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피렌체 두오모와 석굴암의 돔-하
16. 피렌체 두오모와 석굴암의 돔-하
  • 주수완
  • 승인 2018.08.28 09:48
  • 호수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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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위대한 건축물 창조케 한 원동력

불가능한 건축 계획한 것은
새로운 기술개발 낙관 때문

여러 감독들 손을 거치면서
성당은 차근차근 완성돼 가

돔 건설할 담당자 공모 결과
브루넬레스키 안이 당선돼

소가 끄는 엘리베이터 고안
돔에 소켓 끼워 무너짐 방지

특별한 공법들은 아니지만
기발한 발상이 걸작의 비결

석굴암 돔 돌못도 마찬가지
지진도 견디는 견고함 비결
피렌체 두오모의 지오토 종탑. 아로놀포 디 캄비오를 이어 성당공사 책임자가 된 지오토의 작품이다.

피렌체 시가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돔을 가진 성당을 채택한 것은 돔 아래 부분의 건축을 세우는 데에만도 백년은 족히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 돔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리라 낙관했기 때문이었다. 두오모의 거대한 공사는 1296년 9월9일 시작되었다. 그리고 설계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몇 년 뒤인 1302년에 사망하자 공사는 지지부진 답보상태에 빠져버렸다. 공사가 재개된 것은 30여년이 흐른 후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를 새로운 공사감독으로 임명하고 난 1334년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지오토도 1337년 사망했으며, 지오토를 돕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 1270?~1348)가 후임으로 공사를 이어갔으나, 다시 1348년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언뜻 들어보면 우여곡절이 많은 공사 같지만, 알고 보면 유럽의 대성당들은 규모가 크고 그만큼 돈도 많이 들어가는 대 공사인 만큼 긴 시간 공사가 이어지다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1349년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고, 이후로 여러 감독들의 손을 거치면서 설계안대로 차곡차곡 성당은 완성되어 갔다. 1375년에는 원래 피렌체의 중심 성당이었고 마지막까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드디어 헐리고 그 자리까지 새 성당이 확장되면서 1418년에는 돔을 제외한 모든 공정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캄비오의 원안대로 돔을 쌓을 수 있는 기술은 발명되지 않았다.
 

브루넬레스키가 자신의 공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돔 모형. 도나텔로와 난디 디 방코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1331년부터 두오모 공사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양모 상인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는 돔 건설 방법에 대한 현상공모를 실시했다. 이때 경합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르네상스의 두 거장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 1446)도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경합 끝에 브루넬레스키의 안이 당선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건축가는 아니었다. 기베르티도 그렇고 원래 두 사람은 금은세공인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언뜻 주얼리 디자이너 같은 개념 같지만, 마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이발관 앞의 빨갛고 파란 선이 그어진 빙글빙글 돌아가는 조형물이 원래는 이발관이 아니라 동맥과 정맥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과거에는 이발사가 의사 역할도 했다는 이야기처럼 르네상스 시대의 금은세공인은 단순한 주얼리 디자이너에 머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브루넬레스키가 했던 일 중에는 정밀한 시계를 만드는 작업도 있었다. 당시의 톱니바퀴 등을 이용한 기계장치는 아직 엔지니어의 일이 아니라 금은세공인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발명가 직업이었다고 할까.

물론 금이나 청동을 녹여 만드는 조각가의 일도 겸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기베르티나 브루넬레스키나 모두 청동조각으로 일세를 풍미한 조각가들이기도 했다. 나아가 브루넬레스키가 시계나 만들다가 갑자기 이 엄청난 돔 공사에 발탁된 것도 아니었다. 이미 그는 두오모의 돔 공사를 맡기 전에 비단 상인 길드의 의뢰로 오스페달레 델리 이노첸티(Ospedale degli Innocenti)라는 고아원을 설계한 적이 있었다.(종합병원 규모를 지닌 건축이었다) 하지만 그 건축은 일부 르네상스 건축의 새로운 면모가 싹트고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을 반영한 설계였기 때문에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돔이라는 전무후무한 공사를 맡은 사람의 이력이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피렌체 두오모의 돔 공사에 사용된 도구와 기계장치들.

그럼에도 그가 선택이 된 것은 그의 경력이나 이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차피 그런 돔은 아무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경력이 아니라 과학이었고, 가장 설득력 있는 방안을 직접 제시한 브루넬레스키가 당선이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경력이 아닌 아이디어를 높이 사는 정신이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 아이디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그의 친구였던 조각가 도나텔로와 함께 1402년경 로마로 고대유적을 연구하기 위한 여행을 다녀온 바 있다. 그는 단순한 고대유적의 감상이 아니라 그것의 제작이나 건축기법에 대해 처음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아마 그의 이러한 노력이 보이지 않게 두오모 돔의 설계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 로마에서 보았던 판테온의 콘트리트 돔을 그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이미 고대의 콘크리트 기법은 그 비법이 끊어진지 오래였다.

