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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삼장법사 현장

기자명 김정빈

그의 삶은 일심 연단된 한 덩어리 강철이었다

현장, 삼장법사 중 맨먼저 떠올라
해외 여행 엄격했던 그 시절에도
왕은 현장 위해 소개장 쓰고 후원
그에게 몸은 치열한 구도위한 방편

그림=근호
그림=근호

‘삼장법사’는 경율론 삼장에 통달한 불교 학자를 이르는 말이다. 중국 불교사에는 여러 삼장법사가 있었고, 남방불교권에는 국가 차원에서 엄격한 시험을 거쳐 삼장법사를 공인하고 있다.

삼장법사 칭호를 받은 고승은 한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지만 동북아 불교인에게 삼장법사라는 존칭과 함께 맨 먼저 떠오르는 이는 현장(玄奘:602~664년)이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현장법사는 불법의 진수를 만나기 위해 중국 낙양에서 출발하여 인도로 갔고, 수많은 경전을 수집하여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그 경전들을 번역하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

현장삼장의 속성은 진(陳)이요, 휘는 위(緯)이다. 13세에 출가하여 형과 함께 낙양의 정토사에서 면학하다가 장안으로 옮겼으며, 곧 한중으로 갔다. 만 20세가 되던 해에 성도에서 수계하여 비구승이 되었다. 학구열이 치열했던 현장은 배를 타고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며 형주, 상주, 조주를 역유하였고, 다시 장안으로 돌아가 선광사의 법상, 흥복사의 승변 등 대덕에게 사사했다.

총명이 뛰어났던 그는 배우는 것마다 곧바로 통달하였다. 아비담마는 물론 섭론, 성실, 구사 등 모든 불교철학를 배워 마쳤는데, 문제는 배우면 배울수록 의문이 커져만 간다는 데 있었다. 당대의 불교 대덕들은 같은 경론이라 할지라도 제각기 해석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현장은 경전이 가르치는 바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도에 가서 모든 불교 경전을 직접 배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몇 사람의 동지를 모아 인도에 가고 싶다는 뜻을 조정에 상주했지만 국가는 그의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는 당(唐) 왕조가 선 지 얼마 안 되는 때여서 정치적인 분위기가 불안정했고, 그 때문에 조정은 다른 나라로 가려는 여행자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 629년, 당태종 9년째인 그해에 법사는 서역 여행을 감행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국가의 금지법을 깨뜨릴 만큼 그의 구도심은 뜨거웠던 것이다. 태주, 양주를 거쳐 과주로 갔다. 과주에는 국경을 경비하는 다섯 초소가 있었는데, 제4봉에서 제5봉까지는 거리가 팔백 리나 되었다. 먹을 것과 물이 없는 상태에서 4박5일을 걸었다. 빈사 직전에 이른 법사는 보살의 가피를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현장은 이오국에서 고창국왕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왕은 현장을 위해 서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24개국의 왕들에게 제시할 소개장을 써주었고, 더하여 여행에 필요한 제반물자와 함께 통역자와 소년 승려까지 제공해주었다.

현장 일행은 천산남로의 서쪽으로 나아가 쿠차나라에서 눈이 녹기를 기다린 후 페달령을 넘었다. 험준한 고개를 넘는 동안 동행자 십여 명이 죽기는 했지만 그는 마침내 서돌궐의 왕 섭호가한을 만날 수 있었다. 섭호가한은 북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왕으로서 휘하에 여러 군왕을 거느리고 있었다. 섭호가한은 법사를 환대한 다음 서파키스탄으로 가도록 주선해주었다.

이후 현장은 타라스, 타슈켄트, 사마르칸드를 잇는 서부 파키스탄과 천산북로를 잇는 공로를 따라 전진했다. 법사의 여정은 불적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간다라, 우자나, 탁사시라, 카슈미라 등 여러 나라를 거쳤으며, 필요할 경우 한 지역에 여러 해를 머물러 불전을 배웠다. 여행 중에 도적의 습격을 받는 등 생명이 위태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법사의 여정은 계속 이어졌다. 부처님의 출생지인 카필라바스투와 초전법륜지 녹야원을 방문하였는데, 거의 모든 불적지가 황폐화되어 있는 것을 보고 법사는 눈물지었다. 오랜 여행 끝에 마가다국에 도착한 법사는 나란다 사원에서 계현이라는 105세의 고승을 만나게 된다. 계현에게서 5년간 배운 후, 법사의 순례여정은 인도의 동, 남, 서부로 이어졌다.

인도 내에서 법사의 명성이 한껏 높아져 있었다. 여러 왕들이 법사를 모시고자 하였는데, 법사는 카냐굽자의 계일왕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계일왕은 18개국의 왕, 대소승의 승려 3천여 명, 바라문교 및 자이나교 학자 2천여 명이 운집한 대규모의 법회를 열어 그들로 하여금 18일에 걸친 법사의 장대한 설법을 듣도록 했다.

마침내 법사는 중국으로의 환국을 결정하게 된다. 법사는 태종에게 표를 올려 귀국을 윤허해주기를 청했고, 그를 존경하던 태종은 흔쾌히 허락했다. 서기 645년 1월5일 장안으로 가는 운하에 한 척의 배가 떠 있었다. 많은 불교 전적과 보물을 실은 그 배 안에 중국을 떠난 후 110개국 5만 리에 이르는 대장정을 끝내고 18년 만에 귀국하는 위대한 구법승 현장삼장이 타고 있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법사를 위해 태종은 자은사를 창건하여 제공하였고, 거기에 머물면서 법사는 가지고 돌아온 경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가 번역한 경전은 74부 1335권에 이른다. 중국의 역경가로서 쿠마라집, 진제, 현장, 불공 등 네 사람이 손꼽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의 번역 양을 모두 합친다고 해도 현장법사보다 오히려 적다.

664년 2월5일 깊은 밤, 법사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나는 반드시 미륵부처님 옆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한 다음 향년 63세의 삶을 마감하였다. 3월15일 백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며 법사의 몸은 장안 동쪽 교외 백록원에 묻혔다. 묘 앞에서 밤을 보낸 사람만도 3만이 넘었다고 전한다.

오늘날의 모험가에게 현대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중국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다녀오라고 한다면 고개를 가로젓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하 수십 도에 이른 맹추위, 물 한 방울 없는 사막 지대, 독초로 가득한 늪, 도둑과 강도가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 지대. 거기에다 풍습과 법률이 다른 수많은 나라를 거쳐야만 하는데, 누가 이런 모험을 감행하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구법승 현장에게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해도 좋을 만큼의 열정이 있었다. 그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일심으로 연단된 한 덩어리의 강철이었다. 우리는 법구 한 구절을 듣기 위해 나찰에게 자신의 몸을 주려 했던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알고 있다. 현장삼장은 역사 속에 구현된 바로 그 보살이었다. 그의 치열한 정신 앞에서 몸은 법을 구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묻는다. 이 시대, 과연 현장삼장 같은 불제자가 한 사람인들 있을까를. 현장삼장의 치열한 구도심에 비할 때 과연 나는 어떠한가를.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50호 / 2018년 8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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