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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황룡사 사리 반환으로 본 보궁신앙-하

기자명 자현 스님
  • 기고
  • 입력 2018.06.26 15:36
  • 수정 2018.06.26 15:37
  • 호수 1445
  • 댓글 0
중국 오대산 중대의 조욕지. 멀리 보이는 곳이 태화지가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벌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잡방문(雜方門)’에는 투명인간이 되는 약을 만드는 은형법(隱形法)에 대한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결과는 명백한 허구다. 이로 인해 ‘동의보감’의 합리성을 비판할 때 은형법은 단골메뉴로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이보다도 더욱 놀라운, 경주에 실재했던 용궁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것은 ‘아도기라(阿道基羅)’에 등장하는 ‘용궁의 남쪽 황룡사, 용궁의 북쪽 분황사’라는 언급이다. 이는 용궁을 기점으로 남쪽에는 황룡사가 위치하고 북쪽에는 분황사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라 용궁의 위치가 황룡사와 분황사의 중간임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발굴결과에 따르면, 황룡사지 쪽은 진흥왕 시절에는 대규모 습지였다. 이 습지를 메우는 과정에서 황룡이 출현하는 것이다. 또 현 황룡사지 바깥의 북서쪽에서 깊은 연못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이 기록에 나오는 용궁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아마도 신라 용궁은 불교시대 이전 국가적인 기우제나 제사를 지내는 무교(풍교)의 성소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용궁 및 황룡사용과 연결되는 성지가 중국 오대산에서도 확인된다. 자장과 관련된 기록에는 오대산 북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사리 등 성물을 전해 받은 자장이 중대 쪽의 태화지로 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 태화지는 산 위에 위치한 신령한 연못으로 680년대 혜상이 찬술한 ‘고청량전(古清涼傳)’에서부터 오대산의 가장 핵심적인 곳으로 등장한다. 이 태화지에서 자장은 태화지의 용을 만나 ①황룡사용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점 ②황룡사에 9층 목탑을 건립하면 삼국을 통일하고 세계재패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③자신을 위해서 사찰을 창건해 줄 것을 요청받게 된다.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기 이전 황룡사를 재현한 모형.

①은 태화지와 황룡사가 연결된다는 의미로 ②에서 태화지용이 자장에게 9층 목탑을 건립할 것을 말해주는 배경이 된다. 황룡사 9층 목탑의 연원과 중수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황룡사찰주본기(872)’에는 종남산의 원향선사에게 9층 목탑의 건축을 제안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황룡사 9층 목탑의 시작과 관련해서는 태화지용설과 원향선사설의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 ③의 태화지용에 의한 주청으로 창건된 사찰이 바로 울산의 태화사다. 태화사는 대당 외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거대규모의 사찰이었는데, 이로 인해 울산에는 현재까지도 태화강과 태화동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최근에 복원된 태화루 역시 이 태화사에 속하는 일부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태화사는 조선후기에 폐사되고 만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기록들이 한데 뒤섞여 있는 셈이다.

642년 오대산을 순례한 자장은 왕권이 흔들리던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643년 3월16일 하곡현 즉 울산으로 귀국한다. 자장의 귀국 길은 황제와 황태자의 깊은 존숭과 후원이 있는 성대한 행로였다. 실제로 자장은 대장경 등 많은 불교물품들을 가져와 이후 신라불교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원효와 의상이다.

자장이 귀국했을 때 선덕여왕은 신라 안에서도 극심한 반대세력의 비판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자장은 645년 왕권강화와 신라인들의 국론결집을 위해 황룡사에 세계 최대 규모의 9층 목탑 건립을 추진한다. 그리고 9층 목탑의 맨 위 상륜부와 맨 아래 주심초석에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에게 받은 불사리를 봉안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에 착공되어 이듬해인 646년에 완공된다. 불과 1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어떤 분들은 좋은 건축이란 느린 건축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빠르고 완결성을 갖춘 안전한 건축이야말로 단연 최고 중의 최고이다.

자장은 울산의 태화사에도 불사리를 모신 탑을 건립하는데, 태화사의 앞에는 태화지용과 관련된 용연(龍淵)이 있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또 646년 가을에는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조성한다. 통도사에도 또한 구룡지(九龍池)가 있는데, 이는 구황동(九黃洞)에 위치한 황룡사용과 연관된 설화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대작불사들을 통해서, 자장은 신라불교의 기틀을 확립하고 이후 통일의 토대를 마련한다. 끝으로 자장은 진덕왕대 말기에는 국가고문의 역할에서 물러나 강원도로 은거하는데, 이때 오대산 중대에 적멸보궁을 개창하고 최후로 정암사에서 고요한 입적에 들게 된다.

황룡사는 신라를 넘어서 고려에서도 가장 비중 있는 사찰의 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황룡사 9층 목탑의 세계재패라는 상징은 1238년 몽고의 3차 침입 때 잿빛 연기 속으로 사라진다. 황룡사가 불탈 때 3개월 동안 경주 하늘이 일식처럼 어두웠다는 기록은 당시의 처연한 상황을 잘 나타내준다. 이렇게 황룡사 9층 목탑 역시 600년의 영광을 뒤로한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세워졌던 터.

이 탑이 800년의 깊은 잠에서 다시금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64년 12월 목탑의 중심기초인 주심초석에 있던 불사리와 사리장엄구가 도굴되면서이다. 당시 호암미술관이 문화재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를 발견하고, 1966년 경찰에 의해 도굴꾼이 검거된다. 이렇게 해서 사리장엄구와 더불어 자장율사가 모신 불사리 역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통도사나 오대산 중대 등 어떤 보궁에서도 사리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없다. 통도사는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에 의하면, 1705년에 열린 것이 마지막이다. 즉 300년이 넘도록 닫혀만 있는 셈이다. 또 적멸보궁이라는 명칭이 시작되는 오대산 중대 역시 특수한 돌방무덤의 구조상 열린 흔적이나 기록이 없다.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자현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한국불교의 보궁신앙은 자장율사가 모셔온 불사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조계종의 끈질긴 반환노력으로 환수된 황룡사 사리는 우리가 이 시대에 볼 수 있는 유일한 문수보살에 의한 부처님의 영골(靈骨)이라고 하겠다. 9층 목탑이 있을 때도 이 사리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우리는 무척이나 영광된 불연(佛緣)을 성취하고 있는 셈이 된다.

황룡사지의 관할 교구인 불국사는 반환된 사리 5과를 국보 제26호인 비로자나불좌상과 27호인 아미타불좌상에 봉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즉 다시금 닫히면 금생에는 보기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은 보물섬에 들어가서도 빈손으로 나온다’고 하셨다. 이제 모든 별빛을 가리는 태양과 같은 불사리가 출현했는데, 어찌 가서 친견하고 공덕을 심지 않겠는가! 불사리야말로 가장 위대한 복 밭이니, 모두 함께 합장한 채 공덕 지으러 나아가자.

[1445호 / 2018년 6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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