이렇게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기계장치를 발명하던 브루넬레스키는 조금 크기는 했지만 평소 하던 일의 연장선상에서 돔을 구상했다. 두오모 돔의 첫째 난관은 돔 자체가 너무 높이 있기 때문에 그곳까지 어떻게 돌이나 벽돌을 운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문제를 일종의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서 해결했다고 한다. 발명가로서의 그의 경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기계였다. 동력은 지상에서 소들이 연자방아 돌리듯이 돌았고, 그에 따라 기계장치에 의해 화물을 운반할 선반이 공사현장까지 올라갔다고 하는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장치였다.
 

피렌체 두오모의 돔은 1420~143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다만 맨 위의 첨탑 부분인 랜턴까지 설계한 브루넬레스키는 이것이 올라가는 것은 보지 못한채 숨을 거뒀다. 랜턴까지 완성된 것은 1461년이었다.

두 번째는 보통 아치나 돔을 건설할 때는 맨 마지막 정상부분이 연결될 때까지는 돔이 지탱되지 않아 무너지기 때문에 받침을 설치했다가, 정상에서 연결되면 이들 받침을 제거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정이었다. 그러나 두오모의 돔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이런 받침을 도저히 쓸 수 없었다. 무지개다리를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양쪽 다리가 공중에 떠 있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난제 중의 난제였지만, 역시 브루넬레스키가 해결했다. 그는 돔의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돔의 벽체를 속이 빈 이중 구조로 설계했고, 각각의 돔을 벽돌을 이용해 쌓았는데, 이 벽돌들을 반듯하게 나란히 쌓는 것이 아니라 서로 V자 형태로 쌓게 함으로써 벽돌이 미끄러져 내리다 서로 맞물려 지탱되는 독특한 벽돌쌓기법을 개발했다. 돔 공사가 중간 쯤 올라갔을 때 피렌체 시민들은 정말로 공중에서 무너지지 않고 벽돌이 계속 올라가는지 보려고 날마다 공사현장 아래에 모여 신기하게 구경했다고 하니 당시 이런 공사는 말하자면 월드컵 경기처럼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돔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난 회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공중부벽이 없이 어떻게 첨두형 돔을 지탱하느냐의 문제였는데, 브루넬레스키는 이 전체의 돔 하단에 일종의 소켓을 만들어 끼우는 방식을 고안했다. 이 소켓이 돔을 꽉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다만 돔의 무게 때문에 소켓도 깨지거나 벌어질 수 있으므로, 이 소켓을 쇠사슬로 감아버리는 단순명료한 방법을 사용했다. 이 쇠가 얼마만큼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의 금속공예사로서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석굴암의 건설에 대해서는 두오모 돔처럼 자세한 내막은 전하지 않지만 천정돌이 갈라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두오모 돔처럼 새로운 공법의 난공사였음을 짐작케 한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돔 건설공사였지만, 지나고 보면 그다지 대단한 공법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걸작을 볼 때 너무 간단하고 쉽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다. 일단 일어난 일은 쉬워 보이지만, 그것을 실제 행하기는 애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었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석굴암의 돔을 보자. 이 돔 역시 전무후무한 설계이다. 평범한 돔처럼 보이지만 돔을 구성하는 돌들 사이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돌들이 보이는데 이것은 돌못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그냥 아치 형태를 360° 돌려도 되는데, 이것을 다시 안에서 밖으로 못을 박듯이 돌못을 끼워 더 단단하게 고정시킨 것이다. 아마도 이 석굴의 건설자들은 아치 구조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추후에 있을 지진까지 고려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돔을 건설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이렇게까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석굴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은 그 안에 모셔진 최고의 걸작 부처님과 여러 조각들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 싶은 간절한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야만의 고딕을 누르고 최고의 성당을 만들려고 했던 피렌체 사람들이나, 유한한 물질로 영원한 조각을 만들어 후세에 남기도 싶어 했던 신라의 경주 사람들이나 대담했고, 황당했으며, 무모했으나 그들은 또한 실행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 무모한 공사의 결과였을까. 석굴암 돔의 천정돌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구조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지진이 있었을 때 돔과 돌못의 무게까지 감당하기에는 구조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석굴암의 석굴이 신라인들이 그렇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들 수 있어서가 아니라 만들어야만 했기에 한번도 사용해보지 않았던 공법으로 돔을 만들었고, 그 결과 피렌체의 상징, 경주의 상징이 탄생했다. 석굴암 천정돌의 균열은 이 구조가 얼마나 새롭고 어려운 구조였는지를 반증하는 흔적이다. 이쯤 되면 경주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인 석굴암은 “아르야 아발로키떼슈바라 델 로또”(성관음의 연꽃) 아니겠는가!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53호 / 2018년 8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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