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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한국미술사 연구소 학술대회 한국 미술사학의 성립과 개성학파의 의의

박물관서 시작된 개성학파, 한국미술사학 대중화 큰 역할

고유섭 개성부립박물관장 부임
제자 ‘개성3걸’과 개성학파 이뤄

스승 세상 떠났어도 연구 이어가
미술동인회·한국미술사학회 창립

198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하며
미술자료집대성·문화재 연구 주도

개성부립박물관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한 고유섭 선생.(하단 왼쪽)
개성부립박물관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한 고유섭 선생.(하단 왼쪽)

한국에서 미술사학이라는 학문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됐지만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학회적인 차원에서 한국미술사를 태동시키고 성립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고유섭 선생과 그 제자들인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선생에 대해 한국미술사학사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고유섭 선생 제자인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선생은 흔히 ‘개성3걸’로 불린다. 고유섭 선생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개성의 세 선생을 존경하는 표현이다.

1905년 태어난 고유섭 선생은 경성제대미학 미술사학전공 교실을 거쳐 1933년 28세의 나이로 개성부립박물관장이 된다. 1938년 황수영, 진홍섭 교수는 방학을 맞아 고향 개성으로 오게 되면서 고유섭 선생과 역사적인 만남을 이룬다. 최순우 선생도 이 전후에 고유섭 선생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생각된다.

개성학파는 고도(古都) 개성의 분위기 때문에 태동되었다. 황수영, 진홍섭 교수는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최순우 관장은 고교출신의 문학도 지망생이었으나 개성이 자아내고 있는 옛 고려문화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어 박물관을 찾게 되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의 지적욕구가 신진기예의 청년학자 고유섭 선생을 찾게 되었다.

개성학파는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유섭 선생은 일제강점기, 실의에 빠진 청년학자의 고뇌에 찬 삶과 이로 인한 병마로 1944년 하직했다.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야 겠다는 의지를 세명의 제자가 갖게 되면서 미술사학을 필생의 전공으로 삼게 됐다.

해방직후 고유섭 선생의 세 제자들은 국립박물관의 학예직을 맡게 된다. 때문에 개성학파는 개성부립박물관에서 태동하였고 고유섭 관장을 중심으로 제자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선생 등 4인을 개성학파의 주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고유섭 선생은 한국인 최초로 1927년 경성제대 철학과에서 미학미술사를 전공한 후 1930년 미학미술사 연구실 조교 생활을 거쳐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이 된다. 1944년까지 만 11년 동안 한국미술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한국미술사를 정식으로 전공한 최초의 학자가 됐다. 당시는 관학자 관야정(關野貞: 세끼노 다다시)을 중심으로 우리 고적과 유물에 막대한 예산과 인원을 동원,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집성할 때다. 조선고적도보와 조선고적조사 보고서를 간행됐고, 1932년에는 조선미술사를 펴내는 등 일제 침략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식민정책의 일환인 어용 식민사관이 우리사회에 널리 번져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고유섭 선생은 민족적 정서가 강하게 흐르고 있는 천년 고도 개성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사관과는 연관 없는 근대적인 미술사관을 바탕으로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게 된다. 따라서 고유섭 선생의 미술사학은 일본에 굴하지 않고 독자적이고 민족적인 개성상인의 기질과 고려 천년의 문화전통이 살아있던 개성 전통문화의 분위기에서 뿌리 내릴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고유섭 선생의 미술사학에 대한 관점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첫째, 고유섭 선생은 연구 초기에는 주로 양식사적 관점에서 한국미술사를 연구했고, 그 다음 단계는 주로 사회경제사적인 관점과 실증주의 사관에 입각해서 한국미술사를 연구했으며, 마지막으로 주로 정신사적 관점에서 한국미술사를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정신사적 관점을 토대로 양식사와 사회경제사적 관점을 받아들인 미술사학이 고유섭 선생의 한국미술사관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한국미술사학의 첫 시기인 태동기의 미술사관이자 미술사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고유섭 선생의 제자들인 ‘개성 3걸’ 중 최순우(1916~1984) 선생은 고유섭 선생 생존 시인 1943년 개성부립박물관 근무를 시작하였고 1948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한다. 진홍섭(1918-2010) 선생은 1947년부터 개성부립박물관이 국립박물관 개성 분관이 된 후 관장으로 취임하여 52년까지 근무했고 경주관장으로 이전한 후 1961년까지 재직한다. 황수영(1918~2011) 선생은 1948년 1월에 국립박물관감으로 재직하기 시작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사직한 후 1956년 동국대 교수로 영전하게 된다.

각자 차이는 있으나 1955년경부터 연구 분위기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다. 1955년에는 문화재보존위원회(1961년 정식 발족)가 설치되어 국가적으로 문화재 조사와 보존의 분위기가 살아나게 된 것도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

이런 연구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때가 1960년 경이다. 문화재의 보존·보호와 함께 민족문화의 창달을 정부시책으로 강력히 추진하면서 우리나라 문화재의 연구, 학문적으로는 한국미술사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고유섭 선생의 지도를 받은 ‘개성3걸’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잘 파악하였기 때문에 동인회를 만들어 미술사 자료인 문화재 조사와 미술사연구를 조직적으로 실시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이렇게 탄생한 고고미술동인회는 개성 삼인방이 주축이 되었고, 그 외 김원룡(국립박물관 과장) 선생과 보성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문화재 애호가인 전형필 선생이 참여했다.

