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마지막 수도 캔디의 슬픈 역사
14. 마지막 수도 캔디의 슬픈 역사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8.09.04 13:33
  • 호수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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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0년 싱할라왕국 마지막 무대지만 불치가 있어 여전히 향기롭다

폴론나루와 시대 막 내린 후
왕실 분열로 다섯 왕조 난립
불치사리 봉안이 정통성 상징

1505년 포르투갈 갈레에 상륙
‘무역’ 내세운 유럽 이방인들
호기심 갖고 우호로 대했으나
영향력 확대되며 왕실분열 가중

1480년 내륙에 자리한 캔디왕조
불치사리 있기에 정신적 고향으로
1948년 실론으로 독립할 때까지
400년 식민지배 역사 지켜본 무대
캔디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캔디는 싱할라왕국의 마지막 수도였다. 불치사리가 이곳에 봉안되며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했지만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싱할라왕국이 막을 내린 후에도 불치사리는 캔디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세계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왕실엔 쿠데타가 난무했다. 1196년 39살에 요절한 니상카말라의 뒤를 이어 아들, 동생, 조카가 잇달아 왕좌에 올랐지만 모두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단명했다. 역사는 왕좌에 오른 여러 왕들이 ‘단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들이 모두 ‘짧은 천수’를 누렸다고는 결코 믿을 수 없다. 왕들이 잇따라 죽어나가고 급기야 세상을 뜬지 이미 10여년이나 된 대왕 파라크라마바후, 그의 왕비 릴라바티가 왕좌에 등극하기에 이른다. 싱할라왕국 역사상 두 번째 여왕이었다. 왕실의 일원이자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루후나가문 후손이었던 그녀의 통치는 잠시나마 안정을 가져왔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니상카말라의 동생, 부인 등에게 왕좌를 빼앗겼다 복귀하는 일이 수차례 반복됐다. 이 틈에 남인도 판디야, 동인도 칼링가 왕조의 후손들이 무력으로 때로는 왕위계승 자격을 내세우며 싱할라왕실을 장악했다.

요동치던 인도의 정세도 왕실의 혼란과 분열을 거들었다. 뱅골만 일대를 아우르며 남인도를 호령했던 촐라 왕국이 13세기 들어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 촐라의 약화를 틈타 남인도에서는 새로운 국가들이 세력을 확장했다. 그 가운데는 오랜 기간 싱할라왕국과 교류해온 판디야왕국도 있었다. 한때 촐라의 기세에 눌려 명맥이 잦아들었던 판디야는 13세기 들어 세력을 확장하며 촐라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 위세는 싱할라에도 미쳤다. 촐라의 침략과 왕실 내부의 극심한 혼란에 몸살을 앓으며 정통성마저 상실할 지경에 이른 싱할라왕국은 13세기 접어들며 판디야의 국왕 칼링가마가의 지배를 받게 되며 사실상 폴론나루와를 빼앗기게 된다.

180여년 간 싱할라왕국의 중심지로 찬란한 번영을 이루었던 폴론나루와를 떠나 남하하기 시작한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왕국의 중심지가 될 새로운 도시를 찾아나섰다. 이후 싱할라왕조는 폴론나루와 남서부에 위치한 담바데니아의 쿠루네갈라와 야푸하, 좀 더 남쪽인 감포라, 그리고 현재의 콜롬보 인근인 코테 등으로 수도를 이전하며 왕실의 명맥을 이어갔다.

피난길이나 다를 바 없는 유랑의 길이 200여년 가까이 이어졌음에도 여전히 왕실의 위상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불치를 받든 자 섬의 지배자’라는 스리랑카의 오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 믿음을 부여잡듯 왕실은 더욱 불교에 의지했다. 수도를 옮길 때 마다 불치사리를 함께 이운했고 가장 먼저 불치를 봉안함으로써 왕국의 정통성이 이곳에 존재함을 천명했다. 왕좌에 오른 국왕 또한 스스로가 삼장에 통달해 출가한 스님 이상의 교학과 수행을 갖추기도 했다. 흩어진 스님들을 모아 승가를 재건하고 틈틈이 불사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이시기 싱할라왕조는 ‘불교왕조’라는 뜻의 ‘스리 상가 보’로 불리기도 했다.

1412년 코테가 새로운 수도를 정해진 이후에도 왕실의 혼란은 계속됐다. 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분열된 코테의 왕실은 다섯 개의 소왕조(자프나, 캔디, 코테, 시타카와, 라이가마)로 갈라졌다. 해안가에는 독자적인 세력들도 난립했다.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며 1480년에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한 도시 캔디에 중심을 둔 캔디왕조가 등장했다.
 

불치사리를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여기는 스리랑카불자들의 굳건한 신심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불치사를 순례한 불자들이 꽃을 공양하며 불치사리에 예경 올리고 있다.

하지만 더 큰 위협은 밖으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1505년 섬의 남쪽 작은 항구 갈레에 포르투갈의 함대가 상륙했다. 멀리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반도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던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동쪽으로의 육로를 대신할 새로운 무역로의 확보가 절실했다. 동쪽, 특히 인도와 중국으로의 무역로를 찾아 바닷길 개척을 결심한 포르투갈은 동남쪽으로의 항해를 단행한다.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포르투갈 함대의 사령관 바스코 다가마는 1498년 마침내 아프리카의 남쪽 끝 ‘희망봉’에 닿았다. 아시아로 이어지는 새로운 무역로의 발견이었다. 이후 포르투갈은 이 바닷길을 이용해 동쪽으로의 진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1505년 인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던 스리랑카의 남쪽 해안가 ‘갈레’에 함대를 상륙시킨다.

