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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백암리사지

기자명 임석규

발굴조사 결과 삼국유사 기록된 백엄사 절터 가능성 가장 높아

베일에 쌓인 백엄사 절터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어

경남 합천군의 백암리 절터
조선까지 이어진 절터 확인

조사결과 불상·사리병 등
다양한 유물 출토 기대모아

보물 381호 석등 특히 유명
통일신라 석등 특징 보여줘

절터 남아있는 석조문화재
지의류에 의한 피해 심각

백암리사지 전경.

‘삼국유사’ 제4 탑상편 백엄사 석탑사리(伯嚴寺 石塔舍利)조에는 “개운3년(開運3年, 946)에 쓰인 진주 임도대감주첩(任道大監柱貼)에 선종백엄사(禪宗伯嚴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에 있는데 사승(寺僧) 간유상좌(侃遊上座)는 나이가 39세이고, 절을 처음 세운 때는 알 수 없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옛 문헌에 신라 때 북택청(北宅廳) 터에다 이 절을 지었는데, 중간에 오랫동안 헐어 폐지되었다. 지난 병인년(906)에 양부(陽孚)스님이 이 절을 고쳐 짓고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년(917)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있다.

또 함옹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수립(秀立)이 절에서 지켜야 할 규칙 10조를 세웠는데, 규칙 중에는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敬僧) 엄흔(嚴昕)·백흔(伯欣) 두 명신과 근악(近岳) 등 세 분을 모시라고 했다. 민간에 전해오기를 엄흔·백흔 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으므로 절 이름을 백엄사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백엄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는 사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이 사지에서 통일신라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조사단은 이곳을 ‘삼국유사’에 언급된 백엄사지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1407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된 천태종 사찰 중 ‘초계의 백엄사’가 포함되어 있어, 조선 전기까지도 지역의 주요한 사찰로 법등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에서는 사찰의 명칭이 확인되지 않아 15세기 전반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암리사지는 백암리 상촌마을 상촌저수지 아래에 있다. 이곳은 청계산 무월봉의 남쪽 계곡 중류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반천으로 흘러드는 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 뒤 경작지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대동사지’라는 명칭으로 보고되어 있는데, 사명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높이 4척의 석탑과 높이 5척의 석불, 탑의 지대석으로 보이는 부재 2매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백암리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경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2006~2008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는 사적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유적의 정확한 성격과 범위 등을 확인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 이후의 건물지 5동, 배수로 5기, 축대 2기, 담장 2열 등이 확인되었으며 일부 지역의 심층조사를 통해 무문전을 부설한 통일신라시대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청동제 사리기편, 금동여래입상, 철제 말 등의 금속류와 유리제 용기편, 병편 등 사리병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압출양각청자편, 상감청자편, 분청자편, 백자편, 경질토기편 등의 자기류와 연화문, 귀목문, 당초문의 문양과 연목와, 회첨막새, 박공와 등 다양한 기능을 지닌 막새편도 다량 확인되었으며, 보상화문 전돌, 사격자문, 종선문 와편 등 많은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와 같이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후기~조선전기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사리기, 금동여래입상 등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은 ‘삼국유사’에 언급되어 있는 ‘백엄사(伯嚴寺)’의 운영시기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으로 사명 추정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현재 발굴 지역은 복토된 상태이고, 나대지에는 덩굴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석축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백암리사지와 관련된 소재문화재로는 사지에 남아있는 합천 백암리 석등(보물 제381호),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석등하대석과 합천박물관으로 옮겨진 팔각대석, 초석 4매, 석등옥개석 등이 있다.

합천 백암리 석등은 간주석을 갖춘 팔각석등이고, 전체 높이는 257㎝이다. 이 석등은 경작지에 흩어져 있던 부재를 모아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지대석과 상륜부를 제외한 모든 부재가 갖추어져 있다. 하대석에는 8엽의 연화문과 그 중앙에 화문을 새겨 놓았다. 간주석으로는 단순하고 경쾌한 팔각기둥을 세워놓았으며, 상대석은 하대석과 동일한 8엽의 연화문으로 장식하였다. 상대석 위에는 팔각 화사석이 놓여 있다. 화사석에는 4면에 화창을 마련하고 나머지 4면에는 각각 사천왕상을 양각하였다. 사천왕상은 한 면 가득 꽉 차게 돋을새김 되어 있는데, 모두 입상이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있으며, 악귀를 밟고 있다. 각각 화살, 보탑, 칼,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장방형 화창의 테두리에 못 구멍이 12개씩 남아 있는데, 문을 달았던 흔적으로 보인다.

