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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굴산사지(崛山寺址)

기자명 임석규

아름다운 승탑(보물 제127호)이 유명…내부 유물은 일제강점기에 도난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위치
엄청난 크기 당간지주 압권

높이만 5.4m의 당간지주는
국내 최대 규모로 평가받아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창건
구산선문 사굴산파의 본산

삼국유사 847년 창건 전해
왕실도 추앙하던 중요사찰

조선중기부터 폐사지 기록
팔각4층 승탑이 사격 대변

1999년 학술조사 후 복원
태풍에 사역 상당수 유실

굴산사지 당간지주.

처음 석굴암에 들어가 본존불 앞에 섰을 때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거대한 부처님 앞에서 한없이 작고 힘없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초라함이었다. 미소가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날렵하면서도 당당한 신체는 충분히 주눅 들게 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이 신비한 종교성과 절대자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압도한 것은 전체 높이 5m에 달하는 크기였던 것 같다. 1300여 년 제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부처님 앞에서 압도당한 것이다. 월등하게 뛰어난 힘이나 능력 또는 크기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론 공경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종교적 경외감이라고 할까?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윗골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어단천을 따라가다 보면 동편으로 엄청난 크기의 돌기둥이 마치 하늘이라도 이고 있는 듯 우뚝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보물 제86호 굴산사지 당간지주이다. 당간은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는 장엄용 불구인 당(幢:깃발)을 달아주는 장대이다. 사찰의 입구에 세우며, 주로 나무·돌·구리·쇠 등으로 만든다. 그리고 당간을 지탱하는 지주(支柱)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고려도경’ 에는 “개성 흥국사에는 10여장, 즉 30m나 되는 동주당간이 법당 뒤 마당에 세워져 있었는데, 당간 표면에는 황금칠을 하고 당간 정상에는 봉황의 머리 장식을 하였으며 그곳에 비단기인 당을 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통 당간의 아랫부분에는 육중한 당간을 받치기 위하여 연화문을 조각한 받침돌을 놓거나 기단형식의 대(臺)로 받치고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현재 높이 5.4m로서 국내 최대 규모의 당간지주이다. 현재 당간지주의 하부는 매몰되어 있어서 기단부는 확인할 수 없다. 기단부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양 지주는 동서 방향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각 면은 다듬지 않고 거칠게 조각한 그대로 남아있다.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치석수법이 정교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이런 작품을 대할 때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잣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거대하고 충격적인 것을 봤을 때 드는 ‘놀라움’ ‘당황스러움’과 같은 감정은 대체로 경외심을 동반한다. 그것이 자연적 현상이거나 미술작품이거나. 이런 경험을 현대미학에서는 ‘숭고미’라고 이름 붙여놓았다. 숭고미의 경험은 주체를 압도하는 거대함과 더불어 등장한다.
 

굴산사지 승탑.

굴산사지는 구산선문 사굴산파의 본산인 굴산사의 터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梵日國師)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범일 스님은 ‘회창 7년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전하였다’고 한다. 범일 스님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해는 847년이며, 이를 근거로 847년에 굴산사가 창건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조당집’에는 범일 스님이 귀국한 이후 ‘대중 5년 정월 명주 도독인 김공이 굴산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것은 851년에 이미 굴산사가 창건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며, 이때 범일 스님이 주석하게 되면서 굴산사의 중창 등 쇄신이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창건시기를 유추하면, 굴산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847년 무렵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851년에는 명주 도독이 범일스님을 굴산사에 모시고자 할 정도로 지역 내에서 중요한 사찰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굴산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굴산문은 범일 스님의 입적 후 ‘십성제자’로 대표되는 개청, 행적, 신의 등 스님들에 의해 크게 번성하여 고려시대 전 기간 동안 가장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산문이며 범일 스님이 주석하였던 시기의 굴산사는 선승들 뿐 아니라 지방, 왕실에서까지 추앙을 받았던 높은 사격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굴산사의 사명은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강릉팔영(江陵八詠)’중에는 ‘굴산종(崛山鐘)’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에 대한 김극기의 시에는 이 종이 범일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종이 속했던 사찰과 관련된 언급은 없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도호부 불우조에도 굴산사의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굴산사는 1530년 무렵에는 종만을 남긴 채 폐사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읍지류나 기록에서는 굴산사의 명칭이 확인되지 않으며, 1788년 편찬된 ‘임영지’에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더 이상 명맥을 잇지 못하고 폐허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굴산사지 승탑 석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일찍이 사지의 존재가 알려져 승탑을 중심으로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승탑에 대해 ‘팔각 4층의 석탑으로서 높이 10척6촌이며, 12층 및 대석에 정교한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간지주에 대한 조사 기록도 함께 남겼다. 승탑은 1934년 조선총독부 고시에 의해 보물 127호로 지정되었는데, 1935년에 밭 가운데 있던 승탑이 도괴되고 내부의 유물은 도난당하고 말았다. 한편 1936년에는 홍수로 인해 주변의 흙이 쓸려가면서 사역 내의 초석이 노출되고 ‘굴산사(崛山寺)’라 쓰여있는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굴산사지는 2002년에 발생한 태풍 루사에 의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태풍 루사는 2002년 8월31일 한반도에 상륙하여 사망·실종 246명의 인명 피해와 5조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낸 특급태풍이었다. 강도 ‘강’의 세력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몇 안 되는 태풍 중의 하나이며, 큰 비를 수반한 대표적인 태풍으로 꼽힌다. 대한민국의 일강수량 부문 역대 1위인 강릉의 870.5mm는 이 태풍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태풍 루사로 인해 굴산사지 사역의 상당부분이 유실되었고 2002~2004년에 긴급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2010년부터는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시굴 및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2차례의 시굴조사와 5차례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불교문화재연구소는 2016년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사역을 승탑의 동쪽까지 확장하기도 하였다. 굴산사지에는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 1기가 전하며 어단천 동쪽 경작지에 당간지주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1구, 굴산사 경내에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구와 옥개석 등이 전하고 있다.

