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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피렌체 두오모와 석굴암의 돔-상

기자명 주수완

옛 로마 영광 재현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적 자존심

둥근 아치의 건축기술은
로마시대에 이미 존재해

로마네스크 아치 반원형
중세 고딕아치는 첨두형

둥근 아치 위 뾰족 솟은 탑
벌어짐 막고자 부벽 설치

솟아있는 부벽들 덕분에
고딕양식은 화려함 극치

첨두형 고딕인 두오모는
부벽 없이 홀로 서있어

설계된 돔 직경 42m 규모
당시 기술론 실현 불가능

피렌체의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그 형태는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지만 밝고 화려한 색채가 특징적으로 다가온다.

르네상스의 예술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미켈란젤로이지만, 르네상스의 고향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두오모(Duomo)’다. 곧 피렌체의 상징이다. 피렌체의 골목을 걷는 동안 건물들 틈새로 보이는 붉은 색의 거대한 돔은 내가 피렌체에 와있음을 늘 실감나게 한다. 그러다 문득 종탑에서 들려오는 영롱한 종소리라도 들려오면 집으로부터 정말 먼 곳에 와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불교에도 종이 있지만 어떻게 저렇게 소리가 다를 수 있을까. 건축이나 조각의 차이점을 보면서는 느끼지 못하는 한국과 유럽의 거리가 소리마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비로소 그 먼 거리가 실감이 된다. 성당의 종소리가 테너라면, 사찰의 종소리는 베이스라고나 할까. 아마 성당의 종소리는 인간이 신께 바치는 찬양의 소리라면, 불교의 종소리가 부처님의 중생을 향한 음성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음역이 서로 달랐던 것 같다.

두오모는 그러잖아도 유명한 건축이지만,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무대로 등장한 이후 더더욱 유명해졌다. 두오모 성당의 원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인데 곧 “꽃의 성모 마리아”란 뜻이다. ‘두오모’라는 것은 라틴어 ‘도무스(domus)’가 어원인데 ‘집’을 뜻한다. 지금은 둥그런 지붕구조인 “돔”을 말할 때 주로 사용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한 도시의 여러 성당 중에서도 그 도시를 가장 대표하는 대성당을 ‘두오모’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집’을 뜻하면서 건축적으로는 그만큼 지붕구조가 한 성당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 피렌체에도 두오모가 있고, 밀라노에도 두오모가 있고, 각 도시마다 두오모가 있다.
 

프랑스 고딕양식의 랭스 성당 뒷부분 앱스 천정을 받치고 있는 공중부벽(flying buttress). 형태적으로는 화려하고 정교하지만 전반적으로 장중한 느낌이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대성당을 ‘돔’이라 부른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노뜨르담(Notre Dame)’ 성당이 유명한데,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그 무대가 되었던 성당의 고유명사가 노뜨르담은 아니고 원제 ‘노뜨르담 드 빠리’에서처럼 빠리를 가장 대표하는 성당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프랑스 역시 다른 도시들 예를 들어 아미앵에도, 랭스에도, 리용에도 노뜨르담 성당이 있다. ‘노뜨르담’은 ‘Our Lady’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곧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마침 피렌체 두오모의 이름도 “꽃의 성모 마리아”이니 성당은 곧 하나님의 집이면서도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인식되는 일도 많았나 보다.

여하간 피렌체의 두오모는 왜 그렇게 유명할까? 사실 프랑스와 영국의 성당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랭스의 노뜨르담이나 영국의 링컨 성당 같은 성당들에 비해 언뜻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인다. 너무 밋밋하고 단순한 형태의 피렌체 두오모에 비해 오히려 다른 유럽 성당들은 훨씬 정교하고 장중하고 화려해 보인다. 이렇게 화려하게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공중부벽(flying buttress)이라는 구조물 때문이다. 언뜻 거미나 게가 다리를 세우고 있는 듯한 이 기괴한 구조는 유럽의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구조인데, 부벽, 즉 보조벽체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성당의 지붕구조를 받치기 위한 보조벽인 셈이다. 유럽의 성당들은 건축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천정을 나무구조가 아닌 돌로 쌓는 방식이 유행했고, 주로 아치(arch, 홍예) 형태로 덮었다. 우리의 경우도 아치는 돌다리나 석빙고 등 기둥이 없이 두 벽체를 덮거나 연결할 때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는 매우 안정적인 구조여서 건축의 혁신이라 부를만한 발명품이었다. 물론 이런 아치 구조는 로마 시대에도 활발히 사용되던 오래된 것이지만, 거대한 성당 건축의 지붕으로 적극 사용된 것은 중세에 와서의 일이다.

