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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계백의 투쟁과 배려

기자명 김정빈

삶과 심리와 불법에 대해 숙고했던 백전노장

계백, 처자식 죽이고 황산벌 참전
어린 관창엔 자비 베풀며 살려줘
관창 죽일땐 복잡한 배려심 읽혀
계백, 순간순간 숙고하며 결행해

그림=근호
그림=근호

백제의 마지막 왕인 제31대 의자왕은 세자 시절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의가 돈독하여 ‘효경’의 저자로 알려진 증자의 이름을 따서 ‘해동증자’로 불릴 정도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는 신라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구려와 당나라와는 친선 관계를 잘 유지하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치와 방탕에 빠져들었다. 궁궐을 중수하고 왕궁 남쪽에 정자를 세웠으며, 많은 궁녀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음란과 향락을 즐겼다. 그렇게 하여 얻은 서자가 41명에 이르렀는데 의자왕은 그들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주었다.

왕이 국정을 돌보지 않자 나라 안에서는 변란을 예고하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여우떼가 궁으로 들어오고, 도성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연이은 가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 왕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던 만큼 민심이 흉흉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보다 못한 좌평 성충이 간언을 하자 의자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어 죽으면서까지 충언을 남겼다.

“작금의 형세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육로로는 침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해로로는 기벌포 연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민심이 더욱 어지러워진 그 무렵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고 외치고는 땅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땅을 파보았더니 큰 거북 한 마리가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이고 신라는 초승달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무당이 “둥근 달이라는 것은 기운다는 뜻이고, 초승달이라는 것은 점점 찬다는 뜻입니다”라고 해석하자 왕은 그를 죽였다. 그때 옆에 있던 신하가 “둥근 달은 성하다는 것이고, 초승달은 미약하다는 뜻입니다”라고 하자 왕이 기뻐했다.

의자왕 20년인 서기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다.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의 신라군은 육지를 통해 백제의 동쪽에서, 소정방이 지휘하는 13만의 당군은 서쪽 해안을 통해 백제로 진군해오고 있었다. 당황한 의자왕은 성충과 함께 간언을 하다가 유배형에 처해진 흥수를 불러들였는데, 흥수는 돌아오는 길에 성충과 유사한 진언을 했다. “탄현(침현)과 백강(기벌포)은 군사 요충지입니다. 이곳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의견은 무시되었다.

나당 연합군이 탄현과 백강으로 진입한 후에야 의자왕은 5000명의 군대를 달솔 계백에게 맡겨 신라에 대적토록 조치했다. 출전에 앞서 계백은 “나의 처자가 적에게 사로잡혀 노비가 되는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자신의 처자를 죽였다. 또한 그는 “옛날 월왕 구천은 5000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한 일이 있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분발해 싸움으로써 반드시 승리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외치며 병사들의 분전을 촉구했다.

계백이 이끈 백제군은 열 배나 되는 신라군과 황산벌에서 전투를 벌였다. 놀랍게도 계백은 네 번을 싸워 네 번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상승장군 김유신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는 사기가 떨어진 신라군을 격려하기 위해 화랑들을 이용했다.

화랑은 신라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로서, 많은 청년 낭도들의 정신적, 신체적 지도자이다. 당시 신라군에는 두 명의 화랑이 있었는데, 반굴은 장군 김흠춘의 아들이었고, 관창은 김품일의 아들이었다. 먼저 반굴이 아버지의 명을 받아 낭도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여 모두 전사했다. 이어서 관창이 낭도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가서 나머지는 모두 죽고 자신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계백이 적장을 사로잡아 투구를 벗겨보니 놀랍게도 홍안의 미소년이었다. 당시 관창의 나이는 불과 열여섯 살. 계백은 자신의 손에 죽은 처자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백전노장은 어린 소년의 몸을 묶어 말에 태워 적진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본진으로 돌아와 묶인 몸이 풀린 뒤, 관창은 한 모금 물을 마시고 나서 또다시 적진으로 돌진했다. 그리하여 그는 백제군에 의해 전사하였는데,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군에게 보냈다. 관창의 분전에 신라군의 사기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끓어올랐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유신은 전투를 벌였고, 중과부적, 백제군은 한 병사도 남김없이 전멸하고 말았다.

계백이 가족을 죽인 처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조선 초의 권근은 인륜을 저버린 처사라고 비난했고, 조선 후기 안정복은 “집과 몸을 잊은 뒤라야 사졸들이 죽을 결심을 하게 될 것이므로, 내가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을 보여준 이 행동은 병법상 이치에 맞는다”며 계백을 변호했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는 자기 자신”이며 “세상 끝까지 가본다고 해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존재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어서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이 이치는 나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남들에게도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는 남을 해치거나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저마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계백은 아내와 자식들의 행동 결정의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했다. 그러한 처사에 대해 계백의 아내와 자식들이 동의했다면 별개의 문제이지만 그런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동의했다면 그 특별한 경우를 역사서는 놓치지 않고 기록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자신의 처자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목숨을 빼앗아버린 이 백전노장이 적군인 화랑 관창에 대해서는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마땅해 보이는 장면에서는 남다른 배려심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관창에게 보여준 배려심을 고려할 때 계백이 처자를 죽일 때의 심정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형태의 배려심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봄직도 하다.

생물학적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한다는 것이고, 인문학적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경쟁이 극한으로 치달으면 투쟁이 벌어지고, 이해가 최고 수준에 이르면 적들까지 배려하게 된다.

백제 장군 계백에게는 생물학적 인간과 인문학적 인간이라는 두 면모가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 두 면모는 있다. 인간의 심리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삶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숙고하게 된다. 삶에 대해, 심리에 대해, 불법에 대해.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52호 / 2018년 8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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