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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주 미면사지

기자명 임석규

사찰 우물서 쌀과 밀가루가 끊임없이 쏟아졌다는 신비한 도량

고려 때 강진 백련사와 함께
백련결사가 진행됐던 도량

미면사 연원을 밝힌 기록은
천책 스님 시집 ‘호산록’ 담겨

정조 때 기록 사라진 걸 보면
18세기 무렵에 폐사됐을 것

사지는 개인 소유, 훼손 진행
조경석 사용 위해 괴석 반출

절터 중앙의 무너진 적석탑
도굴꾼들에 의해 2차례 훼손

미면사지 중심사역 전경.

12세기 후반에 일어난 무신란은 고려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그 여파는 당시 사상사의 주류었던 불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무신란 이후 불교계는 지눌 스님이 개창한 수선사(修禪社)와 요세(了世)스님에 의한 백련사(白蓮社) 결사가 이 시기를 대표한다고 할 정도로 영향력은 지대했다. 결사란 일종의 종교운동으로 당시 수도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한 왕실 위주의 불교와는 전혀 다른 지방불교 성향을 가지면서 신앙내용도 정토관 및 참법을 표방하여 종교계와 사회 내부의 모순에 대한 반성과 자각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고려시대 불교사에서 수선사(현 송광사)결사와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백련사결사의 주체로 알려진 사찰은 전남 강진의 백련사이고 그 외 또 다른 백련결사가 진행된 곳이 미면사(米麵寺)였다.

천태종의 백련결사는 요세 스님(1163∼1245)이 시작하였다. 스님은 신번현(新繁縣, 합천 지역)의 호장(戶長·지방 향리직의 우두머리) 집안 출신으로 12세에 고향의 천태종 사찰에서 출가한 후 23세 되던 1174년(명종 4)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그 후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천태학을 수학하던 중 1198년(신종 원년) 개경의 고봉사(高峯寺)에서 개최된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실망하고서 뜻을 같이하는 동료와 함께 신앙결사를 만들 생각을 하였다. 이때 팔공산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한 지눌 스님이 그에게 글을 보내어 참여를 권유하자 동료와 함께 참여하여 참선 수행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참선 수행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지눌 스님이 송광산으로 옮길 때에 동행하지 않았으며, 그 후 천태의 법화신앙에 의한 수행을 결심하였다. 이후 근처의 만덕산(萬德山)으로 옮긴 그는 1216년(고종 3)에 백련결사를 결성하고 1239년(고종 19)에는 그곳에 보현도량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천태신앙에 기초한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미면사지 적석탑.

백련결사는 처음에는 만덕산이 있는 강진 지역의 호장층이 주된 후원자였지만 결사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점차 중앙관료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다. 1221년(고종 8)에 남원태수로 있던 복장한(卜章漢)은 남원지역에 제2백련사를 개창하도록 요청하였고, 1236년(고종 23)에는 상주목사로 있던 최자(崔滋)가 상주지역에 백련사를 따르는 미면사(米麵寺, 후대의 동백련사)를 설치하였다. 또 고위관료인 이세재(李世材)는 백련사에 참여하면서 ‘법화경’ 1000여 부를 조판하여 널리 유포시켰다. 최씨 정권도 백련사에 관심을 갖고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최충헌의 부인이 백련사에 무량수불을 봉안하고 최우는 보현도량에서 ‘법화경’을 간행하게 하고 그 발문을 직접 지었다. 백련사에 대한 중앙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요세 스님에게는 1237년(고종 24) 선사의 승계가 주어졌다.

요세 스님 이후 백련사는 제자인 천인 스님(天因, 1205∼1248)과 천책 스님(天頙, 1206∼?) 등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천인과 천책 스님은 모두 성균관에서 공부한 유학자 출신이었는데, 1228년(고종 15)에 함께 요세 스님의 문하에 출가하였다.

천인 스님은 출가 직후 수선사로 가서 참선을 배운 후 다시 백련사로 돌아와 법화신앙을 충실히 계승하고 요세 스님 이후 백련사 제2세 사주가 되었다. 천책 스님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임명을 기다리던 중 윗사람의 지시로 ‘법화경’을 베껴 쓰다가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그는 요세 스님의 명으로 보현도량을 개창할 때 그 발원소를 지었고, 1236년(고종 23)에는 ‘백련결사문’을 지어 백련결사의 의의를 드러내었다. 1244년(고종 31)에 최자의 초청으로 상주 동백련사의 제1세 사주로 갔다가 이후 백련사 제4세 사주를 맡았다.

미면사의 연원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 (天頙)스님이 쓴 시문집 ‘호산록(湖山錄)’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가 있다.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에는 산의 아래쪽에 오래된 절이 있어 미면(米麵)이라 하는데 일명 백련사(白蓮社)라고도 한다. 의상법사가 머문 흔적이 있는데 법문할 때는 용녀(龍女)가 항상 모셨다. 뜰의 좌우에 우물이 있는데 하나에는 쌀이 나오고, 하나에는 밀가루가 나오는데 매일 매일 이러하였다. 비록 공양할 많은 대중이 있어도 모자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다. 지금도 둘 다 남아있다. 또 의상의 설법대(說法臺)와 삿갓과 석장(錫杖)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 의상 스님이 부석사를 창건하던 통일신라 직후에는 미면사도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에는 미면사의 사세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는‘고종 28년 신축년에 소향(少鄕) 최자가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그 기이함을 듣고 시험삼아 방문하였다. 최공이 마음으로 기이하게 생각하여 이에 법조(法曺) 왕공(王公)에 명하여 역(役)을 감독토록 해 새롭게 하였는데 불우(佛宇), 조당(祖堂), 승료(僧療), 객실(客室)로부터 허백루(虛白樓)에 이르기까지 무려 60여 칸이었다.

