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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폴론나루와 황금기 일군 파라크라마바후-상

분열된 왕국 통일하고 ‘바다’ 만들어 풍요 선사한 싱할라의 대왕

위자야바후 사후 왕실 분열
20대 남부 지배권 장악 후
10여년 만에 삼국통일 달성

‘바다’로 불린 저수지 만들고
관계수로 정비 농업생산량 급증
남아시아 불교의 중심지로 성장

11세기 이슬람의 인도침입 영향
스님·불교학자 스리랑카로 유입
대승불교 흥성하고 밀교도 성행
왕권에 의한 승단 정화의 빌미돼

파라크라마바후가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왕궁 유적. 현재 남아있는 것은 기단과 벽면 일부, 기둥뿐이지만 이 건물은 본래 7층 규모였으며 왕궁 전체에는 1000여개의 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단 한 방울의 빗물이라도 나의 백성에게 이익을 주지 못한 채 바다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자신만만한 파라크라마바후는 마치 빗물에게조차 명령을 내릴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파라크라마바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뒀다. 백성들은 그가 만든 저수지의 물을 이용해 연중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저수지는 ‘파라크라마 사무드라’ 즉 ‘파라크라마의 바다’라 불렸다. 그의 명령대로 빗물은 백성들에게 풍요를 안겨주었다. 파라크라마바후가 다스리던 12세기 폴론나루와는 남아시아를 대표하는 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파라크라마바후가 등극하기 불과 100여년 전 인도양 일대를 아우르던 대제국 촐라왕조를 물리치고 11세기 왕국의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기며 싱할라왕국 제2의 전성기를 연 위자야바후 역시 스리랑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걸출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스리랑카 역사에 단 두 명뿐인 ‘위대한 왕(Great King)’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는 그의 손자 파라크라마바후에게 돌아갔다.

위자야바후 사후 스리랑카는 그의 형제와 아들, 딸들에 의해 다시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며 혼란에 빠졌다. 위자야바후의 조카로 남부 다키나데사 지방의 패권을 장악했던 마나브하나라는 자신의 아들에게 ‘적을 무찌르는 팔’이라 뜻의 ‘파라크라마바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이름은 당시 싱할라왕국이 얼마나 큰 분열과 혼란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같은 혼란기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파라크라마바후의 유년기는 각 지방의 패권을 둘러싼 삼촌들과 사촌들 간의 분열과 대립, 동맹과 배신의 반복이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파라크라마바후는 절묘한 처세술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마나브하나라를 대신해 다키나데사를 지배하던 삼촌 키티 스리메가가 세상을 뜨자 파라크라마바후는 20대 중반 왕좌에 오르며 싱할라왕국 통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다키나데사의 왕으로 등극한지 불과 10여년 만에 셋으로 분열돼 있던 스리랑카를 통일하고 폴론나루와에 입성, 통일왕국의 수도로 변모시켜 나갔다. 폴론나루와에 남아있는 유적의 상당수가 파라크라마바후 시대에 이르러 건설된 이유다.
 

왕의 접견실에는 대신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기둥이 도열돼 있다. 대신들의 위치를 정해놓은 것으로 우리나라 경복궁의 품계석과 유사하다.

파라크라마바후는 통일 싱할라왕국의 국왕이라는 자신의 지배력을 드러내기 위해 기념비적인 건물들을 세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폴론나루와에 남아있는 왕궁유적지 또한 그의 산물이다. 파라크라마바후의 왕궁으로 불리는 궁전은 벽과 돌기둥 일부만이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로 31m, 세로 13m에 벽의 두께가 무려 3m에 달하는 이 왕궁의 흔적은 당시 파라크라마바후의 왕궁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했는가를 대변하고 있다. 이 궁전 건물은 30m 높이의 7층 규모로 지어졌으며 36개의 기둥이 중앙의 홀을 지탱하고 있었다. 3층까지는 돌로, 나머지 4개 층과 지붕은 나무로 지어졌으며 왕궁 전체에는 무려 1000여개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13세기 초 스리랑카를 침입했던 남인도 판디아왕국에 의해 소실돼 사라졌다. 현재도 일부 벽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다.

궁전 맞은편 왕의 접견실과 왕실 가족들의 목욕탕이었던 쿠마라포쿠나 등도 파라크라마바후 시대 강력한 왕실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이다. 접견실에는 우리나라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볼 수 있는 품계석과 같이 이름이 적혀있는 기둥이 줄지어 서 있다. 왕을 중심으로 왕자, 장군, 수상, 대신 등 각각의 지휘와 역할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어 당시 행정조직의 형태에 대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런가하면 왕실의 목욕탕 쿠마라포쿠나는 인근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오고 사용한 물을 내보내는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돼 있어 당시 물을 다루는 관계기술의 놀라운 수준을 보여준다. 목욕탕은 아름답게 조각된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어 눈길을 끌지만 지금도 비가 오는 우기철이 되면 탕 안에 모인 빗물이 새어나가지 않고 그대로 담겨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건축됐다. 지금이라도 물을 채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바로 옆에는 탈의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남아있다.
 

