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③
33.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③
  • 최병헌 교수
  • 승인 2018.07.10 10:59
  • 호수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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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로 망명한 보덕 스님에 의해 신라 중기 교학불교 중흥

중국과 계속된 전쟁에도
선진문물 수용에 적극적

연개소문 권력 장악 이후
당에서 도교를 적극 수입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는
공화제 추구 불교와 배치

귀족들과 밀착된 불교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읽혀

고구려 스님의 해외망명
주변국 불교증흥 이끌어
보덕화상이 고구려에서 백제로 와 주석했다는 전주 고덕산 경복사터.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보덕화상이 고구려에서 백제로 와 주석했다는 전주 고덕산 경복사터.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대외관계는 정복과 항쟁의 역사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쟁의 역사적 정점을 이루는 것이 고구려의 수(隋)·당(唐)과의 항쟁이었고, 그를 이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한 삼국통일의 전쟁이었다. 이같이 삼국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의 연속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외교관계나 문화적인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걸림이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수에 의한 중국통일을 불과 10여년 앞둔 25대 평원왕 18년(576) 즈음 대승상 왕고덕(王高德)이 승려 의연(義淵)을 북제(北齊)로 보내어 당시 도통(都統)인 정국사(定國寺)의 법상(法上,495〜580)으로부터 불교사의 대강과 중요한 대승경전들에 대하여 배워오게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에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사와 불교경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 중국의 선진불교의 수입에 열정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문화의 수입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과의 사활을 건 전쟁을 앞둔 27대 영류왕대(618〜642)와 28대 보장왕대(642〜668)에 당에 사신을 여러 차례 보내어 불교와 함께 도교(道敎)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실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영류왕 7년(621) 2월 당에 사신을 보내어 역서(曆書)의 반급을 요청하자, 당의 고종은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과 함께 도사(道士)를 보내어 천존상(天尊像)과 도법(道法)을 가지고 가서 노자의 ‘도덕경’을 강학하게 하였으며, 왕과 나라사람들이 모두 들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다음해에도 사신을 당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의 법을 배워오게 하니 당이 이를 허락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다음대인 28대 보장왕대에도 이어져서 왕 2년(643) 실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 뒤에 당고조의 이름을 피하여 淵氏를 泉氏로 바꿈)의 요청으로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다시금 받아들이고, 불교 사찰을 빼앗아 도관(道觀)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3월에 연개소문이 왕에게 고하기를, ‘삼교(유·불·도)는 솥발과 같아서 그 하나라도 없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융성하나 도교는 그렇지 못하니,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신을 당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나라사람을 가르치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게 여기어 국서를 당에 보내어 요청하였다. 당태종은 도사 숙달(叔達) 등 8인과 함께 노자의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왕이 기뻐하여 불교의 절에 그들을 거처케 하였다.”

