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봉 스님 “불교 위한다면 스님들 사찰재정서 손 떼야”

기자명 법보
  • 기고
  • 입력 2018.07.16 13:41
  • 수정 2018.07.16 14:11
  • 호수 1449
  • 댓글 23

현봉 스님, 7월14일 본지에 기고
대중적 인기 끄는 스님은 있지만
사람들 존경 받는 수행자 드물어

승려 권위는 덕과 수행력서 비롯
시대 변화 이끄는 것이 ‘불교다움’
불교다움 잃으면 역사에서 퇴출

승려들 사찰 경제운영서 손 떼고
수행·복지·포교 등 전념할 것 제안
사찰은 부유해도 승려는 청빈해야

미얀마에서 수행 중인 현봉 스님이 7월14일 법보신문에 “스님, 손에서 돈을 놓으시지요!”라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현봉 스님은 기고문에서 “승려는 특권층도 아니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 승려의 권위는 불자와 일반인들이 그들의 덕과 수행력을 존경할 때만 생겨난다”며 “승려는 특권층도 아니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 승려의 권위는 불자와 일반인들이 그들의 덕과 수행력을 존경할 때만 생겨난다”고 지적했다.
현봉 스님은 1978년 속리산 법주사로 현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전국 각지의 선방에서 10여년 간 수행 후, 23년간 주지소임을 맡으며 포교에 전념했다. 또 서울 남대문경찰서, 영등포경찰서 등에서 10년 이상 경승실장 역임하고, 춘천교도소, 의정부교도소에서 교정위원으로도 15년 간 활동했다. 현재는 미얀마에서 수행 중에 있다. 편집자

현봉 스님
현봉 스님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빛이요, 법은 바름(正)이며, 승가는 청정이라고…”

나는 40여년 전에 발간된 ‘초발심자경문’을 한 권 갖고 있다. 가끔씩 꺼내 읽을 때면 흐리멍텅한 정신에 빛이 들어오듯 맑아지고, 출가의 첫 마음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요즘 같은 세상에 승복을 입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불교가 맞고 있는 위기와 위상추락은 대부분 승가의 계율에 대한 경시와 세속적 욕망의 탐닉에 기인한다. 그 결과 승가의 청정은 먼 과거의 일이 되었고, 한국사회는커녕 불자들로부터도 존경받지 못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르렀다.

작금의 불교계에는 존경받는 스님이 보이지 않는다. 대중적 인기를 끄는 스님들이 일부 있지만,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수행승을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부처님 제자로서 불법이 천년만년 뭇 생명의 귀의처가 될 수 있고, 존경받는 종교로서 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오랜 시간 고민해 왔다. 그 결과 내가 찾은 답은 이것이다.

“승려는 돈에서 완전하게 손을 떼라”

승려들이 재물을 멀리하여 청빈한 삶을 살며, 계율을 바로 세우고,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 본연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하여 고통 받는 중생들의 신음에 응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 것, 바로 이것이 ‘불교다움’이 아닐까. 만약 불교다움을 버린다면, 불교는 역사 속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관광지로 전락한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불탑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늘날 조계종의 현실을 보면, 관광지 혹은 박물관 종교로 전락할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나는 70년대 출가한 사람으로 그 동안 부처님과 종단, 불자님들의 시은이 과분하다고 생각하기에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천천히 내려갈 준비를 하는 중이다.

글을 쓰는데 정법중흥 이외의 어떤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말이다. 혹 작은 바람이라면 그저 늙어가는 몸을 의탁할 절 집안 작은 뒷방 정도랄까? 또 누군가를 비난할 의도로 쓰지도 않았다. 나부터 초발심을 회복하여 하심 해야 하는 불량승인데 누구를 비난하겠는가? 다만 작금의 종단과 불교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1. 종단의 비구승들은 사찰의 경제운영에서 완전하게 손을 떼고 수행과 복지, 포교 등에 전념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2. 공부하는 학승, 선승, 스님들의 노후복지와 주지의 포교활동에 충분한 지원을 할 시스템을 만들어야한다.

