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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경주시 황룡동 황룡사지

기자명 임석규

파손된 상태의 3개 석탑 남아있는 신라시대 또 다른 황룡사

석탑의 결구 양식 살펴보면
8세기 경주 유행했던 방식

수차례 폐사와 중창 거치며
19세기 초까지 존속 추정

크게 3개의 사역으로 구분
신라 쌍탑과 고려 탑 공존

평지가 아닌 산지 쌍탑은
신라 사찰로 매우 드문 경우

3개의 탑을 모두 복원한다면
사례 드문 독특한 사찰 가능

7월22일부터 발굴조사 착수
중요한 유물 출토 소식 들려

황룡사지 전경.

경주에는 현재 두 곳의 황룡사지가 알려져 있다. 한 곳은 신라 왕경지역 구황동에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신라시대 황룡사터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주시 황룡동 산 170-1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이다. 황룡동은 해발 400m의 백두산 줄기 추령의 서쪽에 위치하며 경주시의 동중에서 가장 험준에 산골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4번 지방국도를 따라 덕동댐을 지나면 황룡동 사시목(현 황룡휴게소)에 이른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속칭 ‘절골’이라고 하는 계곡이 이어지는데 두 갈래 길에서 왼쪽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 2km를 더 가면 황룡사라는 절이 나온다. 이 절은 1987년 종연(宗然) 스님이 건립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옛 황룡사터는 현 사찰의 북쪽 산중턱에 있다.

신라 때 문무왕(文武王)이 동해로 오갈 때 이쪽을 이용했다고 하니 적어도 그 당시에는 길이 나 있었고, 사람들도 거주하였거나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사명과 위치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오사까긴따로(大坂金太郞)가 당시 지명인 황룡리(黃龍里)와 폐탑 유적을 토대로 추정한 것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A구역 동탑지.

사찰의 창건이나 폐사와 관련한 내용은 ‘불국사고금역대제현계창기(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創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2년(633)에 장인을 불러와서 약사상을 안치하고 황둔사(黃芚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소성왕(799~800) 때는 5년간 가뭄이 들어서 산의 풀과 나무가 다 말라죽는 일이 있었는데, 유독 이 산의 풀과 나무는 물을 흠뻑 머금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을 은점산(隱霑山)이라 하고 절은 황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의 기록은 없고, 1623년에 담화(曇華) 스님이 조정의 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황룡사를 찾으니 이미 왜적에 의해 모두 불타 없어져 중창하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기록에는 담화 스님에 의해 중창된 후 1650년에도 중수되나 1701년에 폐사된 상태로 스님만 남아 있어, 불국사에 소속시키면서 사명도 심적암(深寂庵)으로 고치게 된다. 1702년에 숭흘(崇屹)과 사흠(思欠)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고, 1708년에는 찬영(贊英) 스님이 법당을 중창한다. 1715년에 법당이 소실되어 국정(國淨) 스님이 다시 중창하였으며, 마지막으로 1730년 법상(法常) 스님에 의해 중건된 내용을 끝으로 관련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창기와 달리 1845년에 증보,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와 18세기 전후의 ‘범우고(梵宇攷)’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지리지 및 제작연도가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영남지도(嶺南地圖) 경주’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여도(廣輿圖) 경주부’ 등의 지도에도 황룡사가 기록되어 있어 조선후기에도 사명이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폐사시기에 대해서는 ‘금폐(今廢)’로 기록되어 있는 ‘범우고’를 통해 18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매우 약화된 사세가 19세기 초까지는 이어온 것으로도 추정하고 있다. 추정사역은 남쪽으로 흐르는 2곳의 지류를 기준으로 크게 3개의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구역에는 계단식 평탄지가 1~3단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석탑재와 건물지가 확인된다. 편의상 추정사역의 우측 구역부터 A, B, C구역으로 나누어 보았다. A구역은 상·하 2단의 평탄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계부에는 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석축은 정남향에 가까운 남서향이고, 35~130㎝ 크기의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잔존 높이는 2.8m이며, 길이는 20m 정도이다. 상·하단 평탄지 사이에는 약 6m가량 고도차가 있어서 원래 석축의 높이는 3m이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단 평탄지 상부에는 2기의 석탑이 붕괴된 채 흩어져 있고, 석탑 뒤쪽(북쪽)에는 건물지가 있다. 확인되는 평탄지 규모는 61×25.2m 정도이나 대나무 숲이 밀집한 건물지 후면을 포함하면 61×34m 내외로 추정된다. 건물지는 2기의 석탑 후면 중앙부에 1동이 있고, 그 좌측에 1동이 더 있다. 중앙 건물지는 아마도 ‘금당터’일 것이다. 이 금당터는 자연석을 이용한 기단 위에 조성되었으며 내부에는 초석들이 남아있다. 남아 있는 초석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석 이외에도 여러 매의 장대석이 남아있으며 이 석물들은 건물이 같은 자리에서 여러 번 중창될 때 재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좌측의 건물지에는 4개의 초석이 남아있는데, 건물지 주변 여러 곳이 파헤쳐져 있다. 주지 스님에 따르면 야생동물들이 내려와 훼손한 것이라 한다. 2동의 건물지 외에도 석탑 주변에 2매의 초석이 있고, 석축 북쪽 대나무 숲 경계부에도 3매의 초석이 남아 있다.

C구역 석탑재.

