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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치열하게 사유한 매혹적 선의 세계

  • 불서
  • 입력 2018.09.17 11:19
  • 수정 2018.09.17 11:21
  • 호수 1456
  • 댓글 1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 이진경 지음 / 모과나무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선가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추구한다. 말이나 문자 이외에 체험에 의해서 별도로 전해지는 것이 바로 선의 진수이므로 오직 좌선에 의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바로 들어가라는 선가의 지침과도 같은 말이다. 수행자들 중에는 이를 ‘불교의 진수는 어떠한 경전의 문구에도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전가의 보도처럼 신봉하며 “오로지 앉아 있는 것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직관하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 또한 문자를 통하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할 방법이 있을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망설이다 세간으로 다가갔듯이, 깨달은 선지식들 역시 자비심을 내어 상대방의 근기나 상태에 맞추어 적절한 말을 통해 가르침을 폈다. 부처님이 깨달은 이래 말과 문자를 통하지 않고 전해진 가르침은 없었다는 말이다. 다만, 불교에서 사용되는 모든 개념들은 어떤 조건에서 무엇을 하고자 말했던 것일까를 자세하게 보지 않을 경우 오해의 소지가 적지 않다. 특정한 조건에서 행해진 언어적 방편이기에, 조건이 달라지면 맞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또한 이러한 것까지 고려한 가르침인 것이다.

하지만 의정이 일어나도록 빈번하게 학인을 불러 묻고 답하는 가르침이 과거지사가 되면서, 간화선이 간(看) 없는 화두선이고 위빠사나 없는 사마타 수행이라고 비판받는 시대에 이른 지금, 문자나 언어에 의한 가르침을 통하지 않고 깨달음의 현묘한 경계를 곧바로 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당송시대 언어가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 맞는 언어로 옛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풀어내고 있다.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도 “선사들의 언행을 들어 하고 싶은 것은 선이 갖는 매혹의 힘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 매혹의 이유를 살짝이나마 드러내어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 매혹의 힘에 좀 더 쉽게 말려들게 하고 싶다. 이를 통해 선승들이, 아니 부처가 가르치고자 한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도록 촉발하고 싶다”는 저자의 바람에서 시작됐다.

저자 이진경은 치열하게 선불교를 사유했다. 철학자의 눈으로 본 불법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깨달은 것은 선의 언행이 당송시대의 케케묵은 화석이 아니라, 지금 21세기 연기적 조건에서 다시 힘을 얻고 작동하게 되는 위대한 경험이었다.
 

저자는 ‘선사들은 왜 이리 과격한가’라고 묻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자신만의 사유로 풀어내기도 했다. 그림은 선사들의 다소 과격하지만 결연한 수행의지를 표현한 고윤숙 화가의 ‘백척간두’.

그래서 저자는 “고양이나 로봇이 깨달음을 얻어 불법을 설하는 곳에서 그들의 불성을 찾아선 안 되고, 그저 짖기만 하는 개는 부처가 아니라 로봇”이라며 변화된 조건에 맞추어 자신을 바꿀 수 있어야 불성이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선에 대한 치열한 사유의 기록을 담은 책을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으로 이름 붙인 이유다.

이에 따라 저자는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이나 말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벽암록’과 다른 선어록에 나오는 공안들을 적절히 선별했다.

“공안으로 전해오는 선사들의 언행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타당한 일반적인 가르침의 말씀이 아니다. 만나는 학인들의 그때마다 다른 상태를 포착해 그의 식견을 깨주기에 적합한 언행을 날리는 것”이라고 설명한 저자는 “누구에게나 던지는 항상 올바른 대답은 누구의 식견도 깨주지 못한다.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이 했던 말조차 사구(死句)라는 생각에 뒤엎고 깨부수고 하지 않았던가”라며 자신의 사유로 자신만의 답을 구하는 경험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 참선하고 앉아 있던 마조에게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며 기와를 갈아 보이는 것으로 고정된 틀을 깨게 했던 남악처럼 말이다.

오늘날 책으로 전해지는 선승들의 멋지고 다채로운 언행은 그것을 읽고 사유하며 자신의 사유나 감각과 대결해서 도를 찾고 좋은 삶의 길을 찾는 이들의 것이다. 따라서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은 옛 선지식들이 했던 언행의 힘이 21세기라는 지금의 연기적 조건에서 다시 힘을 얻고 작동하게 되는 사건이 되기에 충분하다.

당송시대로 돌아가 그때의 언어로 과거의 전통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 지금의 언어와 섞여 새로운 언행을 만들어내며 재탄생했기 때문이다. 1만8000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456호 / 2018년 9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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