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향한 분노‧혐오 줄일 때 붓다의 ‘참말’ 나와
상대를 향한 분노‧혐오 줄일 때 붓다의 ‘참말’ 나와
  • 허우성
  • 승인 2018.09.04 13:53
  • 호수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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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 한국사회의 거친말, 거짓말의 원인과 불교적 대안

현대 시민들 오온과잉 상태
욕망‧분노는 애‧불애로 분별
분별은 배제‧공격의 시작점
자기개조로 분별심 줄일 때
공동체 속에 자유‧평화 생겨

민주사회, 오온과잉 중생 모여
부정적 감정·언어 폭력 상존
과잉 낮추면 성숙한 사회 가능
허우성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오온과잉의 중생들이 모여 사는 공간으로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언어폭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며 “그러나 구성원들이 오온과잉의 정도를 낮추면 보다 더 성숙한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허우성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오온과잉의 중생들이 모여 사는 공간으로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언어폭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며 “그러나 구성원들이 오온과잉의 정도를 낮추면 보다 더 성숙한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우리는 격동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 현대사에 이보다 극적인 상황 전개가 있었던가. 격동기는 우리를 희망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우리는 이 순간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지난 1∼2년 동안 일어난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격변은 진영에 따라 상반된 감정을 낳았다. 한 편이 승리감, 자부심, 아름다움과 환희를 구가하는 동안, 다른 편은 후회, 분노, 공포, 절망감을 느끼면서 원한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인터넷 공간에는 상대편에 대한 증오, 모욕과 혐오가 난무한다. 이런 격동기에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의 참말”에 대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거친 풍랑 앞에 차라리 묵언 수행으로 세상을 조용히 관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초기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든 스스로 심신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움직임에 개입해서 그것을 조절할 수 있고, 이와 같이 관찰하고 조절하는 능력에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즉 붓다는 지각, 신체의 떨림, 정동, 감정과 느낌을 잘 관찰하면 거기에서 열반(nibbāna)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붓다는 심신의 한 과정이 다른 과정의 조건이 된다는 것, 그 과정들이 한 개인의 마음에 의존하고, 그 마음에서 산출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과정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연기론이다. 그래서 지각에서 생각,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수시로 개입하는 불선(不善, akusala)의 신구의 삼업을 고쳐서, 평안(santi)과 열반에 이르게 하고자비행을 행하게 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 목표였다. 이를 성취하면 아라한, 무니, 붓다, 여래라는 인격이
될 것이고, 그들의 말은 참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중생은 변함없이 오온과잉이고,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종종 나쁜 말이고, 그 말에 정동과 부정적인 감정이 동반되기가 일쑤다.

중생은 오온과잉이다. 정의로운 전쟁을 했든, 촛불혁명을 했든, 행위자가 오온과잉이었다면 전부 중생의 행위다. 오늘날의 시민 중생은 아라한에 가까운가, 악마에 더 가까운가? 대답은 우리가 느끼는 욕망과 분노의 강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대승기신론’과 원효에 따르면 그렇다. 원효 등이 말하는 장식(藏識)에 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이 바로 그것이다. 무명업상이란 무명(또는 不覺)에 의해 생겨난 업상이란 뜻이다. 업상의 대표적인 사례는 욕망과 분노이다. 욕망과 분노는 앞서 언급했던 애·불애 곧 아진(我塵)분별로 이어지고, 이런 분별은 집착과 혐오, 배제와 공격의 시발점이다.

욕망과 분노, 집착과 혐오는 세상의 모든 중생계에 늘 존재해왔다. ‘소연경(小緣經)’이 그걸 잘 말해준다. 이 경에 따르면, 중생은 십악을 범한다. 십악에는 살생, 도둑질, 음란, 기망, 양설, 악구, 기어, 간탐, 질투, 사견이 들어 있다. 기망은 속이는 일이고, 양설은 양쪽에 다니면서 이간질하는 일이고, 악구는 욕설하는 것이다. 기어는 진실 없이 교묘하게 표현된 말이고, 간탐은 인색하고 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악구, 기어, 양설은 나쁜 말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공감 조작, 여론조작이나 댓글조작은 기망이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포털의 수익 창출은 기망이면서 간탐이다. 십악은 결국 오온과잉, 욕진, 애·불애, 아진분별, 집착과 혐오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말이 애·불애, 아진 분별에 근거한다면, 말은 욕설이 되기 전에 이미 폭력적이다. 비핵화와 평화과정을 둘러싸고 남한에서 찬반양론자들이 주고받는 말은 상대방에게 비수가 되기 쉽다. 최저임금 제도를 두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격렬한 적개심, 전율의 공포, 심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초기경전에 수시로 발화(發話)를 멈추는 사마디 수행이 강조된다. ‘상응부경전’IV 217에서 오온의 하나인 행이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붓다는 사마디의 아홉 단계에서 어떤 행이 멈추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1단계에서는 발화(vācā)가 멈추고, 2단계에선 생각(尋究, vitakka)과 추론(伺, vicāra)이 멈춘다고 한다. 마지막 9단계 상수멸(想受滅)에 이르기까지, 멈춰야 할 모든 작용이 여기에서는 행이다. 행이 줄어들면 오온의 다른 부분도 대개는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말이나 언론 없이, 그리고 정보전달 없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오온과잉의 중생들이 모여 사는 공간,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언어폭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보인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악성댓글, 여론조작도 견뎌야 한다. 이것이 과잉 오온체로 구성된 시민 중생사회의 운명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잉의 정도가 낮춰지면, 십악은 좀 줄고, 더 성숙한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 비전 이외에 무슨 다른 비전이 있을까?

