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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심사정의 ‘산승보납도(山僧補衲圖)’

기자명 김영욱

선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한 부분

가사는 가사일 뿐 특별함 없어
중요한건 가사 깁는 선승 마음
꿰뚫는 순간 엿보인 선의 세계

심사정 作 ‘산승보납도’, 18세기, 비단에 먹과 엷은 채색, 36.5×27.1㎝, 부산시립박물관.
심사정 作 ‘산승보납도’, 18세기, 비단에 먹과 엷은 채색, 36.5×27.1㎝, 부산시립박물관.

坐石看雲閑意思(좌석간운한의사)
朝陽補衲靜工夫(조양보납정공부)
有人問我西來意(유인문아서래의)
盡把家私說向渠(진파가사설향거)

‘암석에 앉아 구름 바라보며 한가로이 생각하고 아침볕에 가사를 기우며 면밀히 공부하네. 어떤 이가 나에게 서쪽에서 온 뜻을 물어보면 내 가진 것 모두 쥐여 주고 큰 스승에게 가라고 알려주리라.’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의 ‘산에서 지내다(山居)’ 중.

고적한 산속이다. 굽디 굽은 소나무 둥치에 앉은 스님이 청량한 솔 그늘과 맑은 개울 소리를 벗 삼아 가사(袈裟)를 깁는다. 높게 든 오른손을 보니 이미 실 맨 바늘이 가사의 한 부분을 뚫고 지나갔나 보다. 마침 원숭이 한 마리가 왼쪽 발가락에 실을 매고 잡아당기며 장난을 친다. 스님의 시선은 무심한 듯 원숭이로 향한다. 어느 호젓한 산속, 이름 모를 스님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조선 후기 예림(藝林)의 총수인 강세황은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이 작품이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수록된 강은(姜隱)의 그림을 모사했다는 감상평을 화면 상단에 남겼다. 1603년에 제작된 ‘고씨화보’는 중국의 역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수록한 목판화이다. 17세기에 조선에 전해진 이래 많은 화가가 이 화보를 보며 중국 회화를 학습했는데, 심사정 또한 그러했다.

강은이 가사를 깁는 스님과 원숭이만을 클로즈업하여 표현했다면, 심사정은 스님과 원숭이를 중심으로 산수 배경을 화면 가득 확대했다. 그 덕에 스님의 주변은 고적한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그에 따라 심사정은 붓끝을 촘촘히 놀려 호젓한 느낌의 풀숲을 만들어냈다. 심사정 특유의 남종문인화풍으로 새롭게 그려진 ‘산승보납도’인 것이다.

가사를 깁는 ‘보납(補衲)’은 선승의 일상생활을 다룬 평범한 소재이자, 선(禪)을 깨닫는 계기를 담은 선기도의 한 주제다. 보납은 선에 이르는 방법이 특별한 수행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달을 바라보고 진리를 구한다는 ‘대월(對月)’과 함께 약 12세기 이래로 널리 알려졌다.

불인대사(佛印大師, 1032~1098)가 황제로부터 마납(磨衲; 가사)을 받게 되었다. 이를 본 어떤 나그네가 “그 가사를 빌려준다면 온 천하가 나의 바늘구멍과 실 솔기의 가운데에 있을 것이네” 했다. 이에 불인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가사의 바늘구멍 하나하나에 무량세계(無量世界)가 있으니, 어찌 온 천하를 따질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 마납은 특별한 가사가 아니다. 여느 누추한 가사와 다를 바 없는 그저 하나의 가사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땀한땀 바느질로 생긴 바늘구멍을 통해 들여다본 선승의 마음이다. 도는, 선은, 그리고 진리는 일상의 곳곳에 있다. 다만 그것이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할 뿐이다.

고적한 산속에서 실을 자르고, 실을 바늘구멍에 끼우고, 바늘로 가사를 뚫고, 가사를 꿰매는 그 순간순간마다 스님은 자신의 마음에서 구현된 선의 세계를 엿본 것이다. 그가 손에 움켜쥔 가사는 불가의 진리를 담은 무량세계 그 자체이다. 어느 호젓한 산속, 가사를 깁는 이름 모를 스님의 하루가 또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50호 / 2018년 8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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