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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관중과 포숙의 우정

기자명 김정빈

나를 낳아준건 부모지만 알아준건 포숙이었다

춘추전국시대 포숙은 스스로가
관중보다 못한 것 잘 알았기에
자신 지위 낮아지는것 알면서도
주공에게 관중을 재상으로 추천
관포지교는 부처님의 여실지견

그림=근호
그림=근호

춘추시대 제(齊)나라 양공(襄公)에게는 노녀(魯女)에게서 장자 규(糾)가, 거녀(莒女)에게서 차자 소백(小白)이 있었다. 자(字)가 중(仲)인 관이오(管夷吾)와 그의 절친한 벗인 포숙아(鮑叔牙)가 서로 논의하였다.

“다음 군위를 계승할 자는 두 공자(公子) 중 하나일 것이니 우리가 각각 맡아서 가르친 다음 임금을 계승한 쪽에서 다른 쪽을 천거하기로 하자.”

이 계책에 따라 관중은 소홀(召忽)과 함께 규의 스승이 되고, 포숙은 소백의 스승이 되었다.

양공은 매우 음란하여 누이이자 노후(魯侯)의 비(妃)인 문강(文姜)과 사통하였으며, 노후가 이를 의심하자 비밀리에 살해해버렸다. 포숙은 소백으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그 일을 간하게 하였다. 양공이 아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포숙아는 소백을 설득하여 외가인 거나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양공은 부하 장수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반란자들은 이복형제인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임금 자리에 옹립했는데, 사정이 이렇듯 화급해지자 관중은 소홀과 함께 공자 규를 모시고 노나라로 망명하였다. 공손무지는 어쩌다가 임금 자리에 올랐을 뿐 신하들로부터 신임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인 옹름, 고혜, 곽아 등은 공손무지와 그를 옹립한 연칭, 관지부를 살해한 다음 노나라로 사신을 보내 환공의 장자인 공자 규를 맞아들이려 하였다. 노나라 장공은 규에게 전차 300승을 빌려주었다.

공자 소백 또한 본국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포숙아와 의논하여 거나라로부터 전차 100승을 빌어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들이 도중에 밥을 짓고 있다가 황급히 본국으로 가고 있던 관중 일행과 만났다. 관중은 활을 들어 소백을 쏘았다. 화살을 맞은 소백은 큰소리를 지르며 쓰러졌고, 그의 종자들은 주군의 시신 옆에 몰려들어 울부짖었다. 관중은 전차를 몰아 나는 듯이 달아났다. 그러나 소백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화살은 그의 혁대를 맞추었을 뿐인데,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혀를 깨물어 피를 토하며 짐짓 화살에 맞은 체했던 것이다. 포숙은 자신의 주군을 변복시켜 전차를 몰아 지름길로 제나라를 향해 달렸다.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臨淄)에서 조금 떨어진 데 도착한 다음 포숙은 공자 소백을 거기에 머물게 하고 자기 혼자 조정에 들어가 대신들을 설득했다. 대신들은 차자인 소백을 임금으로 삼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포숙은 소백이 먼저 도착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점과 장자인 규를 세울 경우 노나라에서 은혜를 보답해달라고 강요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대신들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결국 소백이 군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제환공(齊桓公)이다.

환공을 옹립한 다음 포숙아는 군대를 일으켜 노나라를 압박하였고, 제나라에 비해 힘이 약했던 노나라는 공자 규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포숙아의 요청에 따라 공자 규의 스승인 소홀과 관중은 함거에 태워져 제나라로 향하게 되었다. 이에 소홀은 부끄러움을 느껴 섬돌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고, 관중은 친구의 의중을 넌지시 헤아리며 묵묵히 함거에 올랐다.

친구가 돌아오자 포숙은 그를 반가이 맞이하였다. 관중은 겸연쩍어하며 “나는 주군을 위해 죽지 못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포숙은 “큰일을 이루는 자는 작은 부끄러움을 근심치 않는 법이오. 그대는 단지 때를 못 만난 것뿐이오”라며 친구를 위로했다.

포숙은 환공에게 관중이 천하제일의 인재이므로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환공은 “그는 나에게 활을 쏜 사람이오. 나는 그가 쏜 화살을 아직도 갖고 있소.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오”라며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포숙이 다시 설득하여 말했다.

“주공의 허리띠를 쏠 때 그는 공자 규를 알았을 뿐 주공은 알지 못했습니다. 주공이 그를 기용하시면 그는 주공을 위해 천하를 쏠 것입니다. 어찌 한 사람의 허리띠만을 쏠 뿐이겠습니까?”

마뜩치는 않았지만 환공은 관중을 만나주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사흘 밤낮에 걸쳐 관중과 국사를 의논해보고 나서 그의 탁월한 식견에 탄복한 환공은 관중을 재상에 임명하는 한편 그를 존칭하여 중부(仲父)라고 불렀다.

관중을 추천함으로써 포숙아는 관중보다 낮은 지위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런 사정은 관중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죽기 직전에 후임 재상을 추천해달라는 환공의 부탁을 받은 관중은 포숙아는 부족한 면이 있다며 영척, 습붕이라는 다른 인재를 추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포숙은 관중의 그 모든 처사에 대해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포숙은, 자신과의 우정보다 국사를 먼저 고려하는 관중의 그런 마음가짐이야말로 그가 재상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라고 여겼다. 환공은 관중을 비롯한 여러 인재의 도움을 받아 당대의 중국을 호령하게 된다. 역사는 그를 춘추 시대의 다섯 패자(霸者) 가운데 으뜸으로 치고 있다.

깨달음은 자신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얻어지기 때문에 불교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강조하게 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주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아, 내 경쟁자가 나보다 뛰어나면 뛰어나다고 인정하고, 내가 남보다 못하다면 못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여실지견이다.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마음이 그사이에 개입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기본적인 욕구이며, 이 욕구가 색안경이 되어 나와 남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가린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나보다 우수한 사람을 나와 같은 정도의 사람, 또는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평가하게 된다.

포숙은 자신이 관중보다 못한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지위가 낮아짐을 감수하고 관중을 추천했다. 이 말은 그가 관중의 우수함을 잘 알고 있었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는 지극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자신과 친구의 능력치를 파악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친구의 아래에 머물러 일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거기까지 가능한 사람은 드물긴 하지만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포숙은 거기에서도 더 나아갔다. 그는 단지 친구의 아래에 머문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한 점 거리낌도 없는 흔연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관중 또한 그런 포숙의 마음가짐을 잘 알고 있었다. 관중은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었다”고 말하며 친구에게 감사했다. 불교적 입장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여실지견의 사귐이었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45호 / 2018년 6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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