거의 모든 지각에 필링 톤(feeling tone)이 따라오다가, 그 톤이 더욱 강해지면, 기쁨, 슬픔, 분노, 혐오, 수치와 경멸 등으로 특정된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사회적 감정 아래에 있는 배경감정이 우리 사회에는 좀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감정을 배경감정, 일차적 감정(또는 기초 감정), 사회적 감정으로 나누고 있다. 배경감정이란 무엇인가? 일차적 감정이나 사회적 감정 아래에 있으면서 그것들에 영향을 준다. 다마지오는 일차적 감정에 두려움, 분노, 혐오, 놀람, 슬픔, 행복을 포함시키고, 사회적 감정에는 동정, 당혹감, 수치, 가책, 긍지, 질투, 부러움, 감사, 존경, 의분, 경멸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는 배경감정의 사례로서 어떤 사람에게 감지되는 에너지나 열광, 흥분, 까칠함, 고요함을 예시하고 있다. 팔다리 움직임과 관련해서는 강렬한 움직임, 정확하고 빈번한 움직임도 배경감정의 표출이고, 얼굴 표정, 목소리의 음조와 운율도 배경감정의 표현으로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마지오의 포개기 원리(nesting principle)에 따르면, 이러한 배경감정 위에 일차적 감정과 사회적 감정이 포개진다.

필자의 가설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배경감정이 강하고, 이것이 분노, 질투 등의 일차적, 사회적 감정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거나 표출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이내믹 코리아, 하나된 열정(one passion), 하나의 한국(one Korea)이라는 정치적 구호는 배경감정이 일상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구호이거나, 그것을 강화하는 구호로 보인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분출된 열정과 열광, 수많은 사람이 운집한 촛불집회도 이런 사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배경감정의 강렬함은 한국 텔레비전 뉴스담당 앵커의 높은 어조(tone)로도 표출된다. 일본의 NHK뉴스 앵커에 비해서 KBS뉴스 앵커는 톤이 높다. KBS보다는 SBS, 그보다는 종편, 아마 북한 방송 앵커의 어조가 가장 높을 것이다. 남한 방송은 정치적 의도 이외에도 시청률 제고라는 상업적 의도가, 북한 방송은 장기간에 걸친 혁명 수행과 공화국 방어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강한 배경감정은 우리 문화의 일부여서, 드라마와 영화에도 드러나는 것 같다.

강한 열정의 일시적인 분출은 국난을 극복하게 하고, 혁명이나 격변을 가능케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열정만으로는 국난이 닥쳐오기 전 항구적인 대책을 냉정하게 강구하지는 못하므로, 열정은 양날의 칼처럼 보인다.

배경감정에서처럼, 한국인의 오온은 일본인의 오온에 비해 과잉의 정도가 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국인이나 미국인과의 비교는 어떨까?

일본인 사회학자 이토 마모루(伊藤守, 1954~ )는 자신의 ‘정동의 힘’한국어판 지은이 서문에서, 인터넷 사회의 도래에 따른 연대, 절단, 증오의 확장이 일본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 진행 중인 한국의 정치적 대변화도 그런 사례에 속한다고 볼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소리와 이미지, 그것들로 촉발되는 정동, 감정, 느낌이 너무 세고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전달방식과 우리의 인식에는 감정적인 차원이 차고 넘친다. 정치적인 공간, 비정치적인 공간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악마’와 장애물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듯하다.

우리는 스스로 오온과잉의 존재로서, 유사한 오온체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 공감하며 모방하는 존재이다. 공감과 모방의 내용에는 물론 집착과 혐오도 포함된다. 오온 정상화는 여러 겁 동안 자신의 심신에 쌓아온 적폐를 청산한 아라한만이 성취할 수 있는 목표로서, 세속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민주주의란 오온과잉인 시민 중생 다수로 하여금 정치적 목표와 절차를 선택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말만 아니라 나쁜 말과 거짓말도 하고, 분노와 혐오를 비롯해서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을 모방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붓다에 따르면, 참말의 핵심 조건은 오온 정상화이다. 이 글은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글도 아니고 아라한을 위한 글도 아니다. 일반 시민 중생에게 할 말은 없지만, 불교를 조금이나마 실천하려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당부 사항이 있다.

첫째, 붓다를 모방해서 오온의 크기를 다소 줄여보라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자기개조의 길이다. 둘째, 오온을 좀 줄여서 동지가 아니라 ‘적’을 일부나마 모방하도록 애써보는 일이다. 이는 창조적인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중동을 주로 읽는 사람은 수시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한겨레나 경향신문의 독자는 조중동을 가끔 읽어보는 일이다. 상대에 대한 분노나 혐오를 좀 줄이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보다는 선불선(kusala, akusala)의 태도가 유리할 것이다. 공동체 전체의 구원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허우성경희대 비폭력연구소장
허우성
경희대 비폭력연구소장

먼저 부처님을 모방해서 오온과잉의 정도를 좀 줄이고 ‘적’을 모방 하다보면, 자유민주주의는 좀 더 성숙해지고 한반도에서 자유, 사회 정의, 평화가 꽃필까? 정치적으로 다른 진영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것 이외에 다른 무슨 대안이 있을까? 그 믿음이 아무리 변덕스러운 기쁨을 준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면 부처님을 모방함은 공동체의 정치적인 향상과는 별로 관계가 없고, 단순히 수년 뒤 청산할 적폐를 좀 줄여주는 정도에 불과할까? 아! 그런데 여기에서 하는 이 말은 얼마나 참된 것일까?

 

[1454호 / 2018년 9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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