스리랑카 진출 초기 포르투갈은 갈레에 성을 쌓고 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갈레에 근거지를 마련한 포르투갈은 초기에 무역을 희망하며 싱할라왕조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왕실의 내분을 간파한 후에는 특정 왕조나 세력에 결탁하거나 공격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포르투갈 등장 초기 싱할라왕국은 이 이방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포르투갈인들을 묘사한 ‘경주하는(말을 타는) 사람’ ‘부츠를 신고 철모자를 쓰고 하얀 돌(빵)을 먹고 피(와인)를 마시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는 포르투갈인들이 보여주는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싱할리들의 두려움없는 호기심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왕국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후추 등 향신료 무역은 이를 독점하던 왕실에도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다. 그렇기에 무역을 원한다는 포르투갈인들은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여겨졌다. 하지만 허약한 왕실의 분열을 파고든 포르투갈은 왕조간의 대립을 부추기며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왕실인사를 왕좌에 앉히는 등 점차 지배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본색을 드러낸 포르투갈은 1543년 프란시스카 수도회 신부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해 싱할리들에게 개종을 강요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등 본격적인 지배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남부 시타카와왕조의 라자싱하 1세는 1589년 포르투갈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완전한 패배였다. 결국 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시타카와왕조는 막을 내렸고 포르투갈은 내륙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등장이 싱할라왕국 존망 자체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다. 16세기 후반 코테왕조의 마지막 국왕 다르마팔라는 포르투갈의 군사력에 의지해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하는데 이용했다. 동시에 그는 불치사의 관리권을 포르투갈에 넘겨주는 등 불교를 박해한 전대미문의 국왕으로 손꼽혔다. 포르투갈의 호감을 사기 위해 가톨릭에 우월한 특권을 부여했고, 국왕 스스로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일도 벌어졌다.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미친 지역은 섬 전체의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국왕의 묵인 속에 벌어진 포르투갈의 불교탄압은 엄청난 살육과 파괴를 불러왔다. 무엇보다 불치사리가 싱할라왕국의 구심점임을 눈치 챈 포르투갈인들은 불치를 빼앗아 부수려했다. 하지만 스님들은 불치사리를 라트나푸라지역의 델가무와사원에 숨기고 포르투갈에게는 가짜 불치를 내어줌으로써 무사히 불치사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인들 사이에서 영웅담처럼 전해지고 있다. 델가무와사원에 숨겨져 있던 불치사리는 1593년 캔디왕조의 국왕 위말라다르마수리야1세에게 전해진다. 캔디에는 싱할라왕국의 수도라는, 위말라다르마수리야에게는 싱할라왕국의 계승자라는 정통성을 부여하는 계기였다. 포르투갈의 지배력이 확장되면서 이미 실질적인 지배권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불치사리를 모시고 있는 왕이 이 섬의 온전한 지배자라는 믿음이 여전히 확고했다.
 

스리랑카 역사화는 불치사리가 이곳 캔디에 전해진 과정을 상세하게 다루고있다. 포르투갈의 박해를 피해 숨겨져있던 불치사리는 1593년 이곳 캔디에 봉안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주로 남서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중부 내륙에 위치한 캔디가 포르투갈의 영향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와도 관련이 크다.

포르투갈의 세력 확장 속에서도 캔디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기회를 노리던 캔디왕조는 포르투갈을 몰아내기 위해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끌어들였다.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외세에 의존한 싱할라왕국의 운명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1640년 포르투갈을 무찌른 네덜란드는 새로운 식민지배자일 뿐이었다. 네덜란드의 불교탄압 역시 포르투갈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포르투갈이 무력을 앞세웠다면 네덜란드는 교육과 사법이라는 제도의 틀을 이용해 불교탄압을 보다 치밀하게 자행했다는 정도였다. 출생부터 교육, 결혼, 직업까지 국민들의 모든 일상에 필요한 행정이 교회를 거쳐야만 가능했다.

1796년 영국이 또다시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섬을 지배하기 시작해 1948년 실론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할 때까지 캔디는 400여년 이어진 외세의 침략을 지켜본 슬픈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혼란을 모른다면 캔디는 그 이름만으로도 달콤하게까지 느껴지는 도시다. 그만큼 아름답고 평화롭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지금까지도 불치사리가 봉안돼 있다. 캔디가 스리랑카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불리는 가장 큰 이유 또한 불치사리 때문이다.

캔디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캔디왕조는 ‘센카다갈라 라자다니야’ ‘칸다 우다라타’ ‘마하누와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포르투갈인들이 이를 줄여 ‘칸디아’로 불리며 유럽에 알려졌다. 이에 비해 싱할리들은 위대한 도시라는 의미의 ‘마하누와라’로 즐겨 불렀다.

오늘날 스리랑카의 수도이자 경제의 중심지인 콜롬보에 비해 고지대에 위치한 캔디는 기온이 낮고 쾌적해 스리랑카 부자들 사이에서 별장지로 인기가 높다. 무엇보다 차와 향신료 농사에 최적의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어 부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캔디를 찾는 이유는 불치사리 때문이다. 스리 달라다 말라가와. 불치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캔디의 이 사원은 이제 스리랑카뿐 아니라 전 세계 불자들의 성지, 마음의 고향이 되어 달콤한 법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54호 / 2018년 9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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