또 냉천정(冷泉亭) 아래에 누교(樓橋)를 만들어 신청루(神淸樓)로 하고 산을 찾는 사람들의 피로를 풀도록 하였다. 설법당(說法堂)에 이르면 성사(聖師)들의 흔적이 엄연하고 돌들이 배열한 것이 관아 같고 관속들이 흩어지지 않은 것 같으니 모르는 사이에 몸이 쭈뼛해진다. 3년이 경과하여 완성되었는데 이에 공덕산(功德山) 백련사(白蓮社)라는 글씨를 조계산인 탁연(卓然)을 청하여 써서 걸었다. 또한 공이 도량당(道場堂), 조사전(祖師殿), 허백루, 신청루 등의 액(額)만을 써서 걸었다. 만덕산이 호남에 있고, 공덕산이 강동(江東)에 있는 까닭으로 동·남백련으로 불러서 구별하였다’고 돼 있어 많은 전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시대 천태종의 고승 정오(丁午)스님이 10년간 머무르며 천태불교를 설파했다는 기록도 있어 폐사되기 전까지 천태법맥이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미면사지 출토유물.

1799년(정조 23) 고금의 문집과 읍지 등을 고증하여 각도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소재·연혁 등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에는 미면사의 이야기가 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경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종곡리에서 소야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소야리에 접어들면서 300m정도 가면 좌측으로 골짜기를 따라 경작지가 있는 입구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350m정도를 골짜기 소로를 따라 오르면 좌측에 큰 돌무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무너진 적석탑이다. 여기에서 계속 250m 정도를 더 오르면 사지의 입구에 이른다.

미면사지는 남동쪽으로 곧게 난 골짜기 끝에 형성된 평탄한 지역에 자리 잡은 사지로 지형은 골짜기와는 약간 틀어진 동향에 가까운 남동향을 하고 있는데, 실제 사지는 남향을 하고 있었다
고 한다. 전체적으로 15°~25° 정도의 자연경사에 4~5단 정도의 축대 흔적이 미미하게 남아 있다.

사지는 경작지로 사용된 흔적이 있으나 요즘은 조경석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지의 괴석들을 반출하고 있다. 수풀이 우거져 건물지 등의 유구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관련 문헌에 언급되던 마당 좌우의 미면정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적석탑에서 중심사역으로 접어드는 이동로 상의 좌측 골짜기 암반사이에 암반수가 나오는 곳이 있는데, 요즘은 이곳이 미면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대승사사적기’를 적은 벽천(碧天) 스님이 하나의 샘만 남아 있다고 한 것과는 일치한다.

터의 중앙 후반부에는 두꺼운 전돌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바닥을 전돌로 마감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아마도 이곳이 법당과 불전 등과 같은 주요 건물이 있던 중심영역이었을 것이다. 사지의 곳곳에서는 격자문, 어골문, 수파문 등의 기와가 고루 발견되고 있다.

사지에 이르는 골짜기의 중간에는 자연석을 계단식으로 쌓은 방형 적석탑이 있다. 현재 이런 형태의 탑은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 적석탑,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적석탑만이 알려져 있는 매우 드문 형식의 석탑이다.

이 적석탑은 1980년경 중장비와 금속탐지기를 이용한 도굴꾼들에 의해 한 차례 훼손되었으며 1994년에도 또 한번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적석탑처럼 큰 돌을 쌓아 만든 탑을 도굴하기 위해서는 장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장비를 이용해 파헤쳤기 때문에 원래 탑의 형태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안동과 의성의 적석탑과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 청동제품.

다행히 도굴된 유물은 1994년 3월경 압수문화재 국고 귀속품으로 처음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였으며, 현재는 국립대구박물관에 이관 수장되어 있다. 압수된 문화재는 모두 13점으로서 청동반자 1점, 청동반자편 1점, 청동촉대 4점, 청동바라 2점, 철제보습 1점, 납덩어리 1점, 망와 1점, 당초문평와당 1점, 연화문원와당 1점이다. 이외에도 문경 옛길박물관으로 옮겨진 석조물로는 석조광배, 점판암의 석탑재, 승탑의 지대석과 복련석 등이 있다.

미면사는 의상 스님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직 의상 스님 시대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발굴조사를 한다면 사찰의 창건시기 및 가람의 형태를 알 수 있겠지만 토지가 개인소유이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다. 또한 사지에서는 오랜 세월 경작이 이루어졌고 최근에는 석재를 반출하는 등 지속적인 훼손이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적석탑의 조성시기 또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주변에서 고려청자편들과 분청자편,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물결무늬 기와편 등이 발견되어서 미면사는 적어도 고려 초기 이전에 창건되어 18세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폐사된 것 같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46호 / 2018년 7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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