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종교의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권력과 세속의 정치인가를 구별 짓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다. 서로의 전체관이 혼돈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정치를 무시하는 종교인은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라고 했다. 종교란 이 세상을 진리적으로 구제하는 일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려보자. 한 나라의 영도자이기를 목표로 하는 정치인이라면 그의 발언은 언제나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이 빈번히 하나님 운운하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앙은 각자의 자유이나, 신앙인의 입장에서가 아닌 정치인의 위치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자리에서 툭하면 하나님 운운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기서 그런 정치인을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그런 소리를 공공연히 공석에서 할 수 있게 된 배경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으로 우리의 불교를 생각해 보련다.
정치인이 공석에서 공공연히 그런 발언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결국 이 나라 불교도들의 정치력이 거의 영점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은 민심을 지도할 능력이 불교에는 없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불교가 스스로의 권위로 민심을 지배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기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민감한 정치 지망생들이 먼저 알아차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는 세상을 이끌어갈 어떤 정신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이고, 종교세력으로서 얻어질 이익을 기독교에 걸고 있다는 것이며, 민심을 이끄는 세력으로 기독교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기에 정치인들의 저러한 발언이 가능한 것이다.
누구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내 자신을 개탄할 일이다, 1600년 전통이 무슨 잠꼬대였을까! 이 무능한 불교를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남북이 통일되면 금강산으로 만주로 구경간다는 소리는 귀가 간지럽도록 들었어도,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포교를 하겠다는 중의 소리 헛말이라도 들어본 적이 없다. 전체의 소중함을 모르고 자기의 사사로운 동기에는 혈안이 되면서, 귀찮은 일만은 허망하다고 외면하는 그러한 불교와 승려라면 영원히 푸대접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과 중의 인과가 아닐까? 불교인은 전체를 이해할 줄 몰랐고, 그러기에 전체를 걱정할 진정한 이유를 발견할 길이 없었다. 도리어 그보다는 전체는 내 개인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망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더 강하다. 자기만을 위해 일체를 허망하다고 보는 사상을 그렇게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자기의 그것은 허망하지 않을까? 불교 사상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불교계가 불교의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소화시키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인지를 결단하라! 선(禪)이란 것이 본래 인간의 시야를 그렇게 옹색하고 어둡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큰스님들이란 분들이 선 공부를 잘못한 것인가? 어느 쪽인지를 결단하라!
순진하고 어두운 것은 귀한 것이 아니다. 진실하고 순수하고 밝은 것이 귀하다. 순진해서 그렇다는 것은 거짓이다. 이야말로 순진을 갉아 먹는 진리의 사기꾼이다. 참 순진은 어둡지 않다. 군자는 인(仁)이 우물 속에 있다는 소인의 꾐에 빠져 우물가에 끌려가는 수는 있어도 우물 속에 들어가는 일만은 없다고 했다. 즉, 군자는 소인을 믿어 사실을 혹 오인하는 수는 있어도 사리에 어두워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다(孔子). 사리를 어둡게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다 사사로운 동기의 탓인 줄 알아라!
[1451호 / 2018년 8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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