왕실의 목욕탕이라 불리는 쿠마라포쿠나 역시 파라크라마바후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아름다운 조각과 정교한 상하수도시설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적은 단연코 저수지 파라크라마 사무드라다. 이 저수는 두 개의 자연호수를 연결해 확장하고 댐을 설치해 만든 인공저수지다. 저수지의 폭은 최대 14km에 달하고 165개의 댐이 설치돼 있다. 댐의 높이도 12m를 넘나든다. 파라크라마 사무드라의 평균 수심은 7.6m로 호수의 면적은 22㎢에 달한다. 이 저수지는 3000여개의 수로를 이용해 73㎢(약 2200만평)에 달하는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규모다. 이 같은 대규모의 저수지가 확보되자 폴론나루와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연중 농사가 가능해지며 도시는 풍요로워졌다.

풍요로운 도시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당시 인도는 이슬람의 침입으로 격동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불교교육기관이었던 나란다불교대학과 인도밀교의 중심지였던 비크라마쉴라 대사원까지 폐허로 변하며 수많은 학승과 불교학자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지는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혼란의 시기 상당수 불교학자들과 스님들이 이곳 싱할라왕국의 폴론나로와로 모여들었다. 싱할라왕국은 이미 기원전 1세기 왓타가마니 아브하야왕 시대 승가의 분열이 일어난 후 아브하야기리[무외산사]파를 중심으로 인도 불교의 다양한 부파와 교류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전통이 이어지던 싱할라왕국의 풍요로운 수도 폴론나루와에는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인도밀교까지 전파되며 뜻하지 않은 불교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폴론나루와의 사원구역인 쿼드랭글 안에 조성돼 있는 보살상. 당시 싱할라왕국에 수준 높은 대승불교가 흥성했음을 대변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역사서 ‘출라왐사(Culavamsa. 小史)’는 당시 폴론나루와의 승가에 대해 계율이 문란해지면서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고 전한다. 일부 비구는 결혼을 하거나 심지어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도 적지 않았다는 것. 또 출가한 이후에도 속가의 가족을 돌보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등 ‘출가한 수행자라 해도 그 행동은 우바새와 다를 바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라크라마바후는 이러한 승가에 대개혁을 단행했다. 왓타가마니 아브하야왕 시대의 분열 이후 셋으로 나뉘어져 있던 승단을 통합해 기원전 2세기 둣타가마니왕 시대와 같은 하나의 승단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살펴보자면 파라크라마바후의 승단 통합, 아니 왕권에 의한 승단정화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계율을 지키지 못했다고 판단된 출가자들은 환속시켰고 승단은 상좌부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된 마하위하라파, 즉 대사파로 통합됐다. 이후 스리랑카는 현재까지도 마하위하라파의 전통을 계승하며 남방 상좌부불교계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드높이고 있다.

파라크라마바후가 조성한 저수지 덕분에 건조지대에 속하던 폴론나루와는 연중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풍요의 땅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단편적인 역사의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과연 12세기 폴론나루와의 불교는 출라왐사의 기록대로 문란한 계율정신과 부패가 만연해 있던, 불가피한 정화의 대상이었을까.

출라왐사는 13~19세기에 걸쳐 집필된 스리랑카 역사서다. 특히 4~12세기 말까지의 역사를 다룬 부분은 13세기 담마키티 스님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부분은 특정 작가가 아닌 여러 사람들에 의해 써졌다. 담마키티 스님이 출라왐사를 집필한 13세기, 그리고 이후 스리랑카의 역사는 왕실의 분열과 외세의 침략, 서구 열강의 확장으로 왕국이 쇠퇴하고 수백 년에 걸쳐 식민지배가 이어지던 암흑기였다. 이러한 시대, 민족의 부흥과 국가의 전성기를 일군 ‘대왕’에 대한 기록은 찬탄과 자부심으로 장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업적 또한 전 시대의 과오를 바로잡고 새로운 시대를 연 구국의 결단이며 위대한 진보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12세기 파라크라마바후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에는 지금도 끊임없이 물이 흐른다. 이 물은 여전히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출라왐사의 기록이 믿을만하지 못하거나 지나친 민족주의로 각색돼 평가절하 돼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12세기 폴론나루와에 흥성했던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밀교를 한 걸음 돌려 본다면 다양한 불교의 확산과 선의의 경쟁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폴론나루와 시대를 연 위자야바후의 불치사 아타다게 앞에 조성돼 있는 보살상은 당시 폴론나루와에 꽃피웠던 대승불교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쿼드랭글로 불리는 사원구역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이 보살상은 아름다운 장식과 균형감을 갖추고 있어 싱할라왕국의 대승불교가 이 사회에서 널리 수용됐던, 수준 높은 불교의 주류였음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파라크라마바후의 승단 통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한 이 결단은 폴론나루와 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유산을 후대인들에게 남겨주었다. 그것이 역사가 지닌 무자비한 아름다움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49호 / 2018년 7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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