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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셔츠와 겉옷 한 벌이 전부였던 송광사 복원불사 주역

기자명 현장 스님
  • 특별기획
  • 입력 2018.08.27 14:45
  • 수정 2018.08.28 10:52
  • 호수 1453
  • 댓글 12

송광사 취봉 스님 이야기

일본 유학 후 송광사 머물며 정진
검소한 생활로 사찰 복원에 힘써

입적 전 정재 장학금으로 내놓고
다비식 경비와 납자 여비까지 챙겨

한국전쟁 후 교단 폭력사태에도
대중 설득해 분쟁없는 불사 진행

호남불교 중흥 원력 몸소 실천
불길 사투로 경내 화마 막기도

취봉 스님은 송광사 복원 불사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생 검박한 생활을 했다. 사진은 대중스님들과 운력하는 모습. 사진제공=원공 스님

194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순천 송광사 주지를 3번 지내면서 조계총림의 승풍을 진작시켰던 취봉 스님이 지난 8월9일로 입적 35주기를 맞았다. 이를 계기로 보성 대원사 회주 현장 스님이 취봉 스님의 상좌인 원공 스님이 구술한 얘기들을 토대로 정리해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현장 스님은 취봉 스님에 관련된 일화와 어록 등을 소개한 뒤 “폭력적인 투쟁이나 소송 없이 불교정화의 모범이 된 송광사 이야기는 조계종단에 커다란 교훈으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편집자

 

송광사의 취봉 노스님은 일본 임제대학을 졸업한 현대적인 학식과 교양을 갖춘 학승이다. 또한 평생 화두를 참구하며 수행하던 운수납자였다. 그 당시 일본유학을 다녀오면 사회적인 지위를 갖추고 결혼하여 31본산 주지와 큰 사찰 주지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취봉 스님은 유행에 따른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 비구승으로써 계율을 지키고 살았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송광사에 머물면서 정진하였다. 여순사건 때 국군의 방화로 전소된 송광사 복원불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낡고 헤어진 옷과 신발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몇 번씩 기워 입거나 수선해서 신었다.

취봉 스님이 이처럼 절약한 이유는 본래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인 것도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화마(火魔)를 겪은 송광사를 복원하려는 원력에서 비롯됐다. 없는 살림에 한 푼이라도 아껴 복원 불사금을 마련하려는 검박한 생활은 눈물겨웠다. 교통편도 오직 시내버스만 이용했다. 기차도 2등 칸 한번 타지 않고, 비좁은 3등 칸을 이용했다.

외출해 공양시간이 되면 따뜻한 밥 한 그릇 사먹지 않고, 절에서 가져온 몇 조각의 떡으로 대신했다. 공무(公務)로 사중에서 지급한 여비도 아끼고 아껴 남은 돈은 반드시 종무소에 반납했다.
그렇게 절약한 돈으로 마련한 논 열아홉 마지기를 송광사에 보시했고, 설법전을 지을 때는 손수 권선책을 제작해 ‘일금 2만원 취봉’이라 쓰면서 “탁발을 해서라도 불사를 마무리하자”고 대중을 격려했다.

내·외전과 선교를 두루 겸비했던 스님은 ‘금강경’을 자주 독송했다. 생전에 “내가 아마 1000독(讀)은 했을 것이시”라고 했다. 어찌나 많이 ‘금강경’을 독송하는지 도반 동곡 스님이 “웬 금강경을 그리 많이 읽어 싸. 수보리존자 될라고 그라요”라고 하였다.

내·외전과 선교를 두루 겸비했던 취봉 스님.
내·외전과 선교를 두루 겸비했던 취봉 스님. 사진제공=원공 스님
생전의 취봉 스님.
생전의 취봉 스님. 사진제공=원공 스님

취봉 스님은 “부처님 제자가 경을 읽는 것이 뭐시 죄간디”라며 함께 웃었다고 한다. 또한 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 대립으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을 무렵에는 관세음보살 독송을 잊지 않았다.

그 공덕 때문인지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건 없건 일심으로 불렀어. 관세음 보살님을 많이 부르니 내미럴 하나도 안 무섭대 그리야.”

스님의 진면목은 당신이 입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세상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면 목숨을 유지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스님은 ‘세월이 흘러 육신이 무너지는 자연의 순리’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세상과 이별할 시기가 가까워지는 것을 직감한 스님은 주변 정리에 나섰다. 우선 당신 물건을 꺼내 다른 이에게 줄 것은 주고 버릴 것은 버렸다.

말년에 남은 것은 러닝셔츠 한 장과 겉옷 한 벌이 전부였다. 시자가 빨래할 때면 옷이 마를 때까지 알몸인 채로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들을 불러 들였다. 당신의 정재(淨財)를 법당 건립기금과 장학금으로 내놓고, 남은 얼마간의 돈은 다비식 경비와 납자들의 여비로 사용하라고 했다.