그런데 중세는 다시 전반부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후반부의 고딕 양식으로 나뉘는데, 그 결정적인 차이는 영국의 존 러스킨(John Ruskin)의 명쾌한 해석을 빌리자면 이 아치 구조의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다 옛 방식인 로마네스크 건축의 아치는 반원형이다. 반면 고딕 양식의 아치는 ‘첨두아치’라고 해서 위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아치이다. 첨두아치는 그만큼 높게 만들 수 있고, 창문으로 쓰더라도 더 많은 빛을 실내로 들여올 수 있다는 점에서 둥근 아치에 비해 훨씬 화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은 둥근 아치는 구조가 안정적이어서 자체적으로도 어느 정도 서있을 수 있는 구조이지만, 첨두아치는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 외에 옆으로 벌어지는 압력이 더 생겨서 혼자서는 서있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공중부벽이다. 즉, 첨두아치 구조의 지붕이 옆으로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옆에서 받쳐주는 보조벽체인 것이다. 그런데 벽에 붙어서 보조하는 벽이 아니라, 독립된 기둥처럼 떠서 보조하기 때문에 ‘공중부벽’이라고 부른다. 알고 보면 지붕을 받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딕건축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특징이 되어 버렸다.
 

피렌체 두오모와 그 자리에 원래 서있던 성당의 크기 비교를 묘사한 그림. 두오모 성당 앞부분 안쪽에 그려진 흰색 건물이 원래 있던 성당이다.

다시 피렌체의 두오모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이 첨두아치를 360° 돌려서 만든 것이 첨두형 돔인 것이고, 피렌체 두오모의 돔(이탈리아에서는 돔을 쿠폴라라고 한다)이 바로 이런 첨두 돔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피렌체의 돔에는 공중부벽이 없다. 첨두형 돔인데도 옆에 아무런 보조벽체가 없이 홀로 서있는 구조이다. 피렌체 두오모가 밋밋하고 심심해 보인 이유는 바로 이처럼 아무런 부벽이 없이 홀로 서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기술이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이었던 셈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돔은 마치 높은 하늘에 떠있는 것처럼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 이 돔은 평범한 돔이 아니었다. 돔 자체의 크기도 세계 최대였을 뿐 아니라, 돔이 올라가게 될 높이 역시 세계 최대였다. 설계도면 상으로만 보면 마치 요즘 우리가 어떻게 우주도시를 건설할 것인가 상상할 때 그리는 상상도 수준의 모습이지 결코 실현가능한 건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피렌체 시민들이 이런 건축을 짓고자 했던 데에는 일종의 자존심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르네상스는 지금은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사실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그들의 자존심인 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당시까지 거의 잃어버린 천년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 긴 기간 동안의 유럽 역사는 과거 그들이 야만적이라고 일컬었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게르만족들이 점차 성장해간 역사였고 그 찬란한 업적은 고딕 성당에 녹아있었다. 그에 반해 침체기를 겪었던 이탈리아는 교황의 로마를 제외하고는 분열과 침체기를 겪었다. 역사상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사건 때까지만 해도 로마 교회는 세속 왕권보다 위에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아비뇽의 유수’는 드디어 로마 교회의 권위마저 세속 권력에 추월당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중국으로 말하자면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갔던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피렌체 두오모의 돔(쿠폴라)의 규모를 다른 돔과 비교해 보여주는 그림. 가장 왼쪽은 로마의 판테온, 그 옆은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이다. 피렌체의 두오모 옆으로 보이는 거대한 돔은 로마 베드로 성당의 돔인데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 돔의 직경만 보면 두오모보다 작다. 참고로 가장 오른쪽은 미국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돔인데, 1868년의 건물임에도 피렌체 두오모 앞에서는 왜소해 보인다.

이러한 극심한 혼란 속에서 인문주의 운동이 싹을 트기 시작했고, 이어 교황도 다시 로마에 자리 잡으면서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한 결과 이탈리아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배경에는 어떻게 해서든 게르만족의 고딕 문화를 이겨보기 위한 자존심 대결이 있었다. 그러나 문화가 문화만으로 경쟁하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을 터였다. 다행히 당시 이탈리아는 비록 정치,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잘 알려진 메디치 가문의 금융업처럼 강대국의 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함으로써 이러한 문화적 성장을 뒷받침할 배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량이 축적되자 이탈리아는 오랜 숙원이던 문화적 자존심 회복에 나섰고 그 신호탄이 말하자면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었던 것이다.

피렌체는 자신들의 성장을 과시할 대표적인 성당 건축을 꿈꾸었고, 현재의 두오모 자리에 원래 있었던 규모가 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허물고 새롭게 건설할 성당의 설계를 공모했다. 최종 당선된 안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0~1310?)의 설계였는데, 그때 이미 아무런 부벽이 없이 설계된 돔은 직경이 42m였고, 84m 높이의 건축 위에 세워져야 하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형태의 건축일 뿐, 그것을 실제 세울 수 있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피렌체 시의회는 이 건축이야말로 야만적인 고딕 건축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는 피렌체의 자랑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뜻도 좋고 이상도 좋으나 정말로 그 뜻과 이상만으로 이 설계안을 당선시키고 실제 건설하도록 허락한 피렌체인들이라니, 이것을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 무모했다고 해야 할까.(계속)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51호 / 2018년 8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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