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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언제나 약자부터

기자명 최원형

인드라망 주변부는 다른 주변부의 중심이다

태풍 솔릭으로 사망에 재산피해 불구
수도권 피해 적자 기상청 예보 질타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상
다른 이 고통 공감하는 자세 아쉬워

SNS에 자동차 앞 창문에 떠억 붙은 한 마리 낙지 사진이 올라왔다. 태풍 솔릭이 제주 앞바다를 사정없이 강타하던 와중이었다. 처음엔 희화하게 느꼈는데 사진을 보다가 바다에 살고 있는 생명들 또한 태풍으로 고난의 시간을 갖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세상을 나를 중심에 놓고 내 견해로만 보다보면 주변을 살피는 일에는 인색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 사진을 보는 내 태도에서 느꼈다. 실제 태풍이 지나갈 때 바닷 속 해양생물들에게 벌어지는 일에 관한 연구가 있었다. 몸집이 큰 상어처럼 빠르게 멀리 움직일 수 있는 물고기는 태풍을 올 것을 미리 감지하고는 멀리 피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는 곳이 정해져 있고 상대적으로 빨리 움직일 수 없는 물고기나 거북, 게 같은 생물들은 태풍이 일으키는 거친 파도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그러니 그 낙지는 솔릭이 제주 앞바다에 오래 머무르며 바다를 휘젓는 동안 어쩌면 바닷속에서 튕겨져 나왔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웃음 몇 줌 던져주는 풍경이었겠으나 낙지에게는 일대사가 걸린 황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태풍 솔릭은 6년 만에 오는 태풍인지라 나라 전체가 초긴장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상공을 넓게 드리운 북태평양고기압의 영향으로 북상 속도가 늦춰지고 있었다. 거기다 거의 동시다발로 생긴 또 하나의 태풍 시마론이 영향을 미치며 솔릭은 경로를 계속 바꾸었다. 주변 상황에 따라 경로가 바뀌고 크기가 계속 달라지는 태풍을 보면서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한 생명체를 보는 듯했다. 어찌됐든 솔릭은 크지 않은 피해만 남긴 채 소멸되었다. 태풍 솔릭이 한반도로 다가올 때 긴장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던 서울 경기 지방엔 이렇다 할 태풍을 경험하지 못한 채 소멸돼버렸다.

이걸 두고 기상청 예보가 틀렸다며 끌탕을 하는 이들을 적잖이 만날 수 있었다. 솔릭이 내륙에 당도하면서 약화되어 제대로 태풍으로서 위력도 뽐내지 못하고 소멸된 건 사실이지만 그러기까지 제주와 남해안 도서지역엔 적잖은 피해를 냈다. 대부분 언론조차 서울을 중심에 두고 보도하다보니 별일 없이 소멸되었다는 뉴스를 생산했다. 비닐하우스가 부서지고 전봇대가 엿가락처럼 휘며 곁에 있는 건축물을 덮치고 동네 슈퍼 간판이 떨어져 내렸으며 과일이 낙과하고 심지어 사망 실종 사고까지 있었다. 시름에 잠긴 이들의 피해는 피해 축에도 끼지 못하는 걸까? 인드라망에서 주변부는 또 다른 주변부의 중심부이기도 하다. 주변부여서 홀대받아야할 까닭이 없다.

지난 달 29일, 서울과 경기 북부 지역에 호우경보가 발령되더니 중랑천 홍수주의보를 알리는 재난문자가 저녁 늦은 시각에 울렸다. 퇴근길에 시민들은 우산을 써도 옷이 흠뻑 젖는 걸 피하기가 어려웠다. 솔릭이 지나가자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졌다. 느닷없다는 표현은 사실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세상에 느닷없는 일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인과법칙이야 말로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인데. 올해는 40도에 육박하던 폭염이 한 달여 이어지다가 태풍을 맞이했고 이어서 폭우까지 진폭이 큰 여름을 겪는 중이다.

지난 폭염 기간에 열사병 환자를 보던 한 응급실의사가 SNS에 남겼던 글이 여전히 묵직한 화두로 내게 남아있다. 열사병으로 환자들이 응급실로 실려 오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전신이 달궈져 길에 쓰러져 있다가 실려 온 사람들 몸에서는 흡사 연기가 날 것만 같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 사람들을 보고 있어야 하냐며 부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고통에서 먼 사람들이 대신 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의 메시지는 길지 않았으나 여운은 꽤 오래 남을 것 같다. 실려 온 이들 대부분은 폐지 줍거나 일용직에 종사하는 등 하루 벌어 하루를 간신히 잇는 이들이었다. 그 의사는 이 일을 계기로 폐지 가격이 200kg에 1만원쯤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200kg이 담긴 수레를 밀어야 벌 수 있는 1만원의 무게가 그들에게는 또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러니 폭염으로 외출을 자제하고 말고 할 선택권이 그들에게는 애당초 없었다. 살기 위해 목숨이 저당 잡힌 길 위에 서야만 하는 역설이다.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생명들이 이탈된 기후변화의 최전선에서 가장 큰 피해를 온 몸으로 가격당하고 있다. 그래서 기후변화는 곧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붕괴된 기후는 생존, 생계, 존엄의 문제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인제공에서 비껴난 약자부터 재앙이 시작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언제나 약자부터라니.

태풍 제비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제비는 박씨를 물고 온다는데 이왕이면 생명을 품은 박씨였으면 좋겠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54호 / 2018년 9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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