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학회, ‘만해와 백성욱’ 학술세미나 -백성욱의 삶과 한용운
만해학회, ‘만해와 백성욱’ 학술세미나 -백성욱의 삶과 한용운
  • 김광식 교수
  • 승인 2018.07.30 15:26
  • 호수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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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욱, 만해 스님 당부에 중앙학림 학인과 3·1운동 나서

만해 스님, 중앙학림서 특강하며
백성욱 등 학인들과 친분 맺어
3·1운동 앞두고 ‘만세운동’ 권유
백성욱, 독립운동 나서게 된 배경

일경에 쫓긴 백성욱, 유럽 유학
독일 뷔르츠부르크서 박사학위
1920년대 불교청년활동 매진
금강산서 10여년간 수행 전념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만해(왼쪽) 스님. 백성욱(오른쪽) 박사가 3·1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만해 스님 영향이었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만해(왼쪽) 스님. 백성욱(오른쪽) 박사가 3·1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만해 스님 영향이었다.

만해 한용운(1864~1944)은 근대불교에서 다양한 행보를 걸어간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문학, 독립운동, 불교개혁 등 다방면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명성은 일제하의 불교 그 당시에도 상당하였다. 1932년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에 대한 선거를 하였는데 만해가 469명에서 422표로 1등을 하였음은 그를 예증한다. 그밖에도 만해가 근대불교를 대표한다는 당시의 기록은 적지 않다.

백성욱(1897~1981)은 만해의 영향을 받아 3·1운동 참가,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 군자금 모집, 의용승군제 추진, 불교의 자주화(종헌 제정 등) 등의 민족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백성욱은 서울 연화방(창경궁 남동지역)에서 백윤기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유년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고모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유년시절 서숙(書塾)에서 수학을 하였고 보통학교인 호동학교를 다녔다. 14세 때인 1910년 7월 봉국사로 출가하였다. 은사는 최하옹이었다. 그는 전국 각 사찰에서 경전 수학을 하였다고 전하나, 어느 사찰인지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중앙학림 입학 직전에는 불국사에서 ‘산(山)생활’을 하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1917년, 20세에 중앙학림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만해는 범어사포교당(서울, 인사동)에 머물면서 청년 승려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1918년에는 계몽지인 ‘유심’을 발간하여 청년승려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만해는 때로는 중앙학림을 방문하고, 특강을 하면서 학승들과 친연적인 연고를 맺었다. 이런 인연으로 3·1운동 당시에는 중앙학림의 학인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와 자극을 주었다.

백성욱은 3·1운동에 참가를 하였는데 이는 평소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3·1운동 직후에는 국내에서 활동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국내와의 통신 역할을 맡아 8~9회나 왕래를 하였다.

그는 이런 독립운동이 그의 이상이었다고 당당히 밝혔던 것이다. 그런데 3·1운동 하루 전날 밤 만해는 평소 그를 따르던 백성욱을 비롯한 중앙학림의 학인들을 자신의 거처인 유심사로 불러서 3·1운동의 개요, 진행, 당부 등을 통보하였다. 3·1운동의 적극 동참을 학인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이런 당부를 수용한 학인들은 유심사를 나와서 범어사 포교당에서 만세운동 참여, 추진 방법, 이후의 행보 등에 대해서 상세한 방략을 수립하고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백성욱은 중앙학림의 청년 9명과 함께 3·1운동의 준비, 추진 등에 대한 제반 개요를 청취하였다. 만해의 당부를 들은 백성욱은 동지들과 함께 인근 인사동 포교당으로 옮겨 밤이 이슥하도록 운동 추진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인수한 독립선언서 3천매를 중앙학림 기숙사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의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백성욱은 1919년 4월 하순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을 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그는 만해의 영향을 받아 3·1운동, 상해 임정에서의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이종욱, 신상완과 함께 불교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만해가 그에게 당부하였던 서산·사명의 후예로서 독립완성에 분투하라는 당부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하였던 신상완과 이종욱은 일제에 피체되어 수감되었다. 그는 피체되지 않았지만, 이는 그의 또 다른 도전을 잉태케 하였다.

백성욱은 1920년 1월15일 상해를 떠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추측하건대 그와 단짝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였던 신상완이 국내에서 체포되어 5년형을 언도받은 것이 강한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유럽으로의 유학을 계획하자, 당시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된 이승만은 유럽의 유학 사정이 어려우니 단념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어렵기 때문에 더욱 단념할 수 없다는 각오였다. 그의 유학은 일제의 체포를 피하기 위한 방책도 개입되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그는 서양유학을 떠난 것이라 하겠다.

백성욱은 프랑스 파리의 북부에 있는 보베고등학교를 다녔다. 1922년 독일 남부에 있는 뷔르츠부르크대학의 철학과서 입학하여 1924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1924년 5월 이 대학에서 불교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논의인 ‘불교의 순정철학’이라는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백성욱의 1920년대 후반 활동의 대표성은 불교청년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불교청년운동에 헌신하였고, 그 운동으로 인하여 만해 한용운과 예전의 인연을 재개하였을 것이다.

