 비판했지만 세종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훈민정음에 대해 최만리가 주축이 되어 반대 상소를 올렸을 때도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최만리가 자신의 곁을 떠난 뒤 세종은 그와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다. 세종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부제학 자리를 비워두었다. 신료들은 부제학 임명을 독촉했지만 세종은 “누가 최만리만큼 할 수 있겠는가?”라며 응하지 않았다. 최만리가 죽은 후 세종은 오랫동안 끼니를 거른 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혼신을 다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매일 단위로 왕의 거동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해 시간을 보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세종은 중국이 문자 창제에 간섭하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비밀리에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것이다.

1444년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들은 세종이 최항, 박팽년, 신숙주 등으로 하여금 ‘운회’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한 일을 문제 삼았다. 최만리 등은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그 일을 비판했는데, 그 첫 번째 항목에 그의 사대주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말했다. “우리 조선은 예로부터 대국을 섬겨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언문을 만들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일로 중국에서 비난한다면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세종은 상소한 자들을 불러 설득했지만 그들은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세종은 그들을 하옥하거나 파직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를 훈민정음 서문은 “가엾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자신의 뜻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불쌍히 여겨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바’의 원문은 ‘니르고저 홅배이셔도’이며, 이는 ‘말하고자 하는바’라는 뜻 이외에도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고(일러바치고) 싶어도’라는 뜻도 있다.

관가에 억울한 일을 고변하려면 소장을 작성해야 하는데, 한자를 모르는 여느 백성들은 소장을 작성하기 위해 양반선비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려면 과정이 복잡하고 번거롭다. 그래서 쉬운 문자를 만들었으니, 어린(가엾은) 백성이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세종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그 의도는 최만리 등의 사대주의와 충돌했다. 최만리의 성정으로 볼 때 그가 민중의 힘이 커지는 것을 염려하여, 즉 양반사대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훈민정음을 반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고, 그 점에서 세종과 잘 통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은 따뜻하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가 잘 계발되어야만 마음은 완벽해지는 것이다. 지혜는 사물을 보다 넓고 깊게 바라봄으로써 얻어진다. 그 점에서 세종이 백성을 사랑하는 넓고 깊은 지혜를 갖춘 데 비해 최만리는 사대주의라는 좁고 얕은 지혜에 머물러 있었다. 중국을 섬기기 위해 백성이 고통당해야만 하는가, 백성을 돕기 위해서라면 중국을 거슬러도 좋은가. 이중 후자가 전자보다 더 넓고 깊은 관점임은 물론이다.

불교는 지혜를 귀중하게 보는 종교이다. 불교에서 지혜는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 증혜(證慧)로 구별되며, 가장 높은 지혜인 증혜를 반야(般若)라 한다. 반야가 구경(究竟)의 지혜인데 비해 나머지 지혜는 범부들도 접근 가능한 낮은 단계의 지혜이다. 문제는 우리 불교계에 구경반야를 말하는 곳은 많아도 세속인으로서의 재가 신자가 얻을 수 있는 문혜, 사혜, 수혜를 말하는 곳은 적다는 점이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 말하는 구경반야는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불제자들에게 우선 당장 급한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조건에 알맞은 수준의 지혜이다. 그 지혜의 핵심 중 하나는 사물을 보는 너비와 깊이이다.

최만리는 청백리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행실이 곧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그 정신으로 훈민정음을 반대했지만, 지혜의 폭이 좁고 깊이가 얕았기 때문에 그 곧고 바른 마음이 도리어 대공(大公)의 입장에서는 본의 아니게 사심(私心)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최만리와 세종의 사례를 통해 사물을 보는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것이 중요하고도 중요한 불제자의 덕목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43호 / 2018년 6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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