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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사치오의 성삼위일체와 영산회상도

기자명 주수완

과거 종교적 사건에 지금이라는 시간 부여해 현재의 삶 경책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마사치오 ‘성삼위일체’ 벽화

벽화 적용된 본격적 원근법
다른 벽화와 다른 걸작 평가

한 점에 모이는 일점소실법
그림에 색다른 공간감 부여

한 그림에 3개 원근법 적용
르네상스판 홀로그램 같아

밖을 바라보는 성모마리아
벽화 속 이야기 현실로 소환

법화경 설하는 영축회상도
현실감 심어주는 기법 같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정면 전경.

아시시를 떠나는 것도 로마를 떠나는 것만큼이나 아쉬웠다. 어쩌면 더 큰 아쉬움과 망설임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다음 행선지인 피렌체가 너무나 큰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필자는 “피렌체는 세계의 경주다”라고 말하고 싶다. 경주가 필자에게 주는 무게만큼이나 피렌체는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관광객이라면 그저 기대되는 도시이겠으나 미술사학자에게 피렌체는 말하자면 전쟁터 같은 곳이다. 수많은 걸작들과 씨름해야하고 그만큼 무엇인가를 배우고 얻어 와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감돈다. 왠지 나는 아직 피렌체를 돌아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곳으로 가야하는 기묘한 주저함이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 아시시 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오후 8시경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에 도착했다. 피렌체에는 여러 기차역이 있지만 주요 유적과 박물관을 돌아보기에는 역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으로 가는 것이 좋다. 오후 8시이지만 4월의 피렌체는 아직 환했다. 숙소로 말할 것 같으면 아시시는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그것도 고풍스런 식당이 딸린 아름다운 호텔에서 묵을 수 있었지만, 세계의 관광지 피렌체는 역시 숙박비가 비교도 안될 만큼 비쌌다. 더구나 피렌체에서는 며칠을 머물 생각이었기 때문에 비싼 호텔에 묵었다가는 지출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역에서 가까우면서도 여러 명이 한 방에 묶어 저렴한 도미토리로 예약을 해두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아직 약간 남아있는 햇살에 가볍게 피렌체를 산책했다.

성당 내부와 측벽에 그려진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 프레스코화.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필자의 실제 일정은 조금 달랐지만 연재의 편의상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벽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이미 익숙하게 들리실지 모르는 이 성당은 향수, 비누, 그리고 향초로 유명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바로 그 성당이다. 이곳에서 제조되어 그 앞 약국에서 팔았다던 제품들이 이제 피렌체 명품이 되었다. 물론 이 성당은 향수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건축과 벽화로 더 유명한데,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의 대표작 ‘성 삼위일체(Holy Trinity)’가 중요하다. 마사치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중에서도 가장 칭송받는 콰트로첸토, 즉 1400년대(15세기)의 시작을 이끌었던 화가로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와 같은 후대의 거장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성 삼위일체’는 그의 1425년 작품이다.

이 벽화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성자예수를 성부이신 하나님이 뒤에서 받쳐 들고 계시고 이 두 분의 얼굴 사이로 성령을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마치 하나님 쪽에서 예수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아래로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요한이 각각 좌우에 서 있고 이보다 앞으로 돌출된 한단 낮은 단에는 두 명의 공양자가 경건하게 기도하며 서있는 구도이다.

이 벽화가 유명한 이유는 본격적으로 적용된 원근법 때문이다. 회화에 있어 원근을 통해 깊이감을 나타내는 기법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법’이라고 이름붙일 정도의 체계화된 개념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사치오가 이 벽화에서 사용한 원근법은 마치 원근법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듯 매우 깊은 감실 속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표현하고 있다. 이 감실의 둥근 천정은 로마 판테온의 둥근 천정에서 본 것 같은 네모난 격자형의 틀로 마감되어 있는데 이 틀을 형성하는 앞뒤 방향의 직선이 저 안쪽에 있을 것 같은 하나의 점을 향해 모이는 ‘일점소실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소실점은 화면 맨 앞의 두 공양자가 서 있는 바닥 중앙에 모이는데 이 지점이 대략 실제 관람객의 눈높이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런 소실점에 의한 원근법 덕분에 화면 속 감실은 실제 움푹 들어가 있는 공간처럼 보인다.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 1425년작. 높이667㎝ × 폭317㎝.