불교청년운동은 1920년 조선불교청년회, 조선불교유신회의 창립으로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청년회는 식민지 불교체제의 극복, 불교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주지층, 총독부 당국 등과의 대립 유발, 재정 기반의 나약 등으로 인하여 1924년 무렵에는 간판만 달려 있는 상태로 전락되었다. 그러다가 1928년 초에 이르러서 재기하였다. 바로 이때 백성욱이 그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재기한 청년회는 청년회 활동의 정상화를 기하면서, 교단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1928년 9월부터 조선불교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 위한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대회는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친선을 표방하였지만, 식민지 불교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청년들은 그 대회보다 먼저 한국 측의 대회를 개최하고, 그를 계기로 그간 한국불교의 모순으로 인식된 통일기관의 부재를 타결하려고 하였다. 이런 구도 속에서 나온 것이 1929년 1월 3~5일,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였다.

승려대회는 1928년 11~12월의 짧은 준비기간에 강행되었다. 대회는 성공리에 열렸다.

전 사찰의 대표 107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대회에서는 한국불교 운영의 틀인 종헌이 제정되고, 종헌에 근거하여 종회와 교무원이 출범하고,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7인의 고승이 교정으로 추대되었다. 요컨대 자주적인 교단, 종헌체제가 출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체제는 자주적 확립, 불교계의 통일운동의 기초를 정립한 역사적인 대회로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던 승려대회를 발기한 주역이 백성욱이었다는 것이다.
백성욱은 1929년 승려대회에서 불교의 자주적인 종헌체제 수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대회의 준비부터 시작해서 대회에서 주목할 성과물을 도출하기까지 다양한 노력을 하였다. 그 당시 만해도 불교계 통일운동의 추진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기에, 종헌을 불교계의 헌법이라고 하면서 높히 평가하였다.

백성욱은 1929년 가을 무렵에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을 찾아 100일 기도를 단행하였다. 그가 백일기도를 단행한 것은 그간의 세진, 풍파, 망념에 찌든 10여년간의 생활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었다. 이후 백성욱은 금강산에 들어가서 1938년 서울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불교계와의 연락, 사업 등을 일체 단절하고 오직 수행에 전념하였다. 요컨대 금강산에 가서 10년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안양암에서 단신 수도를 하던 백성욱은 함께 수도를 원하는 대중들의 요청으로 1931년경에는 지장암으로 거처를 옮겨 수행을 하였다. 백성욱은 지장암에서 대중을 지도하면서 7년간의 수행을 하였다.

그가 지장암에 있을 때인 1937년 11월 중앙불전 재학생이었던 정종, 정근모 등은 박한영의 소개장을 들고 백성욱을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욱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그 당시 수행 대중으로는 김기룡 외 30여명이 있었다. 30여명의 대중은 대부분 출가한 승려이었다.

수행대중은 백성욱의 독특한 가르침에 의거하여 집단 수행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주로 ‘화엄경’에 의지하면서 실천궁행적인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대중들은 조석예불, 새벽에 3시간의 깨치는(覺) 공부를 기본으로 하면서 농사작업, 나무하기, 의복(한복) 마련, 입산 50일이 넘은 대중은 일종식 단행, 100일기도, 2~3시간 취침, 성찰하는 공부, 평등공양, 탐진치 제거 등을 하였다.
한편 백성욱은 금강산 안양암에서 득도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용주사 주지인 강대련이 수도인으로 존경하였던 백성욱에게 옷을 지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그의 치열한 수행은 당시 승가에도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였던 백성욱이 금강산에 들어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백성욱의 거처로 몰려들자 일제는 긴장 하였다. 1938년, 그는 일제의 외압으로 금강산의 집단적인 수도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의령 경찰서에 구속된 이후, 금강산으로 돌아오고 나서 회중 해산을 통고하고 서울로 복귀하였다.

이때부터 8·15해방까지 돈암동에 은둔, 칩거하면서 생활하였다. 이곳에서도 그는 수행을 하였는데, 소수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김광식동국대 특임교수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

그러나 일제 말기에 심우장에 있으면서 일제와 정신적인 항쟁을 하다가 1944년에 입적한 만해와 백성욱의 1930년대 인연은 전하는 것이 없어 알 수 없다.

백성욱에 대한 일제 말기의 기록으로 2건이 있다. 우선 1941년 1월 그의 은사인 최하응(흥천사)이 입적하자, 자신에게 분배된 재산의 일부를 봉은사 복구비용으로 헌납하였다. 그리고 1941년 8월, 봉은사에서 재가자들과 함께 만일염불회의 신앙결사에 관여하였다는 비석이 있다.

그가 만일회의 대공덕주라는 기념비가 봉은사에 서 있는 것에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직전까지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450호 / 2018년 8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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