618년 중국대륙에서 수가 망하고 당이 건국되자, 고구려는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서쪽 국경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아 국방을 엄히 하였다. 이즈음 고구려에는 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연개소문은 국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무단적인 독재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는 원래 동부(東部, 혹은 西部라고도 함)대인(大加) 대대로(大對盧)의 아들로서 당연히 그 뒤를 계승하게 되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어렵게 그 직위를 이을 수 있었으며 또한 그의 난폭함을 싫어한 귀족들이 죽이려고 하자 오히려 선수를 쳐서 반대하는 왕과 귀족들을 참살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독재정치를 감행하였다. 연개소문의 독재정치는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운영되어 오던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근간에서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귀족세력과 밀착되었던 불교계와도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무단적인 독재정치는 공화제를 이상으로 하는 불교사상에도 배치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연개소문이 유·불·도 3교 융성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특히 도교의 수입을 강행한 것은 불교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 승려들의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으로의 망명은 이러한 정치상황과 무관할 수 없다. 고구려 승려들의 국외망명은 고구려의 불교 쇠퇴와 국력 약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나라의 불교를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편 연개소문은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구하여 당이나 신라에 대항하였다. 그는 백제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하여 구원을 바라는 신라 김춘추의 요청을 거절하고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또한 신라에 대한 공격 중지를 권고하는 당의 간섭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드디어 당태종의 전면적인 고구려 침략이 있게 된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과 정치적·군사적으로 날카롭게 대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동아시아문화의 3대 사상인 유·불·도 3교 융성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당으로부터의 도교 수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문화교류정책은 단순한 선진문화 수용의 욕구에서만이 아니고, 당과 경쟁하는 정치적 의도가 개재된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의 고조 이연(李淵)은 도교의 교조라고 하는 노자(老子)의 이성(李姓)을 당황실의 이성(李姓)과 연결시켜 노자를 ‘당실(唐室)의 조(祖)’라고 하는 설을 채용하였기 때문에 도교는 특별히 보호 장려되었다. 다음대의 태종은 정관 11년(637)에 도교를 불교의 우위에 놓는 칙명을 내려 법림(法琳)이나 도선(道宣) 등 불교승려들의 필사적인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선불후(道先佛後)’의 석차를 확정하였다. 무주조(武周朝)의 천수 2년(691)에 이 석차가 뒤바뀌어 불교가 도교의 위에 위치한 적도 있었으나, ‘도선불후’의 종교정책은 당 황실의 일관된 방침이었다. 그러나 불교와 도교의 선후 문제와 사상적인 우열의 논쟁은 고조대부터 계속되어 일어났으며, 특히 태종대와 고종대는 격렬하게 전개되어 여러 명의 승려들이 유배당하는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당의 사상·종교정책에서 유의할 점은 도교를 우위에 두었다고 하여 불교 자체를 억압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태종은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玄奘)의 역경사업을 지원하여 중국불교사를 현장 전후로 시기를 구분케 할 정도로 불교를 획기적으로 발전케 하였다. 또한 유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천하의 이름난 유학자를 많이 불러들여 학관(學官)을 삼고 태종 자신이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하여 그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케 하였다. 그리고 학생으로 능히 대경(大經, 禮記·春秋左氏傳) 하나 이상에 통달한 자는 모두 관리에 임명케 하였다. 또한 학사(學舍) 1200간을 증축하여 학생이 3260인에 달하게 하니, 사방의 학자가 구름과 같이 경사(장안)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때에 고구려·백제·신라·고창(高昌)·토번(吐藩)에서도 자제를 보내어 입학케 하였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640년 고구려·백제·신라 3국 모두 자제를 당에 보내어 국학에 들어가기를 요청하였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당태종의 이러한 3교에 대한 종교정책은 대외적인 면에서는 동아시아 문화권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그리고 대내적인 면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여 정치는 유교, 종교는 불교와 도교에 의거하는 것이었고, 정치적인 이유로 도교를 우위에 위치시키면서도 불교도 함께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의 무단적인 독재 권력으로 인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를 견제하기 위해 도교를 받아들인 사실만이 확인될 뿐이고, 유교정치를 추구하였다거나 불교 측이 대응하는 구체적인 사실은 일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국외로 망명한 승려들에 대한 사실만이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장왕 9년(650)에 고구려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의 보덕화상이 국가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법을 신봉하지 않으므로 남쪽의 완산(完山,지금의 全州)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사실을 전설화하여 “반룡사에 머물고 있던 보덕화상이 도교가 불교에 맞서게 되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고 하며, 이에 신력(神力)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全州) 고대산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가 바로 영휘 원년 경술년(650) 6월로써 얼마 뒤 나라가 망했다. 지금의 경복사(景福寺)에 있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 그때의 방장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보덕은 삼국통일 뒤 신라중대의 교학불교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외에도 여러 문헌에서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었다. 즉 최치원과 김부식의 ‘보덕화상전’을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과 이자현의 시,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보덕은 자가 지법(智法)이고,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도교만을 숭상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제자인 명덕(明德)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주 고대산(또는 高達山) 경복사로 옮겨왔으며, 그 시기는 보장왕 9년(650) 6월 설과 보장왕 26년(667) 3월3일 설 등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기에 고대산은 고덕산(高德山)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경복사의 비래당(飛來堂)에는 보덕대사의 화상이 있었다고 한다.

위에 들은 여러 자료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의천의 시 2수(‘반룡산 연복사에 와서 보덕성사의 비방(飛房) 옛터를 참예하다’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에서 보덕성사의 진영에 참배하다’)인데, 이로써 의천은 고구려의 반룡산 연복사의 비래방장터와 백제의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의 보덕성사 진영에 참배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의천은 두 번째 시의 주석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전의 구삼국사로 추정되는 ‘해동삼국사’를 인용하여 “보덕은 고구려 반룡사의 사문이었는데, 보장왕이 도교에 미혹되어 불법을 폐기하자, 방장을 날려 보내 백제의 고대산으로 옮겼다. 그 뒤에 신인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너희 나라는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라는 약간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같은 시의 다른 주석에서 “원효와 의상이 (보덕으로부터) ‘열반경’과 ‘유마경’ 등 경전을 배웠다”고 하여 신라 중대 불교의 두 주역인 원효와 의상에게 고구려의 교학불교를 전수해 주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로써 앞서 551년 신라에 망명한 혜량(惠亮)은 고구려의 국가불교를 전해주어 진흥왕대 이후 신라 중고기의 국가불교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던 반면, 650년(또는 667년) 백제에 망명한 보덕은 고구려의 교학불교를 전해줌으로써 백제를 거쳐 신라중대의 교학불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47호 / 2018년 7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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