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황룡사 사리 반환으로 본 보궁신앙-상
[특별기고] 황룡사 사리 반환으로 본 보궁신앙-상
  • 자현 스님
  • 승인 2018.06.18 17:58
  • 호수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장 스님이 문수보살에 받은 사리, 한국불교 보궁신앙의 기원

황룡사, 경주 불국사와 견주는
신라시대 대표하는 최고 국찰
자장 스님, 오대산서 사리 받고
황룡사 9층 목탑 세워 통일발원
박물관 수장고에서 돌아온 사리
한국불교,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
진흥왕 553년 궁궐 건축 현장에 황룡이 출연하자, 이를 부처님 가피에 따른 상서로 판단한 진흥왕은 이곳에 황룡사를 건립했다. 자현 스님 제공

불교인이 아닌 우리국민에게 가장 유명한 사찰을 묻는다면, 단연 불국사가 첫손으로 꼽히지 않을까? 예전 수학여행의 성지이자, 애국가 영상에서도 빠지지 않는 불국사. 실제로 불국사는 석굴암과 더불어 1995년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린 사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존하지 않지만 불국사와 겯고틀 수 있는 사찰이 한 곳 더 있다. 그것은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국찰 황룡사다. 진흥왕은 553년 2월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새롭게 건축하던 궁궐 현장에서 황룡이 출현하자, 이를 부처님의 가피에 따른 상서로 판단해 황룡사 창건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황룡의 출현이란 황제를 상징한다. 실제로 진흥왕은 여러 ‘순수비’에서 자신을 ‘제왕(帝王)’으로 표기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태왕(太王)’ 즉 왕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진흥왕의 ‘제(帝)’ 표현은 이를 압도하는 것이다.

진흥왕의 부처님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성군(聖君)에 대한 추구는 황룡사의 본존인 석가모니 장육존상(4.8m)의 연기 설화를 통해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전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불교군주 아소카왕이 조성하려던 불상을 진흥왕이 이어받아 완성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진흥왕이 불교적인 성군인 전륜성왕이 되고자 했던 바람을 읽어볼 수 있다. 실제로 진흥왕의 불교를 통한 왕권강화와 국가체제의 정비는 매우 효율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신라는 낙후된 국가의 이미지를 일신하게 된다.

중국 오대산 금각사 입구.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3대 법흥왕과 24대 진흥왕은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로서의 삶을 사신 분들이다. 주지하다시피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흥륜사를 창건해 신라불교의 토대를 확립한 인물이다. 황룡사는 제26대 진평왕 재위기인 584년 1탑3금당(一塔三金堂) 즉 하나의 탑에 세 곳의 불전을 갖춘 형식으로 변모한다. 세 불전에는 중앙 전각에 석가장육존상을 그리고 좌우에는 가섭불과 미륵불이 봉안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이 가섭불과 미륵불이 법흥왕과 진흥왕을 상징하는 등신불이었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 즉 부처님을 모신 군왕에서 출가인의 삶을 살다가, 부처님의 모습으로 신라인들에게 각인되었던 이들이 바로 법흥왕과 진흥왕인 것이다. 또 이분들에 의해서 신라는 변방의 국가에서 강국의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진평왕시대까지 번성하던 신라는 27대 선덕여왕이 등장하면서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다. 선덕여왕하면 일견 슬기로운 여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김춘추계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날조한 것에 불과하다. 마치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의 조상들이 크게 덕을 쌓은 분들로 묘사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신라가 위태롭던 시기 선덕여왕의 흔들리는 왕권을 지켜주고, 김춘추 이전에 대당외교를 주관했던 인물이 바로 자장율사이다. 7세기에 활약했던 자장은 진골인 소판무림이 천부관음상을 조성한 뒤, 아들이면 출가시키겠다는 서원 속에서 잉태되어 부처님과 같은 4월8일에 탄생한다. 후일 자장이 출가하자, 진평왕은 속퇴해 재상급의 위치에서 국정운영을 함께할 것을 강권한다. 그러자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戒)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 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서릿발 같은 일화는 유명하다.

황룡사 삼존불이 봉안됐던 좌대.

자장은 사신과 함께 638년 현재의 울산인 하곡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이후 장안에 도착해서 당시 황제인 당태종의 환대를 받고 황명으로 승광별원에 거쳐한다. 즉 처음에는 당에 적응하고 외교적인 측면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639부터 641년까지 장안의 남쪽에 위치한 중국불교사의 최고 성지 종남산으로 들어가 집중수행에 매진한다. 종남산은 당나라 불교의 메카로 화엄종과 율종, 그리고 유식학과 삼계교 등이 번성했던 중국불교사 최고의 성산이다. 이 시기 자장은 도선율사와 교류하며, 계율학 및 당나라의 불교성지들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된다.

도선은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 공양 때에는 하늘에서 음식이 내려왔다고 하는 동아시아 계율학의 집대성자이다. 그런데 그는 630년에서 640년까지 당나라의 불교성지들을 순례하며, 이를 바탕으로 ‘집신주삼보감통록’ 등 다수의 영험록을 편찬한 인물이기도 하다. 도선은 이 시기에 오대산의 문수도량도 참배하는데, 이런 측면이 자장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당나라 초기 오대산은 종교적인 이적(異蹟)이 가장 많은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지였다. 실제로 오대산 문수보살의 이적은 장안을 진동시켰고, 662년에는 급기야 황제의 명으로 진상조사단이 꾸려지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때 진상을 조사하던 칙사에게까지 이적이 발생하면서 세상을 놀래키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조사는 702년에도 한 차례 더 진행된다. 이후 당나라는 문수보살의 영험함에 탄복하여, 772년에는 전국사찰에 문수전을 조성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보살로 격상시킨다.

<br>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자장의 오대산행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신앙이 폭발하기 직전인 642년에 이루어진다. 이때 자장은 오대산 동대에서 30일간 정진하다가 계시를 받고, 북대로 자리를 옮겨 문수보살석상 앞에서 10일을 더 용맹정진한다. 이때 꿈속에서 가피를 입는 이적이 발생하고, 다음날에는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기에 이른다. 자장은 문수보살께 신라불교와 국운이 창성할 수 있는 가르침을 받고, 아울러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 그리고 머리뼈와 사리 100과 등을 잘 모시라는 당부도 함께 받게 된다. 한국불교 보궁신앙의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자장 이전에도 우리나라에 사리는 전래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요동성 아육왕탑의 기록이나 평양의 정릉사지와 금강사지 또는 부여의 군수리사지 등의 발굴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삼국시대 사찰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구조와 달리 사리를 모신 거대한 탑을 중심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찰의 건립과 관련해 사리는 필수적이며, 이는 자장 이전에도 다수의 사리들이 전래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아는 보궁의 사리는 모두 자장에 의해서 전래되어 나누어진 것들이다. 즉 보궁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사리신앙의 정점에 자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자현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왜 그럴까? 그것은 자장이 오대산 문수보살에게서 모셔온 사리만이 불교와 국가의 창성과 관련된 가장 의미 깊은 사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리가 박물관 수장고의 차가운 금고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무지의 어둠을 걷어내고 불교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자장은 사리를 모시기 위해 황룡사에 80m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9층 목탑을 건립한다. 그리고 이 탑에 신라불교의 발전과 삼국통일의 염원을 아로새겼다. 이것은 모두 성취되었다. 이제 황룡사의 사리가 다시 깨어났으니, 한국불교와 대한민국은 세계를 영도할 주역으로서 재조명될 것임에 틀림없다.

[1444호 / 2018년 6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