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6․7대 총무원장 청담 스님-상
9. 6․7대 총무원장 청담 스님-상
  • 권오영 기자
  • 승인 2018.07.02 13:58
  • 호수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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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된 한국불교 혁신을 꿈꿨던 불교정화운동의 기수

1926년 영호 스님 은사로 출가
각황사 조선불교학인대회 주도
선학원 이사 맡으며 정화 발원
성철 스님 등과 ‘봉암사 결사 ’
청담 스님(사진 밑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다섯번째)은 1928년 3월 당시 불교계를 비판하며 향후 진로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불교학인대회 개최를 주도했다. 출처 ‘한국불교 100년 ’

1971년 11월15일 밤 10시15분, 서울 조계사에 범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무원장 청담 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열반종이었다. 청담 스님은 하루 전날인 14일 오후 몇몇 신도들과 서울 도봉산장을 올랐다가 다음날 새벽 쓰러져 혜화동 우석대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그러나 응급처치에도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고, 주치의로부터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결국 이날 오후 5시30분경 스님은 다시 조계사로 옮겨졌고, 이날 밤 스님과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연을 접었다.

다음날 아침 주요언론은 청담 스님의 입적 소식을 앞다퉈 보도했다. 그러나 전날까지 총무원장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청담 스님이었기에 불자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일각에서는 ‘정화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테러’ ‘(스님의) 몸에 반점이 생긴 것은 누군가 음식물에 약물을 넣은 것’이라는 등 타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청담 스님의 사인은 뇌졸중으로 발표됐다. 두 차례에 걸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전력이 있는데다 70세 노구에도 불구하고 종무행정과 전국 각지를 돌며 하루 평균 8~9회에 달하는 설법을 하는 등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생긴 피로누적이 원인으로 추정됐다. 여기에 청담 스님의 주치의 서순규․노영무 박사도 “(청담 스님의) 몸에 생긴 반점은 갑작스럽게 쓰러지면서 피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일어난 현상”이라고 소견을 밝히면서 조계종은 청담 스님의 사인을 뇌졸중으로 최종 결론내렸다. (‘청담순호선사 평전-방남수, 임병화 평저’)

‘대한불교’(1971년 11월21일자)에 따르면 청담 스님의 빈소가 마련된 조계사에는 사회 각층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화와 함께 김정렴 비서실장을 보내 조의를 표했으며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해 백두진 국회의장,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 등 정관계 인사들은 직접 조계사를 찾아 조문했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이웃종교계 대표들도 청담 스님의 입적을 애도했다.

11월19일 서울 동국대 운동장에서 엄수된 청담 스님의 영결식에는 전국 사찰에서 온 스님과 신도를 비롯해 정계와 사회지도자 등 2만여명이 운집했다. 영결식에 이어 다비식이 열리는 삼각산 도선사까지 이어진 운구행렬에는 수많은 시민과 불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워 북새통을 이룰 정도였다. 당시 청담 스님이 한국불교계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웅변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현대불교사에서 ‘청담’이라는 인물을 수식하는 단어는 적지 않다. ‘불교정화의 기수’ ‘통합종단 출범의 산파’ ‘조계종단 재건의 주역’ ‘육환장을 든 선사’ ‘인욕보살’ 등 따라다니는 수많은 별칭만큼 청담 스님은 현대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왜색불교에 맞서 조선불교 개혁을 위한 전국학인대회를 주도했고, 해방 이후 성철 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진행했다. 1950~60년대 불교정화의 기치를 내걸고 비구승 중심 종단 건설에 앞장섰고,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후에는 종회의장, 종정, 장로원장, 총무원장 등을 잇따라 역임하며 종단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종단 혁신에 대한 강한 열망은 때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과도한 형태로 표출됐고, 이는 종단 내부의 갈등과 분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청담 스님은 1902년 경남 진주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향리 서당인 봉련재에서 한학을 배웠고, 17세에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발발한 3․1운동에 참가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왜경에 잡혀 1주일간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스님이 불연을 맺은 것은 20살 되던 해였다. 청담 스님의 회고록 ‘나의 입산 50년’(‘사상계’, 1965년 12월호)에 따르면 청담 스님은 진주농업학교 1학년 시절, 진주 호국사에서 포명 스님을 만나 불교에 심취했다. 포명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출신으로 유교와 도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 출가해 오랜 기간 수행해 온 스님이었다. 포명 스님으로부터 전해들은 불교 이야기는 청담 스님에게 큰 감명을 줬고, 출가자의 삶을 동경하게 했다.

이 무렵 청담 스님은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뒀으며,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 할 가장이었다. 그럼에도 불문에 귀의하겠다는 그의 염원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출가의 길은 녹록치 않았다. 해인사를 찾아 출가를 의뢰했지만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이듬해 용성 스님을 찾아 백양사로 향했지만 인연을 맺지 못했다. 청담 스님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운송사에서 바랑을 풀고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사찰에서의 삶은 청담 스님이 꿈꿨던 불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일본불교는 수행이 아닌 관념의 불교요, 형식의 불교이며 정통이 아닌 변형된 불교”(‘청담순호선사 평전’)였다. 결국 청담 스님은 2년 6개월간의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뒤 1926년 고성 옥천사에서 영호 스님을 은사(‘청담순호선사 평전’에서는 청담 스님의 은사를 남경봉 스님이라고 표기했지만 조계종 홈페이지에는 영호 스님으로 기록)로 수계하고 ‘순호’라는 법명(청담은 법호)을 받았다.