개성 삼인방은 고유섭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여 황수영 선생은 불교조각사를 중심으로 금속공예와 금석문 등 불교미술을 전공했고 진홍섭 교수는 석조미술과 불상 등 불교미술을 주로 연구했다. 최순우 선생은 도자사와 목공예 등 일반 공예사와 회화사 등 일반미술사를 대상으로 삼아 연구에 주력했다. 연구분야를 종합하면 한국미술사의 전 분야에 해당하므로 고유섭 선생이 이루고자 했던 한국미술사의 집대성이 그의 제자들이 이루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고고미술동인회 활동 시기는 1960년 8월15일부터 1968년 2월16일까지 약 8년에 걸치지만 1948년부터 개성 삼인방이 연구활동을 국립박물관에서 함께 시작한 때부터 환산하면 약 20여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한국미술사학은 개성 3인방, 이른바 개성학파가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미술사학은 이 시기 동안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비록 문화재 조사에 치중했지만 개성 삼인방이 당시로서는 수준 높은 분야별 논문을 각각 발표하여 한국미술사학은 조각·회화·공예·탑파 분야에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고미술동인회는 1968년 2월17일 한국미술사학회로 확대 개편된다. 고고학 분야를 떼어버리고 명실상부하게 미술사학만 연구하는 정식 학회가 한국 최초로 발족된 것이다.

학회를 주도한 것도 물론 개성학파다. 한국미술사학회 초기(1968~1981)는 개성 3인방이 모두 학문의 완숙기여서 농축된 연구업적과 함께 국립박물관장·문화재위원 문화재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문화 문화재정책을 책임지는 지도자의 역할까지 담당하므로 명실상부하게 한국미술사학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한국미술사학사에서 개성학파가 차지하는 역할과 연구관점 그리고 그 의의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미술사학사에서의 개성학파의 역할이다. 앞에서 이미 밝혔다시피 개성학파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술사학을 태동시킨 한국미술사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지 관학파 또는 그 아류 학자들이 주도하던 한국미술사연구를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한국미술사연구를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연구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근대적인 미술사관을 정립하여 양식사, 사회경제사, 정신사의 관점을 잘 이해하고 이를 미술사관으로 삼아 우리 미술사 연구를 진행한 최초의 학자로 높이 평가된다.

39세에 요절하며 당대에는 그의 꿈이 펼쳐지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들인 개성 3인방은 선생의 유고 글을 집대성하여 분야 별로 분류한 저서를 출간한다.

이 저서들은 미술사 저술의 황무지였던 학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많은 후학들은 이를 통해 미술사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말하자면 고유섭 선생의 저작이야말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미술사학과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따라서 고유섭 선생은 그의 제자들로 인하여 한국미술사를 태동시킨 한국미술사학의 실질적 원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성 3인방은 해방 후 1980년대까지 한국미술사 전 분야의 연구를 주도했고 나아가 미술사를 포함한 한국문화재 정책을 지도 또는 주관하게 된다. 또한 개성학파를 계승한 제2·3세대 연구자들이 1990년 전후부터 세계학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한국미술사학을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개성학파의 미술사관이다. 개성학파들이 한국미술사연구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분야는 미술자료의 집대성이었다. 도상학적 기초연구도 중시했다. 고유섭 선생은 탑파를 분류, 실체에 가깝게 접근하고자했고 불상 또한 반가사유상 등을 도상적으로 찾고자 했다. 황수영 선생도 불상의 도상, 가령 삼화령 미륵세존의 자세 등 도상 특징을 통하여 명칭을 구명하고자 했고 반가사유상 등도 그 도상 특징에 따른 명칭과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는 등 기초적인 도상학 연구에 노력했다. 진홍섭 선생 역시 ‘한국의 불상’이나 ‘불상’ 등의 저서를 통하여 불상의 분류, 성격, 의미 등을 도상적으로 파악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순우 선생 또한 청자·백자·사기·자기 같은 명칭을 도자기의 형태나 재료에 따라 새로이 분류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명문사료의 분석과 편년연구도 병행한 점이 주목된다. 불상이나 탑, 도자기, 회화의 명문이나 기록을 통하여 조성연대와 시대적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연구의 완숙기에 접어들면서 주력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미술사학의 대중화에 노력했다. 고유섭 선생은 그의 학문적 성과를 신문지상 잡지에 발표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미술사, 즉 우리 문화재를 친근하게 접할 수 있게 했다.
 

문명대동국대 명예교수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

개성 3인방은 1960년대 우리문화 창달이라는 국가정책에 따른 분위기를 잘 활용하여 문화재조사 의미를 알리는 주역이 되었다. 이 가운데 최순우 선생은 수필 등의 문필 활동을 통하여 우리 문화의 가치와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래서 우리 미술을 포함한 문화재는 국민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고 이에 따라 한국미술사학의 위상은 물론 인식을 크게 높일 수 있게 됐다.

한국미술사학사에서 개성학파의 위치나 의의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해방 직후(1945~1960), 고고미술동인회(1960~1968), 한국미술사학회 초창기(1968~1980년대) 등 1945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개성학파 3인방 이외에 미술사학을 정통적으로 연구한 이름난 대학자는 없었다. 개성학파는 일제 때부터 1980년대 초까지 명실상부하게 한국미술사학 연구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1444호 / 2018년 6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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