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사 회주 성운 스님
삼천사 회주 성운 스님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8.07.16 10:36
  • 호수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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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빚 갚으려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일할 뿐!

10살 때 법주사 동진출가
오대산정진 중 마애불 친견
폐사지 삼천사 대도량 중흥

판자촌·교도소 물심양면
인덕원 설립· 불교복지 개척
동대 불교대 최초 석좌교수

‘가피’ 연구 학술상 지원
시민 수행공간 조성 원력
비움이란 ‘조건없는’ 자비심
성운 스님은 “머무른 바 없다는 ‘응무소주’는 비워진 상태를 의미한다”며 “비움이란 곧 ‘조건 없는 것’이요, 거기서 생기는 마음(이생기심)이 청정심이고 자비심”이라고 설파했다.

바다에서 일어선 해가 의상봉에 걸터앉으려 할 즈음 북한산 삼천사(三千寺)에 들었다. 밤이슬에 몸을 씻은 풀잎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자, 새들은 물 묻은 그대로 날아 미루나무 꼭대기에 앉는다. 그리고 바람 한 점 대웅전 처마 끝 풍경에 닿는다. ‘뎅그렁∼’

‘양수강이 봄물을 퍼 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에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공광규 시 ‘수종사 풍경’ 전문)

산사의 여름 아침은 천연스러워 참 좋다. 병풍바위 마애불도 “그렇다!”는 듯 황톳 빛 머금은 미소를 보인다. 풍경소리 벗 삼아 푸른 잎 넘실거리는 숲의 무상을 천년 동안 지켜본 저 마애불입상을 보물(657호)로 지정(1979)한 주인공은 삼천사 회주 자안 성운(慈顔 聖雲) 스님이다.

북한산 의상봉이 품고 있는 삼천사에 성운 스님이 처음 걸음 한 건 1978년이다.

성운 스님은 한국불교의 복지계를 이끌어온 선구자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1995), 진각종 복지재단(1998), 천태종 복지재단(1999)보다 이른 1994년 사회복지법인 인덕원(1994)을 설립했다. 현재 인덕원은 법인직영기관 20개, 위탁 시설 16개를 운영하고 있다. 종사자가 800여명이고, 시설 이용자만도 연간 1000만명이다. 특히 2009년 재 개원한 노인전문요양원은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서울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복지 외에도 사회 전반에 걸쳐 왕성하게 활동해 온 성운 스님의 행적을 짧은 시간에 간추리기 어려워 1978년부터 2010년까지의 업적이 오롯이 담겨 있는 만해 대상(실천부문) 선정 이유서를 살펴보았다. 1978년 삼천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 폐사지와 다름없는 절을 30여년 동안 일궈 법당, 요사채 등 30여동을 건립해 연간 20만명이 참배하는 대 도량으로 중흥했다. 1978년부터 서울, 서대문구치소 종교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200회의 법회를 열며 교정교화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부었다. 불교복지학과에 불교사회복지론을 최초로 개설한 장본인도 성운 스님인데 석사만도 50여명을 배출했다. 조계종 포교대상, 대통령·국무총리 표창, 국민훈장 동백장 등 굵직한 표창만도 100개가 넘는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1978년부터 2010년까지 22년 동안 이룬 업적의 일부분이다.

불교학에도 일가견이 있던 성운 스님은 동국대 불교대학 석좌 교수(2016)에 임용됐다. 동국대 불교대학 110년 사상 최초로 탄생된 석좌다. 또한 한국불교학회 22대 회장(2016)으로도 선출됐는데 당시 4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불교학회가 스님을 회장으로 선출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성운 스님의 학술적 지성을 학계가 매우 높게 인정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복지, 포교, 학술을 관통하는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성운 스님은 폐사지와 다름없던 삼천사를 연간 20만명이 참배하는 대 도량으로 일궜다.

“금강경을 새기던 학인 시절, 저는 ‘제 혀로 100만명을 포교하겠다’고 부처님 앞에서 다짐했습니다!”
부산에서 출생(1951) 한 성운 스님은 10살 무렵 법주사로 동진출가(1960) 한 직후 행자걸망을 짊어진 채 용주사로 걸음 했다(1961). 관음, 운허, 탄허 스님 등 대 강백으로부터 4년 가까이 경전을 공부하고는 또 다시 지관 스님이 강주로 있는 해인사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해인사 강원에 입방하려면 허드렛일 하나라도 맡아야만 했다. “공양주 소임을 자처했습니다. 복 짓는 일 아닙니까.”

해인사 3기로 졸업(1968)한 스님은 산사에 남아 중강 소임을 보았는데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지관 스님이 불렀다.

“금강경을 새겨 보시게.”
“저는 잘 모릅니다.”

며칠 뒤 지관 스님이 다시 불러 마주했다.