B구역은 크게 4단의 평탄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구역에 비해 정비가 되어있는 편이다. 최상단에 해당하는 1단 평탄지는 34.3×13.7m 규모이고, 건물지가 확인된다. 평탄지 종단에는 석축이 확인되나 대부분 결실되었다. 석축의 잔존 높이는 2.3m이며, 부분적으로 길이 2.3~4m 가량 남아 있다. 2단 평탄지 이하에는 잔디 등이 식재되어 있고, 3단 평탄지 내에는 길이 162㎝ 정도의 장대석이 포함된 폭 3m의 돌무지가 확인되어 해당구역 일원이 정비된 것을 알 수 있다.

C구역은 평면상 20×12m 가량의 타원형 평탄지로 형성되어 있다. 평탄지 내에는 붕괴된 석탑 부재와 배례석 등이 남아 있다. 석탑재 북쪽으로는 근래에 이장된 월성박씨묘가 있고, 건물지 관련 유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황룡동 황룡사지는 도괴된 상태로 남아 있는 3기의 탑으로 인해 일제강점기부터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현재 절터에는 A구역에 2기, C구역에 1기의 석탑이 붕괴된 채 남아있다.

A구역 내 두 탑의 거리는 약10m 내외이다. 1931년 조사 당시에는 붕괴된 상태로 확인되었고, 신라시대 일반형 삼층석탑으로 분류되었다. 기단부 일부를 제외하면 두 탑의 조성방식과 규모는 비슷하다.

기단부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형식인 이중기단이다. 지대석과 하층기단면석은 하나의 돌이며, 하층기단갑석은 별도로 조성하였다. 기단석은 두 탑 모두 8매의 부재를 사용하였고, 모서리 4매, 면석 4매로 구성하였다. 길이는 90~110㎝ 내외이고, 길이가 긴 부재는 우주와 탱주가 함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체적으로 복원하면 길이가 2.9m정도 될 것이다.

탑신부의 옥개석과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조성되었다. 두 탑 모두 남아 있는 부재로 보아 3층탑으로 판단된다. 탑신석에는 우주를 새겨 놓았고, 옥개석에는 2단의 각형 탑신괴임과 4단의 각형 옥개받침을 표현하였으며,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1층탑신석은 두 탑 모두 너비 95㎝, 높이 90㎝내외로 크기가 유사하며, 우주의 너비는 19㎝이다. 상면 중앙에 17×18㎝, 깊이 14㎝정도의 방형사리공이 조성되어 있다. 1층 옥개석의 경우 동탑은 일부만 잔존하고, 서탑도 반전된 상태로 매립되어 있어 일부만 확인할 수 있다. 3층탑신은 두 탑 모두 확인되지 않는다. 3층옥개석은 두 탑 모두 상면에 직경 13.5㎝, 깊이 13㎝ 내외의 찰주공이 조성되어 있다.

경주황룡사쌍탑 추정 복원안.

C구역 내의 석탑도 붕괴된 상태인데 A구역 탑들과 조성방식에 차이가 있어 고려시대의 탑으로 판단되고 있다. 기단부는 탑구로 추정되는 판석이 기단 외부에 일부 남아 있고, 지대석은 31~89㎝ 크기의 방형석재 5~6매를 이용하여 한 면을 구성하고 있어 복원되는 지대석 길이는 3.7m, 높이 35㎝이다. 기단면석은 5매의 판석형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 너비 42~46㎝, 높이 78㎝ 내외의 부재 중 모서리와 중앙부에는 곡선형으로 양각된 면석이 있다.

황룡사지 석탑의 특징은 산지에 쌍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라지역의 쌍탑은 주로 평지에 건립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황룡사지와 같이 산지에 나타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경주 남산 기암곡의 쌍탑이나 장항리사지 쌍탑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된 것은 산비탈을 따라 가람이 형성되다 보니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되는 일반적인 구성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이 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상·하층 기단부 네 모서리에 ‘ㄱ’자형 귀틀석을 두고 귀틀석 사이에 판석 모양의 면석을 끼워 넣는 결구법이다. 이 같은 결구법은 경주 황복사지 석탑을 비롯하여 8세기 경주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방식이기 때문에 황룡사 쌍탑의 건립연대를 8세기 중엽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황룡사지 원경.

황룡동 황룡사는 3개 구역으로 구분할 만큼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이다. 문헌기록과 산포 유물, 소재문화재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후기 까지 오랜 기간 법맥이 유지되었으며, 쌍탑이 조성된 A구역을 시작으로 후대(고려시대)에는 사역이 C구역으로 확장되었던 것 같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2기의 석탑은 복원이 가능하고, 고려시대 석탑으로 알려진 C구역 석탑도 추후 정밀조사를 통해 복원할 수 있다면 유사 사례가 드문 독특한 형식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2012년에 이곳 황룡사지를 정밀조사하였는데, A구역의 쌍탑에 대해서는 부재들을 3D 스캔하여 추정복원도를 작성해 보았다. 탑이 도괴된 자리에 복원된 쌍탑을 앉혀 보았는데 그 풍광이 매우 달라졌다. 어떤 이는 ‘폐허미’가 사라졌다고 아쉬워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너진 것을 방치해 놓았을 때 나타나는 것이 ‘폐허미’는 아닐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지에 대한 시발굴조사 등을 실시하여 탑과 건물의 배치를 확인한다거나, 지하에 매몰되어 있는 많은 정보들을 확인하여 사찰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 정비할지, 무엇을 복원할 지를 선택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최근까지 황룡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매우 아쉬웠으나, 지난 7월 22일부터 우리 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착수한지 2주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다음 주에는 경주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52호 / 2018년 8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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