이후 청담 스님은 당대 최고의 강백 한영 스님이 운영하고 있던 개운사 강원에 입학해 불교교리를 익혔다. 청담 스님이 ‘불교정화’라는 원력을 세운 것도 이 무렵이다. 청담 스님은 학인 신분으로 1928년 3월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학인대회 개최를 주도했다. ‘이청담과 불교정화운동’(김광식)에 따르면 조선불교학인대회는 학인들이 ‘조선’을 구제해야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당시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향후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했다. 자연 일본불교에 저항하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청담 스님은 이 대회의 성사를 위해 전국 40여 곳의 강원을 순례하며 설득에 나섰다. 그 결과 3월14~17일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학인대회에는 전국학인대표 40명이 참석했다. 대회에서는 학인의 기본방향․수학문제․일상생활․학인조직 등이 논의됐으며 전국강원학인 연합체인 학인연맹도 발족됐다. 일본의 탄압으로 학인연맹은 지속되지 못했지만, 이 일은 청담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든 첫 사건이자 스님이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부각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개운사 강원을 수료한 스님은 1930년 5월 덕숭산 정혜사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서 만공 스님을 만나 참선을 지도받았고, 한국불교의 혁신에 대한 광범위한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청담 스님이 일제강점기 선학원을 중심으로 왜색불교 청산과 불교정화 운동에 뛰어들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청담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치열했다. ‘화두를 붙잡고 앉으면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일을 제외하고 일어나는 일이 없었으며 하루 3시간 이상 눕지 않는’ 고된 일과를 반복했다. 마침내 선방 수좌들 사이에서 청담 스님이 견성했다는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만공 스님도 비로소 이를 인가하고 ‘올연(兀然)’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청담 스님의 견성 소식은 입소문을 타고 진주까지 전해졌다. 이 무렵 진주불교신도회는 연화사를 건립하고, 낙성법회를 즈음해 청담 스님에게 법문을 요청했다. 진주는 청담 스님의 속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노모를 만난 청담 스님은 “대를 이어 달라”는 간곡한 호소를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청담 스님은 ‘지옥에 갈 각오로 하룻밤의 파계’를 선택했다. ‘청담순호선사 평전’에 따르면 청담 스님은 이 일이 있고 난 뒤 오대산 상원사에서 ‘딸을 분만했다’는 전보를 받고 죽음을 결심했다. 그러나 도반들의 만류로 뜻을 접었지만 청담 스님은 이후 상원사에서 100일 간 참회기도를 진행했고, 10여년 간 맨발의 고행을 감행했다. 이후 청담 스님은 노모와 아내, 딸까지 출가를 길로 안내했다. 이 때 태어난 딸이 훗날 ‘비구니계의 큰 별’로 꼽혔던 묘엄 스님이다.

그러나 청담 스님의 ‘하룻밤의 파계’는 자신이 그토록 주창했던 ‘출가자의 지계청정’과는 거리가 먼 행위였다. 비록 늙은 노모를 위한 효심에 따른 것이었고, 이후 참회의 삶을 살았더라도 파계는 파계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청담 스님이 훗날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대처측으로부터 따가운 비판을 받는 빌미로 작용했다.

일제강점기 청담 스님이 불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34년 12월 조선불교선리참구원 이사를 맡은 이후부터다. 선리참구원은 1921년 전통불교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선학원이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바뀐 이름이었다. 1930년대 만공 스님 등이 중심이 돼 한국불교의 전통수행인 선을 대중화 시키고, 선학원 운영을 정상화 시키겠다는 목적이었다. ‘이청담과 불교정화운동’(김광식)에 따르면 선리참구원 출범을 주도한 청담 스님은 1935년 3월 한국불교 전통회복과 청정계율 파괴를 극복하기 위한 수좌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불교선종 발족을 주도했다. 이후 1941년 선학원에서 수좌 중심의 유교법회 개최를 이끌면서 청담 스님은 점차 수좌계에서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해 2월26일부터 10여일간 진행된 유교법회에는 30여명의 수좌들이 참석했으며 만공․동산 스님이 법사로 나와 ‘범망경’ ‘유교경’ 등을 설법했다.

청정승풍 계승과 전통불교 회복에 대한 청담 스님의 염원은 해방이후에도 이어졌다. 1947년 성철 스님 등이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자, 청담 스님은 이듬해 봄 결사에 동참했다. 봉암사 결사는 피폐된 교단과 교법이 무너진 불교계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수행자들의 냉철한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식민지 불교의 잔재를 극복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성철 스님 등과 함께 진행한 2년여 간의 봉암사 결사는 청담 스님이 당시 혼탁한 한국불교계에서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청담 스님의 불교정화운동은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46호 / 2018년 7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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