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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자현 스님

불교는 타문화권 정착한 유일 종교…역사·사상 맥락 함께 이해해야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된 이유는
인도문명 중국보다 앞섰기 때문
문명 꽃피던 서쪽 아랍문화권선
인도불교 전래 후에도 확산 못해

5호16국 혼란으로 사상 공백기
불도징 노력으로 중국에 불교 정착
구마라집 스님은 불교 체계 세워
중국불교사는 시대 상황과 밀접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이자 조계종 교육아사리, 봉은사 교육국장 등의 소임을 맡고 있는 자현 스님은 “중국 역사와 시대 배경 속에서 중국불교사에 대한 이해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이자 조계종 교육아사리, 봉은사 교육국장 등의 소임을 맡고 있는 자현 스님은 “중국 역사와 시대 배경 속에서 중국불교사에 대한 이해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이라는 영화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요. 달마가 서쪽, 유럽으로 갔다면 불교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요. 인도와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붙어있지만 히말라야가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서로 직접 왕래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실크로드를 따라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인도는 전통적으로 서쪽과 무역을 했습니다. 인더스문명 시기부터 메소포타미아문명과 무역을 했을 정도로 오랜 교류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도 인도는 동쪽보다 서쪽이 발전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왜 가까운 서쪽을 놔두고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왔을까요. 인도의 서쪽, 아라비아반도의 히랍문화는 인도문명과 비슷했습니다. 아쇼카왕이 아라비아반도로 전법사를 보냈지만 이미 앞선 문명을 갖고 있는 아라비아반도에서 불교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반대로 중국의 유교나 도교는 왜 인도로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당시 중국의 문명은 인도보다 뒤처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국의 문명이 매우 발달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중국의 문화가 세계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은 수·당 시기에 이르러서입니다. 특히 불교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올라가면서 중국의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인도나 로마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당 시기에 이르러서야 중국 문화는 전 세계 최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인도나 로마의 문화들이 오히려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불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보상화문, 당초문 같은 것들인데 이러한 풀 무늬는 아라베스크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전통문화라고 생각하는 ‘십이지’도 실제로는 아랍 쪽에서 들어온 문화입니다. 열두 동물 중에서 띠와 한자의 표기가 일치하는 것은 뱀밖에 없다. 쥐는 한문으로 서(鼠), 소는 우(牛), 호랑이는 호(虎)를 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자(子), 축(丑), 인(寅)으로 동물을 지칭하는 것은 일반적인 한문 표기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뒤진 문명이 앞선 문명권에 진입하지 못하는 형상을 문화권적장벽이라고 합니다.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는 첫 시발점은 1세기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잠시 외척에 의해 몰락한 후 다시 유수에 의해 세워진 후한의 명제 때입니다. 당시 명제가 꿈에 온몸이 금빛으로 빛나는 인물을 보고는 불교가 전해질 징조라 여깁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로부터 온 가섭마등과 축법란이라는 스님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낙양에 백마사를 창건한 것이 중국 최초의 사찰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전해지긴 했지만 아직 중국 본토에서 표면화되지는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불교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후한이 몰락하고 삼국시대와 진나라를 거쳐 위진남북조시대와 5호16국 시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정치적 혼란기는 사상적으로는 공백기였음을 의미합니다. 중국이 사상적으로 무주공산이었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 즉 불교가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슬람, 가톨릭 그리고 불교라는 전 세계의 3대 종교 가운데 새로운 문화권을 점령한 것은 불교뿐입니다. 인도문화권에 가톨릭이 들어가지 못했고 이슬람도 인도에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이나 가톨릭은 아메리카대륙이나 아프리카대륙, 오세아니아대륙처럼 전통적이거나 특별한 문화권이 형성돼 있지 못한 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기독교나 이슬람이 확산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불교만 인도에서 출발해 중국문화권을 장악한 특이한 종교입니다. 불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위진남북조시대의 도래입니다.