3. 사찰 운영은 기본적으로 신도대표, 포교사단이 주도하고 주지를 위원장으로 하는 스님들로 구성된 위원들은 회의참석과 감독권만을 갖는다.

4. 시범사찰을 정해 운영해보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사찰의 등급을 정해 차례로 범위를 확대한다.

5. 산속 작은 암자는 신도와 주지가 합의하면 예외로 하여 주지가 직접 운영한다.

내가 위 같은 주장을 말하면 주지를 하지 않는 승려들조차 심한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절이 승려들 소유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승려란 수행에 전념해야 하는 수행자이지 특권층이 아니다. 그럼에도 영향력 있는 불자와의 친분을 이용해 호가호위하는 승려들도 적지 않다.

승려는 특권층도 아니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 승려의 권위는 불자와 일반인들이 그들의 덕과 수행력을 존경할 때만 생겨난다. 또한 절은 승려들의 것이 아니다. 절은 신도들의 기부에 의존해 만들어진 것으로 승려들은 그 공간을 수행과 포교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수천 년 간 승려들의 피땀으로 불교가 유지되어왔고 사찰의 주인은 승려라고 열변을 토하는 승려들도 있겠지만 이런 인식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사고를 한국의 승려들이 가지고 있는 한 불교에 미래는 없다.

급격히 변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불교가 과거의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불교를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인도여행에서 박물관에 들렸고 이런 사실을 목격했다.

“신도들에게 사찰운영을 맡겨보니 돈 더 빼먹더라.”

나는 신도들에 의한 금전사고를 여러 번 목격하거나 들었다. 불교방송, 모사찰 신협, 복지관 운영 등에서…. 하지만 이것은 운영과 관리감독을 분리하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하게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래도 승려들에 의한 삼보정재의 누수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며, 승가의 위상은 훼손되지 않는다. 승가의 청정함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고, 승려가 청정하면 불법이 번성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사찰은 부유해도 되지만 승려는 청빈해야한다.

사찰이 부유해도 된다는 말에 거부감을 갖지 마시길. 포교와 복지는 결국 원력과 돈으로 하는 것이다. 대만의 자제공덕회를 가보시라. 삼보정재가 바르게만 쓰일 수 있다면 절이 부자이든 가난하든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더 다양하고 큰 규모의 복지와 포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찰의 삼보정재가 전법과 포교, 수행자들의 수행환경에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재정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지 못한 스님들이 즉흥적으로 예산을 집행하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실제 종단에서 소임을 맡아 일할 때 조계종사찰 감사를 다니다보면 대부분 사찰들에서 실재 사찰수입의 많게는 70%, 적게는 30%쯤 기재되는 것이 관행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감사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주지들의 장부기재는 허술하기 짝이 없어 삼보정재의 규모와 사용처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허술하게 관리되면서 새어나간 돈이 그 중에 일부는 불교계를 부패하게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다.

“시줏돈은 눈이 여러 개 달린 업이 실린 정재이다. 함부로 쓰면 절대 안 된다. 부처님 재세시부터 제대조사들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시줏돈의 무서움을 경책하셨다.”

승려들이 사찰을 운영하면서 돈을 만지다 보니, 여기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간혹 여성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불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과도한 사치에 빠져 사는 승려들도 생겨나기도 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님들의 도박 문제나 고급 별장이 부럽지 않은 토굴, 편당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보이차나 고급 승용차를 자랑하기도 한다.

그래서 종단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고 불교의 만년대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스님들이 손에서 돈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어떤 방법도 공염불이요, 미봉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출가수행자가 돈을 축적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고 비불교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비구들이여, 마치 중간에 쇠똥을 바르고 양쪽에 불이 붙다만 장작은 마을에서도 목재로 사용할 수 없고, 숲에서도 목재로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재가자로서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출가자의 목적도 성취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출가자는 재가자 흉내를 내지 말아야 하며, 재가자의 삶을 부러워하면 그는 더 이상 출가자가 아니다. 출가자는 오로지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사찰 재정에서 스님들이 완전하게 손을 떼는 것’이다. 부디 본 납자의 글이 작금의 참담한 불교계에 조금이나마 자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문 현봉 합장

[1449호 / 2018년 7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