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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사선(無事禪)과 서양의 선불교-상

기자명 장은화

비트세대 매료시키며 미국서 확산된 일본 선불교

20세기 중반 미국 청년 사로잡은
비트선 ‘짝퉁선’으로 비판 받아
수행 관심 없는 ‘무사선’으로 불려
실제 ‘무사’는 중국서 깨달음 표상

선서 자유·쾌락 발견한 비트세대
선사들의 특이한 설법에 매료돼
수행 아닌 유흥으로 황홀경 경험
신비적 체험 의존하는 형태 추구

전통적 가치에 도전했던 비트세대들 사이에서 선불교는 기독교와 전통가치의 대안으로서 그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사진은 참선하고 있는 비트세대들의 모습.
전통적 가치에 도전했던 비트세대들 사이에서 선불교는 기독교와 전통가치의 대안으로서 그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사진은 참선하고 있는 비트세대들의 모습.

19세기 말 미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던 일본의 선불교는 2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미국의 청년층을 매료시키면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2차 대전 후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청년층은 비트세대라고 불린다. 당시 미국은 전후 세계에서 전례 없는 정치적 주도권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앵글로-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적 주도권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낡은 문화질서 기반에 균열이 심화되면서 젊은 작가, 예술가, 음악가, 자유분방한 떠돌이들은 전통적인 미국문화를 강력히 거부하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의 문을 열었고 비트족 사이에서 불교는 서양에서 최초로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비트세대에게 유행했던 비트선은 일반적으로 정통적인 선이 아니라 허세와 허풍이 가득 찬 짝퉁선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즉, 비트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에는 관심이 없고 그 실체도 정체성도 없는 무사선(無事禪)이라는 것이다. 무사선이란 정통선에서 벗어난 선 수행자의 허세와 경박함을 지적하는 선 용어이다. 무사선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간화선의 창시자 대혜종고(1089~1163)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굉지정각(1091~1157)의 묵조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고요하게 앉아(묵조) 있을 뿐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다고 질타하면서 이러한 무사안일과 무위도식을 비판하여 무사선이란 말을 썼던 것이다.

무사선은 전통을 무시한 경박한 선의 대명사처럼 되었지만, 사실상 무사(無事)라는 말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보통 우리는 어떤 변화에 직면하게 될 때 무사하기를 기원하지만, 삶에서 변화란 필연적이고 또 예측 불가능한 경우가 있음을 성찰해본다면 우리의 삶은 단 한 순간도 무사하지 않다. 또한 인간은 변화에 저항하면서 무사를 희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苦)에 직면한다. 불교에서 내세우는 이러한 고통의 해결책은 열반이다. 열반이란 바꾸어 말한다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무사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무사는 중국 조사선에서 깨달음의 표상이었다. “본래 아무 일 없다”는 뜻을 가진 무사를 선불교에서는 우리 본성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은 부단히 생멸변화하기 때문에 한 순간도 무사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고요하고 생멸변화가 없으며 애초부터 아무 일 없이 무사하다. 그러한 절대적인 무사함을 찾아서 구현해 가는 것이 조사선 수행의 최고 목표였다. 중국 선불교에 정착된 무사의 개념은 자연에 따라 행하고 인위를 가하지 않으며 인간의 지식이나 욕심이 오히려 세상을 혼란시킨다고 여기고 자연 그대로를 최고의 경지로 본 ‘노자’의 무위(無爲) 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중국화한 선불교에서 무사의 의미는 초기불교의 열반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임제록’에는 무사라는 어휘가 20번 넘게 나온다. 무사가 귀인(貴人, 부처)이라는 말과 무사인(無事人)이라는 말도 눈에 띤다. 임제선사는 밖으로 구하는 마음을 쉬는 것이 바로 무사라고 말한다. 우리의 타고난 마음 자체가 본래 아무 일 없이 무사한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밖으로 구하는 마음을 내어 여러 가지 경계에 빠지게 되면 결코 무사한 본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임제선사의 무사는 마음이 고요한 본성에 머무는 평화로운 상태라면 수행자가 할 일이란 단지 일상적인 행위에서 무사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일 뿐, 달리 특별한 게 없다. 그래서 임제선사는 “불법이란 단지 평상무사(平常無事)”라고 했고, 또 이러한 무사를 성취한 사람을 무사인이라고 불렀다. 무사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본래성은 선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혜능의 무념(無念, 대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본성에 머무는 마음), 남전의 평상심(平常心, 시비분별과 조작이 없는 마음), 황벽의 무심(無心, 어지러이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견해를 그치는 것) 등도 외부 경계에 물들지 않은 본래무사의 본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인위적 수행의 불필요함을 주장하는 데서 무사선이라는 부정적인 용어가 출현하게 된 듯하다.

미국 선불교에 나타나는 무사선의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통적 가치에 최초로 조직적인 도전을 제기했던 비트세대들 사이에서 불교, 특히 선불교는, 기독교와 전통가치의 대안으로서 그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결과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에서는 선(禪)의 붐이 일어났고, 이제 선에 대한 이야기는 칵테일파티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당시의 선불교는 종종 오해되거나 왜곡되어 있었으며 실제 불교수행은 매우 드물었다. 많은 서양인들은 동양의 신비에 이끌렸지만, 불도의 성과를 맺기에 필요한 수년의 힘든 수행을 실천하려는 의지는 거의 없었다. 전통 선불교에서는 무사한 마음의 본성을 통찰하고 깨닫기 위해 치열한 수행이 필수적이었지만, 미국의 무사선, 특히 비트선은 선 체험이 결여된 개념적, 인식론적, 철학적 선이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아시아 특유의 선 문화도, 이를테면 전통선의 계율, 의례, 수행체계, 형이상학적 세계관 등도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비트세대의 작가들은 1950년대 초 컬럼비아대학에서 스즈키의 선불교 강연을 들으면서 선불교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으며, 비트세대가 선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선에서 자유, 자발성, 쾌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먼저, 선사들은 전통도덕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였으며, 이런 선사들의 특이한 설법과 기이한 언행은 비트족을 매료시켰다. 선은 곧 비트족이 전통사회의 순응주의에 맞서는 데 강력한 철학적 지원군이 되었다. 다음으로, 비트세대는 깨달은 선사들이 보여주는 자발성을 그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재즈보다도 훨씬 더 큰 동경의 대상으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비트족은 쾌락주의자로서 약물과 술의 애호가였으며, 선의 깨달음을 일종의 궁극적인 황홀경으로 여겼다. 그들은 불교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약과 음주를 통해서 이런 황홀경을 경험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비트세대는 선을 엄격한 불교 수행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그 이후의 히피, 반문화(counterculture) 지식인들도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신비적 체험에 의존하는 새로운 선의 영성을 추구해 나갔다. 특히 1950년대에 비트세대가 불교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많은 사례와 스즈키 및 앨런 와츠(1915~1973)에 의해 대중화된 선은 아시아의 선 수행 전통 및 역사와 유리된 채, 철학적 인식론적 성격이 강했으며, 그런 점이 미국의 방종한 선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치열한 수행이 결여된 채, 철학적 개념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는 무사선은 선 수행자의 자만과 허세를 내포하는 경향이 있다.

장은화 선학박사·전문번역가 ehj001@naver.com

[1448호 / 2018년 7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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