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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화엄석경 세미나 1. 화엄사 창건의 역사적 배경

“구례 화엄사, 8세기 비의상계 연기 스님에 의해 창건”

화엄사 창건, 신뢰할 기록 부족
‘사경발원문’으로 연대 추정가능
연기법사, 비의상계 화엄학승
화엄학 이론 교학적 검토에 관심

최연식 교수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법사는 비의상계 화엄학승의 대표적 인물로 화엄학 이론을 교학적으로 검토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설명했다. 출처=‘남도여행길잡이’
최연식 교수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법사는 비의상계 화엄학승의 대표적 인물로 화엄학 이론을 교학적으로 검토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설명했다. 출처=‘남도여행길잡이’

지리산 화엄사는 신라 화엄십찰 중 하나로 유명하지만 사찰 창건의 역사적 배경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창건 시기와 창건을 주도한 인물에 관해서는 후대의 자료에 다양한 전승이 전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 기록으로 보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1970년대 말에 화엄사 창건자로 전하는 연기법사(緣起法師)가 발원하여 만든 ‘화엄경’ 사경(寫經)이 확인되면서, 전설로만 전하던 연기법사의 화엄사 창건이 역사적 사실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연기법사가 화엄사를 창건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는데, 최근 통일신라 불교계의 사상적 동향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화엄사가 창건되던 8세기 중엽에 신라 불교계에서 화엄학이 새로운 주류적 흐름으로 크게 대두하였고, 연기법사가 그러한 흐름을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종합한다면 화엄사는 8세기 중엽에 화엄학이 신라불교계의 주류적 흐름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가운데 그러한 흐름을 주도한 연기법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엄사 창건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문헌들에 다양한 전승이 전하고 있다. 즉, 15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어느 시기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연기(煙氣)라는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였고, 1636년에 편찬된 ‘화엄사사적’에서는 백제 법왕(法王) 때에 인도 승려연기(緣起)가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후기에 편찬된 ‘구례속지(求禮續誌)’ ‘속수구례지(續修求禮誌)’ ‘봉성지(鳳城誌)’ 등의 지방읍지에서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가 창건하고 이후 선덕여왕 때에 자장(慈藏)이 중창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전승들은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구전 전승을 토대로 점차 살을 붙여간 것으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힘들다. 다만 여러 기록에 연기라는 이름의 승려가 창건 주체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실제로 연기법사가 화엄사 창건을 주도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고려 중엽인 11세기 후반에 활동한 대각국사 의천(義天)도 화엄사를 방문하고서 사찰에 모셔져 있던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영정을 보고 조사를 추모하는 시를 지었는데, 고려시대의 사찰에 영정이 모셔진 조사들이 대부분 사찰 개창자였던 것을 보면 당시 화엄사에서 연기법사가 개창조(開創祖)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연기조사가 어느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언제 화엄사를 개창하였는가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가 1970년대 말에 학계에 보고되었다. 755년에 신역(新譯) ‘화엄경’을 필사한 백지묵서(白紙墨書) ‘화엄경’의 뒤에 붙은 ‘화엄경사경발원문’이 그것으로, 이 발원문에는 황룡사의 연기(緣起)법사가 아버지를 위해 ‘화엄경’ 사경을 발원하여 755년 2월14일에 완성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발원문의 내용을 통하여 연기법사가 755년 당시에 실존하였던 인물임이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전라도 지역에서 ‘화엄경’ 사경 작업을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화엄경’을 필사하는데 있어 종이를 만들고 경전 본문을 쓰는 1차 작업은 전라도 지역의 사람들이 담당하였고, 본문이 완성된 후에 경심(經心)을 만들고, 변상도[불보살상]를 그리고, 표지의 제목을 쓰는 등의 장황(粧䌙)은 대경(大京), 즉 경주의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할 분담은 이 ‘화엄경’ 필사 작업이 처음에 전라도 지역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이를 만들거나 경문을 필사하는 등의 작업은 현지의 전문가가 담당할 수 있었지만 보다 난이도가 높은 장황 기술은 현지에서 전문가를 구할 수 없어 수도 경주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작업을 담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수도 경주에는 종이를 만들고 경문을 필사할 사람이 많이 있을 터이므로 굳이 지방에서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발원문을 보면 종이를 만들고 경문을 필사하여, 장황하는 작업이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경 작업은 과연 어디에서 이루어졌을까. 발원문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지만 내용상 사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발원문의 내용 중에 경문을 쓸 때에 필사들이 함께 이동하고, 그때에 청의동자들이 앞에서 인도하고, 기악인들이 기악을 하고, 법사들이 범패를 하는 모습이 서술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세속의 공간이 아닌 사찰에서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제식(齊食)을 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사찰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자료에 연기법사가 화엄사의 창건 조사로 나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사경 작업이 이루어진 사찰은 다름 아닌 화엄사였다고 추정된다.