중국은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양자강 남쪽 강남, 중국의 전통적인 본토로 장안과 낙양 등이 위치하고 있는 양자강과 만리장성 사이의 황하강 유역, 그리고 북쪽으로는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유목민의 땅입니다. 이 가운데 중국의 본토라 할 수 있는 황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위나라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요했던 위나라와 진나라에는 중국인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북방의 유목민들이 노동자로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유목민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진나라가 붕괴된 후 선비, 흉노, 갈, 저, 강의 다섯 유목민이 황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16개의 나라를 만들며 5호16국시대가 시작됩니다. 무너진 진나라의 한족들은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나 동진을 세워 그 명맥을 잇습니다. 이후 양자강 남쪽에는 동진을 전후해 6개의 나라가 이어지면서 육조시대가 전개됩니다.

5호16국시대 중국으로 들어온 스님들은 이같이 혼란한 전쟁 상황에서 제갈량과 같은 책사 역할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불도징이라는 스님입니다. 이 스님은 후조국의 왕 석륵의 책사였습니다. 불도징은 책략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왕에서 사찰을 세우고 출가자를 배출하도록 건의했습니다. 그가 세운 사원이 무려 893개이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 출가한 스님이 1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 시절 중원의 지배층은 유목민들이었고 중원에 앞서 불교를 접했던 이들이 중국 본토로 진출하며 불교도 함께 중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시기 양자강 남쪽에는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을까요. 당시 강남지역에서는 ‘죽림칠현’으로 대표되는 형이상학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강남지역의 귀족들은 본토인 중원에서 북방의 오랑캐들에게 밀려나 강남으로 쫓겨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패전의 현실에서 시선을 돌려 진리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방어 논리의 일종으로 보다 높은 본질적인 이상 추구에 탐닉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본체론적 사고의 분위기가 불교와 만나 반야, 공, 불성 사상 등이 남쪽에서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이로써 불교가 일세에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이때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유명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강남에 등장했던 여섯 왕조 가운데 마지막 나라인 전진의 부견이 중원을 장악한 후 도안 스님을 왕사로 모시고 법을 청하는데 이때 도안 스님이 중앙아시아 구자국의 구마라집 스님을 추천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불교가 많이 전래됐지만 아직 체계가 세워지기 전이었습니다. 또한 구마라집과 같은 고승을 모신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기에 부견은 기꺼이 여광이라는 장군에게 군대를 주어 중앙아시아의 구자국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구마라집은 당시 중앙아시아에 있던 구자국왕의 누이의 아들이었습니다. 왕의 조카였던 구마라집은 어려서 출가해 인도로 유학하며 소승과 대승에 두루 정통한 학승이었습니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보내지 않겠다는 구자국을 손쉽게 점령하고 구마라집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 전진은 외침을 받아 망하고 맙니다. 돌아갈 고국이 사라지자 여광은 스스로 왕이 되어 양나라를 세웁니다. 이후 구마라집은 여광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어 핍박을 받지만 이시기의 경험이 후일 역경불사에 큰 밑거름이 됩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진을 계승하는 후진에 의해 양나라는 망하고 마침내 구마라집은 후진의 수도인 장안에 입성하게 됩니다.

구마라집은 이후 죽을 때까지 장안에 머물며 역경을 하고 계율을 정비하는 등 불교의 체계를 세웁니다. 이때 번역된 경전이 ‘금강경' ‘법화경' 등입니다. 구마라집은 왕족이었지만 그 스스로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당시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았고 민초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번역했다는 점이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구마라집의 역경과 체계정비로 중국의 불교는 안정기에 접어듭니다.

이처럼 불교는 중국불교의 여명을 열었던 불도징 스님과 안정기를 구축한 구마라집 스님에 의해 성공적으로 중국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대 속에서 이후 중국불교는 현장 스님과 화엄종, 천태종, 선종 등이 등장하는 종파불교시대로 접어듭니다. 중국불교의 역사는 매우 복잡한 것 같지만 당시의 시대상 및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간파한다면 중국불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연은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자현 스님이 7월18일 서울 봉은사 보우당에서 열린 ‘봉은사 불교교육 여름특강’에서 ‘중국불교, 얼마나 알고 있나’를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449호 / 2018년 7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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