한편 2014년 발굴조사 시 사역 북서쪽 선종 영역에서 탑비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그 중앙에 놓여 있던 귀부가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발굴조사 시에는 팔각 승탑의 옥개석편과 연화문석, 운문석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보아 사역 내에는 범일국사탑 이외에도 별도의 승탑과 탑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역 내에 있는 강릉 굴산사지 승탑(보물 제85호)은 통효대사 범일 스님의 사리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팔각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춘 팔각원당형 승탑이며, 1999년의 학술조사를 통해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승탑은 하단의 지대석 위에 운문이 새겨진 하대석 이상의 부재가 거의 온전한 상태로 적재되어 있었으나, 1935년 강릉 단오제때 도굴범들이 야음을 틈타 석조부도를 도괴하고 석실에서 사리장치를 도굴했다고 한다. 도굴 후에는 도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하부 지하에 석실이 있었으며 오백나한을 설치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승탑이 복원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옥개석 상부에 있던 노반과 앙화석 없이 보주만 올려진 형태로 세워지게 되었다. 1998년에 실시된 승탑의 전면 해체보수 시에는 승탑 지대석 하부까지 노출하여 측면에 새겨진 사자상을 발굴하였으며 주변에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특히 일부 파편만 남아 있던 운문석은 작성된 복원도를 토대로 복제품을 만들어 복원하고, 원 부재는 승탑 옆에 두었다. 즉, 이 학술조사를 토대로 한 복원의 결과, 지대석은 사자상을 포함하여 전면 노출되었으며 그 위에 복원된 운문석이 올려졌고, 옥개석 상부에는 노반-앙화-보주의 순으로 상륜부를 조성하게 되었다. 한편 2015년도 발굴조사에서는 승탑 하부에 동서 너비 1.75m, 남북 길이 3.4m, 깊이 1.3m의 화강암 판석으로 시설된 장방형 석실을 확인하였다. 승탑 하부에서 매장시설이 확인된 것은 국내에서 많지 않은 사례로서 크게 주목받았다.
 

굴산사지 귀부.

현재 사역 일원은 발굴조사가 완료되어 정리 중에 있는데, 곳곳에 수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범일국사의 탄생설화와 관련 있는 석천이다. 과거 이곳에는 우물터와 목이 없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1구가 있었으나 수해로 망실되었고 우물 역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현재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보호책을 둘러놓았고, 그 내부에는 과거 이곳에 있던 불상과 비슷한 형태의 석조물을 얹어놓았다.

최근 강릉시에서는 지금까지의 조사와 연구 성과를 토대로 굴산사지에 대한 보존·정비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굴산사지는 자연재해가 동산문화재 뿐 아니라 유적에도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양한 정비방안이 제시될 수 있지만, 태풍 루사로 인해 유실된 지형을 있는 그대로 노출하여 공개할 수 있다면 방문객들은 유적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50호 / 2018년 8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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