다만 발원문에는 화엄사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으며, 연기법사도 화엄사가 아닌 황룡사의 승려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화엄사가 아직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이전 단계였기 때문에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나 고려시대에 사찰의 창건은 최종적으로 국가의 인정을 받아야 공식 사찰로 인정되었다. 국가는 해당 사찰에 사찰의 이름을 내려주면서 국가의 공식 사찰로 인정해 주었다. 국가의 인정을 받기 이전에는 공식 사찰이 아니라 개인의 사적인 절로서 국가의 공식적인 관리와 지원의 대상에 속하지 못하였다. 연기법사가 창건한 사찰이 화엄사라는 정식 이름을 얻고 국가가 지원하는 주요 사찰로 인정된 것은 발원문이 작성된 755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화엄사가 국가에 의해 공인된 이후에 연기법사의 소속도 황룡사에서 화엄사로 바뀌었을 것이다.

8세기 중엽 신라 불교계에는 화엄학이 크게 융성하고 ‘화엄경’이 중시되었는데,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법사는 그러한 사상적 흐름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화엄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기법사의 사상 경향은 8세기 후반 이후 신라불교계의 주류적 흐름이 된 의상계의 사상적 경향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상계 화엄학은 비록 교학불교이지만 이론의 체계화에 중점을 두었던 중국의 화엄학과는 달리 이론보다는 자신의 몸을 이용한 직접적인 체득 혹은 직관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하였다. 또한 경전적 근거나 논리적 설명보다 스승에게서 전해오는 구전(口傳)의 비밀스런 가르침을 중시하기도 하였다. 경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화엄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절대시하면서 ‘화엄경’에 다른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경전들은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 화엄종에서 중시하는 ‘대승기신론’에 대해서도 ‘화엄경’에 미치지 못하는 낮은 수준의 가르침으로 평가하였다.

8세기 중엽에 활동한 화엄학 승려 중 의상계와 사상 경향을 달리하는 승려로는 연기와 가귀(可歸), 표원(表員) 등이 확인되는데, 이들 사이에는 일정한 사상적 공통성이 보이고 있다. 이들은 후대의 의상계 문헌에 전혀 인용되고 있지 않으며, 저술의 성격에 있어서도 의상계와 차이가 있다.

비의상계 화엄학승 중 가장 선배는 가귀(可歸)이다. 가귀는 7세기말 당에 유학하여 법장(法藏)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승전(勝詮)의 제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이었다고 한다. 승전은 692년에 귀국하면서 법장의 부탁으로 의상에게 법장의 편지와 저술들을 전해주었지만 이후 의상계와는 별도로 문도를 육성하며 화엄사상을 가르쳤다. 승전의 문도는 가귀 이외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승전이 개창하고 머물렀던 사찰은 758년에 나중에 원성왕이 되는 귀족 집안과 관련되는 사람들에 의해 중창되어 갈항사(葛項寺)로 불리게 되는데, 중창 당시 갈항사에는 가귀 혹은 그의 문도들이 주석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귀의 저술로는 ‘심원장(心源章)’과 ‘화엄경의강(華嚴經義綱)’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다.

연기는 가귀보다 활동시기가 조금 늦는데, ‘화엄경개종결의(華嚴經開宗決疑)’ ‘화엄경요결(華嚴經要決)’ ‘화엄경진류환원락도(華嚴經眞流還源樂圖)’ ‘대승기신론주망(大乘起信論珠網)’ ‘대승기신론사번취요(大乘起信論捨繁取要)’ 등의 저술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저술은 ‘화엄경’과 ‘기신론’에 대한 것들인데,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도 그가 ‘화엄경’과 ‘기신론’을 주로 강의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주된 학문적 관심이 두 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귀와 연기 저술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제목으로 볼 때 두 사람의 저술에는 사상적 공통점이 보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화엄경’의 주요 내용들을 정리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며, ‘대승기신론’과도 사상적 친연성이 보이고 있다. 연기의 사승관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승전-가귀 계열과 일정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활동시기로 보면 연기는 가귀와 동시대 혹은 제자 세대에 해당된다.
 

최연식동국대 사학과 교수
최연식
동국대 사학과 교수

의상계 승려들이 의상의 사상에 전적으로 의거하면서 이론에 대한 탐구보다 실천 수행에 집중하였던 것과 달리 가귀와 연기, 표원 등은 ‘화엄경’의 내용과 화엄학의 주요 이론들을 교학적으로 검토하는 경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상적으로 이들은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을 중시했으며, 법장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동시대 신라에서 영향을 확대하고 있던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의상의 저술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저술 내용도 개념에 대한 설명보다 수행을 통한 체득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법사는 이러한 비의상계 화엄학승의 대표적 인물로 볼 수 있다. 비록 그의 저술이 전하지 않아 사상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저술의 제목으로 볼 때 ‘화엄경’과 함께 ‘대승기신론’을 중시하고, ‘화엄경’의 내용과 화엄학의 이론을 교학적으로 검토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화엄사는 이러한 연기법사의 화엄사상에 기초하여 창건되고 이후 그 전통을 계승하여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1446호 / 2018년 7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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