그러나 초등학교 때 배우는 X자로 교차하는 대각선을 도화지에 그리고 그 안에 사물을 배치하여 원근감을 표현하는 이 초보적 기술 때문에만 마사치오가 유명한 것은 아니다. 마사치오는 이 역삼각형의 원근법적 틀과는 별도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내는 독립된 역삼각형을 강조했다. 시각적으로 이 삼각형은 결국 건축적 배경인 감실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공간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거기에 성부의 머리를 삼각형의 한 꼭지점으로 하여 두 공양자의 위치를 밑변으로 하는 시각적 삼각형이 하나 더 형성되는데, 이는 앞서의 두 역삼각형과 반대되는 또 하나의 공간을 구축한다. 아래서 위로 올려다 볼 때의 또 다른 원근법이 중첩된 것이다.

이를 일종의 다중적 원근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이 벽화는 정면에서 보았을 때만 원근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옆에서 보더라도 원근감이 느껴진다. 마치 정말로 벽 안으로 공간이 뚫려 있어서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벽 안쪽으로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은 벽면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보더라도 앞으로 돌출된 듯한 나아가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끔 고안되었다. 맨 앞에 공양자, 그 안쪽으로 성모와 요한, 그리고 그보다 더 깊고 높이 위치한 삼위의 모습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뤄내는 또 다른 시각적 삼각형에 의해 형성된 제2의 원근감이다. 르네상스판 홀로그램이라고나 할까! 이것이야말로 마사치오의 원근법이 후대에 두고두고 연구대상이 되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기발한 공간감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는 요소가 있으니, 바로 성모 마리아께서 마치 관람객, 아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화면 밖으로 돌리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손까지 들어 우리에게 아드님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안내하고 있는 듯하다. 원래 그림은 이야기를 묘사하기 위해 그려지기 마련인데 그런 경우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마사치오의 벽화처럼 화면 밖 관람자를 쳐다본다는 것은 그 유기적 연결을 깨고 독립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모의 이 작은 일탈로 인해 마치 화면 안의 이야기가 지금 관람객들, 즉 우리들 앞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다가오게 되었다. “실제 공간”이라는 설정은 사실은 공간 때문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보여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14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예수를 콰트로첸토에 들어선 피렌체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 철저한 “현재성” 앞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신의 현현을 대하는 듯하다.

‘성 삼위일체'에 보이는 중첩된 시각적 삼각형들과 비스듬한 각도에서 보았을 때도 드러나는 원근감.

이렇듯 화면 안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임으로써 그림 속 이야기와 현실을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개념은 우리나라의 영산회상도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영산회상도란 인도 마가다국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고 계신 부처님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역시 2000년도 넘게 오래 전 인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묘사한 그림인 셈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흥국사 영산회상도의 설법을 듣고 있는 보살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보살이 발견된다. 바로 불화 가운데 높이의 좌우 끝 쪽에 위치한 두 분의 보살이다. 이 분들은 마치 대열에서 이탈하듯이 고개를 갸우뚱 내밀면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주변의 다른 보살과 존상들이 석가모니의 설법에 집중하는 듯이 보이는 것에 비해 정면의 관람객을 응시함으로써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더불어 예불자들을 화면 안으로 강렬하게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마치 20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회에 우리를 초대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를 통해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타임 슬립을 통해 인도의 마가다국에 선 듯한, 아니면 영축산이 시공을 이동하여 우리 앞에 나타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원래 종교화는 늘 과거를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이야기가 모두 까마득한 과거의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림 속 인물이 화면 밖의 관람자를 응시하면서 만들어내는 강렬한 현재성은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이야기로 탈바꿈시킨다. 이렇게 현재화된 종교화는 일종의 혁신이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거기 너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답하는 신앙심의 발로처럼 다가온다.

여수 흥국사 영산회상도(조선 1693년)의 화면 중단 좌우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보살상.

그런데 마사치오의 이 벽화 하단부에는 누워있는 해골이 그려져 있다. 아담의 해골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해골그림 주제는 흔히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로 소개된다. 여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도 한때 당신과 같았고 당신 역시 언젠가 나와 같이 될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현재에 충실하게 될 것이다. 이 끔찍한 해골은 사실상 우리에게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할 것을 일깨우는 충격요법인 셈이다. ‘까르페 디엠’ 즉 ‘현재를 잡아라'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까. 이를 통해 마사치오가 얼마나 이 작품 속에서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는지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선비요법경' 같은 불교수행서에도 백골관상법이 있으니 아마도 그 취지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45호 / 2018년 6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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