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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즈키선-상

기자명 장은화

"선이란 직관적 사고에 의해 구속 벗어나는 것”

스즈키선은 특정 종교사상과 무관
교리·의식·제도 멀리한 순수체험

특정사찰·예배형식 결부돼 있지만
이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일뿐

스즈키와 철학자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선불교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스즈키의 저서를 읽고
스즈키와 철학자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선불교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스즈키의 저서를 읽고 "그를 정확하게 이해했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 사람이 다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스즈키는 아시아의 선을 어떤 식으로 서양에 소개하여 서양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스즈키의 선 서적들은 널리 읽혔고 또 주요 사상가들에 의해 주석도 많이 산출되었다. 그중 두드러진 사례는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스즈키의 ‘선불교 입문’(An Introduction to Zen Buddhism, 1934)에 쓴 30쪽짜리 서문인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스즈키의 선불교 저작들은 살아있는 불교를 알게 해주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으니, 저자에게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스즈키는 첫째로 선을 서양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더 가까이 가져다주었고, 둘째로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오늘날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 같은 선불교 학자는 스즈키의 독특한 선 철학을 ‘스즈키선(Suzuki-Ze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전통적인 선과 구별하고 있다. 스즈키는 ‘선과 일본문화’ (Zen and Japanese Culture, 1959)에서 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선에는 개념과 지적인 방식을 가진 그 어떤 특별한 교리나 철학도 없고, 단지 선은 사람들을 생사의 속박에서 풀어주려는 것이고, 그것도 특이한 직관적 이해방식에 의해서 그렇게 할 뿐이다. 따라서 선은 그 직관적 가르침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한, 거의 어떤 철학과 도덕 교리와도 부합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유연하다. 선은 무정부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무신론이나 이상주의 혹은 그 어떤 정치·경제적 독단주의와도 맺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스즈키에 따르면 선이란 이처럼 특정한 종교적 교리, 정치, 사상과 무관하며, 선의 목적은 분석이나 사유를 통하지 않고 오로지 직관적 사고에 의해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또한 선은 종교도, 의식도, 제도도 아니며, 모든 종교의 바탕에 놓인 직접 체험이라는 것이다. 로버트 샤프는 스즈키가 주장하는 매개되지 않은 직접 체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스즈키는 자신의 수많은 글에서 선은 모든 교리, 의식, 제도를 멀리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선이란 순수체험 그 자체로서, 모든 진정한 종교의 가르침 이면에 놓인 체험적 본질이다. 선은 물론 특정한 사찰, 예배형식, 그리고 문헌과 예술과 결부되어 있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달이란 주객(主客)의, 즉 관찰자-피관찰자의 이원성을 초월해 있는 절대에 대한 직접 체험이다.

샤프에 의하면 스즈키는 선이 지니고 있는 종교로서의 측면,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제도로서의 측면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선을 단지 ‘순수체험 그 자체’와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즈키는 선의 의미를 극도로 단순화시켜서 환원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선 해석은 스즈키의 뒤를 이어서 오늘날 아베 마사오(阿部正雄, 1915~2006) 그리고 스즈키의 친구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 등에 의해 설립된 교토학파에서 주창되기도 하는데, 포르에 의하면 교토학파는 스즈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서 스즈키선을 일본철학의 방법과 표현으로써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구에서는 선이 불교의 한 종파로서의 특징이 무시되고 그 역사와도 무관한, 오로지 인식적 의미가 있는 전통으로서 널리 이해되기도 했다. 선에 대한 스즈키의 근대화된 견해는 서구의 사상가와 지식인에 의해 대체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인들은 스즈키선의 영향을 받아 선에 매료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아시아 영성에 대한 동경 및 명상수련을 통해 깨달음 체험을 얻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샤프는 주장한다.

한편 미국의 종교학교수 맥마한(David L. McMahan)은 스즈키가 “아마도 선을 서양에 맞게 재포장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스즈키는 종교로서의 선불교로부터 선의 진수를 추론해내고자 했던 소엔의 시도를 더욱 진척시켰다. 스즈키가 소개한 선은 실재와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순수체험이며 그 실재와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불교의 속성이 아니다. 스즈키에게 선의 진수란 그가 다른 종교전통에도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신비주의였다.

로버트 샤프가 스즈키의 선 순수체험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면, 맥마한은 이러한 순수체험이 신비주의의 한 형태라고 내세우면서 스즈키가 선을 보편적 신비주의로 재포장해서 전파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을 매료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맥마한의 말뜻은 보편적 신비주의로 서양에 소개된 스즈키선이 바로 서양에서 갈구하고 있던 종교적 보편주의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서양인에게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종교적 보편주의란 서양인들이 세계의 여러 종교들과 그들의 상충하는 진리 주장 사이에서 서로 공통되는 영적 기반을 찾으려는 시도였는데, 이러한 보편주의의 욕구가 높아진 것은 20세기에 들어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의 퇴조와도 관련이 있다.

문화상대주의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고 어떤 문화적 입장도 그 나름대로 옳다는 입장을 취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진리라는 것은 사실상 보편적이라고 볼 수 없으며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요소들의 산물일 뿐이다. 문화에 대한 상대적 가치관이 지배적일 때는 특정 문화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만 있을 뿐 보편적 진리에 대한 확신은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는 이처럼 억압당했던 보편적 진리 추구에 대한 욕구가 분출되면서 문화상대주의는 퇴조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 카를 융,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63-1902)와 같은 사상가들은 세계종교들의 유사점을 찾아보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궁극적 실재로 인도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양으로 하여금 아시아의 종교들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 근원적인 동기가 되었고, 또한 이런 보편성의 추구는 서양에서 출현하고 있는 기독교 선 혹은 유대교 선 등 혼합적 형태의 선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고 맥마한은 주장하고 있다.

장은화 선학박사·전문번역가 ehj001@naver.com

 

[1456호 / 2018년 9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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