백암리사지 석조여래좌상 훼손상태.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간주석형 석등의 일반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상대석 하면과 옥개석 상면에 홈을 파서 화사석을 결구하는 독특한 조립방식을 취하고 있다. 석등의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보는 견해와 8세기 중엽, 9세기 후반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다면 9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석조여래좌상은 광배를 제외한 대좌와 불신이 전하고 있으며, 석등과 함께 도괴되어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목 부분은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으며 무릎, 대좌 상대석 등 일부분이 파손되었고, 전신이 회색 지의류(地衣類)로 덮여 있다. 지의류는 돌이나 나무 표면에 얼룩덜룩하게 붙어 자라는 균류(菌類)와 조류(藻類)가 복합체가 되어 생활하는 생물군이다. 언뜻 이끼와 닮았는데 식물인 이끼와는 달리 최소 두 가지 이상의 미생물이 뒤섞여 하나의 몸을 이룬 복합생명체이다. 문화재 보존 전문가들은 지의류는 암석에 서식하는 곰팡이로 재질을 전반적으로 약화시켜 박리(剝離, 벗겨짐 현상)와 박락(剝落, 긁힘 또는 깎임 현상), 마모(磨耗, 닳아 없어짐 현상), 크랙(Crack, 갈라짐 현상) 등을 발생시킨다고 한다. 지의류가 확인된 문화재는 보존처리를 해야 하는데, 보존처리 이후에 오히려 지의류의 기생주기가 더 가속화되는 등 지의류의 보존처리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마침 산림청 국립수목원에서는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간 석조문화재에 발생, 서식하는 지의류를 조사하는 중장기 연구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문화재 보존처리에 걸 맞는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백암리사지 백암리 석등.

불상의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는 크고 높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글고 이목구비는 마모가 심하여 코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확인될 뿐이다. 대의는 통견으로 입었고 내의를 착용하였다. 옷 주름은 신체 전면에 걸쳐 비교적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뒷면에 등 뒤로 넘긴 대의자락이 새겨져 있다. 왼손은 복부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은 수인을 취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양 손이 모두 파손되었다.

대좌는 팔각 연화대좌이고 전체 높이는 87㎝이다. 하대석은 평면이 팔각이고, 8엽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하대석 윗면에 2단의 괴임을 두고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의 크기는 높이 36㎝, 한 면의 폭 27㎝이고 평면은 팔각형이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겼으며 그 내부에 각각 보살입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보살상은 모두 연화대좌와 원형두광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다른 수인을 취하고 있다. 상대석은 직경 112㎝의 원형인데 파손이 심하다. 중앙에 꽃무늬가 새겨진 연잎으로 장식하였으며, 대좌 윗면에는 정으로 쪼아 홈을 판 흔적이 있다.

이 불상은 여래좌상의 착의법 및 옷주름 표현, 중대석 보살상, 대좌 연판문 등의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9세기 전반~중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석등과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암리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후기~조선시대에 걸친 유적으로, 문헌기록상에 언급된 ‘백엄사(伯嚴寺)’의 운영시기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존 발굴조사가 사역 전체에 대한 조사가 아닌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좀 더 넓은 지역을 발굴조사하게 된다면 사찰의 범위와 건물들의 배치, 사찰의 정확한 이름, 석조문화재의 원위치 등이 명확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석조문화재 중 특히 불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의류에 의한 훼손이 상당부분 진행되고 있어서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그리고 석조유물들이 노거수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세찬 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문화재들이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이 노거수는 높이가 20여m, 나무 둘레는 4.7m가 넘는 거대한 느티나무이다. 수령 또한 1000년이 넘었다고 하니 이 사찰의 흥망성쇠를 모두 목격했을 법한 나무이다. 이 나무를 옮길 수는 없으니 그 주변에 있는 석조문화재들을 사역 내 적당한 위치로 이동해서 보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44호 / 2018년 6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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