“용주사에서 공부해 금강경에 밝은 줄 내 이미 알고 있네. 한 번 새겨 보시게.”

시퍼런 칼이 푸른 대나무 단박에 가르듯 순식간에 ‘금강경’을 해체시켰다.

“중강 소임을 보시게!”

지관 스님의 청에 강단에 섰으나 후학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함께 공부해 갈 뿐이었다. 그렇게 ‘금강경’이 익어가던 어느 날 문득 ‘100만명 포교’ 원력을 세운 것이다. ‘금강경’ 한 구절을 청하니 딱 한 마디 전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해인사 중강 소임은 대략 1년으로 끝났다. 성운 스님의 걸망은 서울 조계사 경비실에 걸렸다(1969).

“해인사 강원에는 영어 할 줄 아는 학인이 꽤 있었습니다. 저는 1형식의 영어 문장 하나 아는 게 없었습니다.”

학원비가 필요했다. 조계사 화장실에 딸린 창고에서 지내며 경비도 보고 화장실 청소도 도맡았다. 1년 만에 웬만한 영문 책은 볼 정도로 꿰뚫었다. 그 즈음 성운 스님의 손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은 책자가 있었다. 1970~1980년대 지성인의 필독서로 여겨졌던 미국 정통 시사 잡지 ‘TIME’이다. 타임은 대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는데 고급 영어를 배우면서 지구촌 화제의 뉴스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운 스님은 지금도 구독하고 있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역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Richard Feynman·양자물리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천문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물리학자) 등의 세계적 인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뇌 과학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한 것도 타임지입니다. 저에게 있어 타임은 세계문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포털(portal) 이었습니다.”

국제 정세, 지구촌 사회변화, 세계 석학들이 주목한 사회적 이슈 등을 훤히 들여다보며 한국불교의 지향점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복지에 눈을 뜬 것도 타임지 영향일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성운 스님이 주도해 학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불교와 4차 산업 혁명’ 주제 국제학술대회(2017)도 그냥 열린 게 아니었음을 여실히 알겠다.

삼천사지 마애불.(보물 657호).
삼천사지 마애불.(보물 657호).

1970년대 중반, 성운 스님은 제방선원으로 걸음했다. 지리산, 덕유산을 지나 오대산에 이르렀다. 상원사 적멸보궁서 사분정근(四分精勤) 기도에 들어갔다. 해우소 갈 때 입은 옷을 입고는 결코 법당에 들어서지 않았다. 부처님전에 올릴 쌀은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골랐다. 옛 스님들이 일러 준 택미(擇米)를 실천했음이다.

한 겨울에도 새벽 2시면 중대(中臺)에서 세수를 하고 보궁으로 난 산길에 들어섰다. 영하 40도의 칼바람을 막을 수 있는 건 푹 눌러 쓴 모자와 두 손에 낀 털장갑이 다였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성운 스님의 목탁소리가 적멸보궁의 공기를 흔들어 깨웠다. 200일 기도 회향 10여일 전쯤 꿈에서 암벽에 새겨진 부처님을 친견했다.

서울로 올라 온 성운 스님은 북한산 진관동 토굴(현 보덕사)에서 정진 중인 혜안 스님을 만났다. 포행 삼아 산에 오르자는 혜안 스님 따라 길을 나섰는데 허물어져 가는 전각 옆 마애불을 만났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마애불이다.

“아, 내가 머물 곳은 여기다!”

그 때가 1978년이다.

삼천사로 들어서는 길목의 마을은 종로 중심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사는 판자촌이었다. 비닐 하나 제대로 없어 비가 새도 손을 놓고 있던 동네에 급기야 상이군경과 결핵환자들도 밀려 들어왔다. 부처님전에 올려진 쌀이나 보리쌀, 절로 들어 온 라면이나 연탄 몇 장이라도 있다싶으면 직접 지고 사하촌으로 내려갔다. 사건도 비일비재로 발생했다. 물건 훔친 아이들이 경찰서로 잡혀갔다는 전언을 듣기라도 하면 나눠주던 라면봉지도 그 자리에 내려놓고 경찰서로 달려가 두 손 모아 사정했다. 돈 훔쳐 잡혀간 아이들과 눈 한 번 마주치려 불광소년원으로 달려갔고, 폭행을 저질러 감옥에 간 청년의 손 한 번 잡아주려 형무소를 두드렸다. 사하촌 사람들에게 성운 스님은 아버지이자 삼촌이었고,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은평구의 임야가 눈에 들어왔다. 논둑에서 땅을 향해 절을 올렸다. 땅 관리인에게 “혹, 주인이 땅을 팔려 하면 즉시 귀띔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관리인이 제게 그러더군요. 주인은 꽤나 큰 부자인데 땅을 내놓겠습니까!”