한국전쟁 후 한국불교는 이승만 정권의 개입으로 정화불사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었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의 수많은 사찰들도 극단적인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대처측과 비구측으로 나뉘어 사찰 소유권을 가지고 전국의 모든 사찰들이 소송이 진행되었다. 불교재산은 하나씩 사라지고 불교는 서로 싸우는 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300명도 안 되는 비구측을 선동하여 7000명 이상 되는 대처측을 쫓아내고 1700여개의 사찰을 차지하라는 것이었다. 태고종에서는 불교법난이라부르고 조계종에서는 불교정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승만의 속셈은 달랐다.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건설하기 위해 불교를 자중지란의 구렁텅이로 처박은 것이다. 조계종단은 이승만의 마법에 걸려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당시는 이승만의 여덟 번에 걸친 유시에 따라 대처승을 일제잔재로 규정하고 절을 빼앗는 일을 불교정화라고 불렀다. 하지만 송광사는 예외였다.

취봉 스님과 상좌 스님들. 사진제공=원공 스님.
취봉 스님과 상좌 스님들. 사진제공=원공 스님.

송광사는 단 한차례의 물리적 충돌도 없이 원만하게 합의를 이뤘고, 승보종찰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이때 송광사의 대처측 대표로 대중들을 설득한 스님이 바로 취봉 스님이다. 대처측이라고 해서 모든 스님들이 대처가 아니었다. 독신비구승으로 정법을 지켜온 스님들도 많았다. 송광사에서는 취봉 스님·성공 스님 등 몇 안 되는 비구스님들과 효봉 스님 제자인 구산 스님을 모셔와 호남불교 중흥의 원력을 실천하도록 했다. 불교정화 과정에서 송광사는 아무런 분쟁 없이 서로 공존하고 존중하면서 불사를 진행해온 것이다.

내가 송광사 출가할 때만 해도 임경당에 취봉 노스님과 학산 노스님이 계셨다. 법성료에는 혜월 노스님과 대우 노스님이 계셨고, 도성당에는 인암 노스님과 계룡 노스님이 계셨다. 감로암은 진일심화보살이 중창한 비구니 선원이었고, 부도암에는 성공 스님, 문곡 스님, 만곡 스님이 계시면서 시간 따라 북강쇠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전쟁 당시 공비들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천년고찰 송광사는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불길은 3일이나 계속됐다. 국군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세 명의 스님이 화재 현장에 도착했다. 어디서 빨치산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위급한 순간이었지만 불길에 갇힌 송광사를 구하려고 스님들은 달려왔다.

거대한 불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부분의 전각을 삼키고 있었고, 16국사 진영을 모신 국사전 귀퉁이에 불이 옮겨 붙었다. 취봉 스님은 함께 온 성공 스님, 인암 스님과 같이 승복을 벗어 개울물에 적신 후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다른 도구가 없었다. 벌거벗은 채 물에 적신 승복으로 겨우 불을 잡았고, 사투 끝에 국사전은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입적 이틀 전 취봉 스님의 모습. 사진제공=원공 스님

다음은 취봉스님 어록이다.

“중은 어쩌던지 신심이 있어야 되야. …중은 돈도 쉐양 없고, 명예도 쉐양 없어. 다 망상이여. 내가 이 나이에 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러고 버티지 딴 것이 있간디. 자네들도 부지런히 해야 되야. 게으르면 아무 짝에도 못쓰는 것이여.”
“들은풍월로 아는 체 하는 선객이 되지 마러야 해. 받은 시은과 망어죄를 어찌 할고.”
“일대사 해결 공부는 진속의 처소가 상관없어야 혀. 정진할 때 화두만 순일하면 고요한 곳과 시끄러운 곳이 상관 없응께 세속에서도 정진 잘 해야 혀.”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 유수와 같다고 했으니 인생 일세는 잠깐이여. 속가의 형제친척도 생각 말고 스님도 걱정 말고 정진 일로(一路)에만 분투해야 혀. …정신을 못 차리면 부지중(不知中) 세월은 흘러, 10년 20년 내지 일생을 수행해도 별 힘없고 시은만 지중할 뿐이여.”
“사람 몸 한번 잃어버리면 만겁 회복하기 어려워 …이왕 신심을 발하였으니 천신만고의 역경을 감행해야 혀. 말이 앞서지 말고 실천이 앞서야 헌다고.”
“중은 어쩌던지 죽은 뒤가 깨끗해야 되거던. 자질구레한 물건도 남기면 안 돼, 죽을 때는 아무 것도 없이 깨끗이 죽어야 혀.”

다음은 취봉 노스님의 간단한 행장소개이다.

1898년 8월29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임상묵 선생. 15세에 하동 쌍계사로 출가한 후, 19세 되던 해 순천 송광사에서 남호(南湖)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다음 해에 호은(虎隱)스님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 송광사 강원을 수료하고, 이듬해에 송광사가 벌교에 설립한 송명학교(松明學校) 교사를 지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정확한 해는 알 수 없지만 42세(1939년)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일본 교토 임제대학(지금의 하나조노대학)을 졸업했다. 전 조계종 종정 서옹 스님도 비슷한 시기에 임제대학에 재학했다. 졸업 후 곧바로 귀국한 취봉 스님은 송광사 강원 강사로 후학을 양성했다. 교학을 연찬하면서 참선 수행도 병행했다.

현장 스님보성 대원사 회주
현장 스님
보성 대원사 회주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 문하와 사천(충무) 용화사 도솔암 효봉 스님 회상에서 화두를 참구했다.

 

[1453호 / 2018년 8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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