별다른 도리가 있을 리 없다. 눈이 무릎에까지 차오른 한 겨울에도 스님은 마애불 앞에 서서 일심으로 기도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자 관리인으로부터 기별이 왔다.

“성운 스님, 주인이 땅을 팔겠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지금의 인덕원이 들어섰다. 복지불사에 헌신한 성운 스님이었지만 2000년에 접어들며 점점 스스로 그 힘을 잃어갔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동굴 속을 홀로 걷는 듯했습니다.”

단순한 재정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독했던 것이다. 그때, 인도를 통일한 후 비참한 전쟁에 대한 통철한 참회로부터 무력에 의한 정복위주의 정책을 버리고 ‘다르마(법)에 의한 정복’정책을 폈던 아소카왕에 눈길이 꽂혔다. 나그네를 위해 망고나무를 심고, 사람과 동물을 위한 2종의 병원들을 세우고, 법대관(法大官)으로 하여금 죄수를 풀어주었던 아소카왕의 정책을 파헤쳐 아동, 노인, 장애인, 빈민구제, 의료사업, 사법복지, 지역복지로 분류하고는 그에 따른 심도 있는 논문 ‘아소카왕의 정토관’을 써 내려갔다. 집필을 마치고나니 마른 샘에서 가는 물줄기 일듯, 심연 깊은 곳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아소카 왕의 정책에서 무엇을 읽어냈던 것일까?

“아소카왕이 내건 통치법칙의 순수성을 대면한 순간 눈물이 흘렀습니다. 진실로 모든 중생의 복리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내가 어떠한 노력을 해도 그것은 중생에게 진 빚을 돌려주기 위해서다!”

1994년 설립된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성운 스님은 ‘한국불교학회 성운학술상’을 제정했다. 굳이 자신의 법명을 내세운 건 상(相)을 내기 위함이 아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의 다름 아니다. ‘성운 학술상’은 가피를 주제로 한 우수 연구논문에 주어진다. ‘가피’를 혹세무민의 수단쯤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만큼 한국불교학회장을 역임한 동국대 석좌교수가 굳이 선택한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종교의 핵심 축은 신심(신앙)과 교리입니다. 불교 특성상 수행은 불교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핵심 축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가피는 신심에 속합니다. 학술적 연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수행·교학에 대한 연구가 굳건한데 비해 신심(신앙) 연구는 너무도 빈약합니다.”

엄청난 불사를 이룬 성운 스님에게도 남아 있는 불사가 있을까?

“갈등에 쉽게 휩싸이는 현대인을 위한 쉼터를 짓고 싶습니다. 위빠사나, 사마타, 간화선, 염불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삼천사 도량에 꼭 마련하려 합니다. 이르면 5년 전후께 불사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신의 심신이 허락하는 마지막 날까지 평생 다져온 원력을 온전히 소진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부탁드렸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힘이 실려 있었다. 확신에 찬 신념이 배인 일언이라 해야할까? 뜻을 새겨 달라 청했다.

“노인 한 분이 리어카를 끌고 오르막을 오르고 있습니다. 단숨에 달려가 뒤에서 밀어드립니다. ‘고맙다’는 노인의 말에 미소 한 번 보이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갑니다. ‘머무른 바 없다(응무소주)’는 건 곧 비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비움이란 ‘조건 없음’입니다. 바로 거기서 생기는 마음(이생기심)이 청정심이요 자비심입니다. 분별·조건 없는 마음이 일면 무상의 실상을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실은 저도 이 사구게를 자유자재로 쓰기 시작한 건 한 10여년 정도 됐습니다.”

10여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 성운 스님이 쓴 연구논문 ‘아소카왕의 정토관’은 2005년 ‘인도철학 학술지’에 실렸다. “중생에게 진 빚을 돌려주기 위해서”라는 대목에서 아소카왕의 동체대비심을 읽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보리쌀 한 줌이라도 판자촌에 전하던 20여년 전의 일이 스쳐갔을 터다. 비움, 조건 없는 마음자리를 문자가 아닌 몸으로 확연히 깨달았던 건 아닐까? 스님은 그저 웃는다.

“저는 전생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성운 스님이 오늘 전한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50여년의 법납 속에 익어간 일언이다. 또한 복지, 포교, 학술을 관통할 수 있었던 원천이기도 하다. 한 여름의 풍경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온다. 처마 끝이 아닌 ‘성운 법체’에서 나오는 맑은 소리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성운 스님은

· 1951 부산출생. 동진출가
· 1961 용주사에서 관응, 운허, 탄허 문하서 수학
· 1968 해인사 강원 3기 졸업· 1978 삼천사 주지
· 2012 한국정토학회장(8대) 역임.
· 2016 한국불교학회장(22대) 역임.
· 2016 동국대 불교대학 석좌교수
· 현재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대표이사며 삼천사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

 

[1448호 / 2018년 7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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