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3. 한 남자의 사랑한다고 말하기

기자명 김정빈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족에게 불편한 감정 있어도
먼저 할 수 있는 말은 ‘사랑해’

현대사회서 많이 사용되지만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 많아

어색한 마음 누르고 말해보면
먼 훗날 후회하는 일 없게 돼

그림=근호

한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어떤 사람에게는 하기 쉽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하기 어려운 내용의 과제를 냈다. 과제의 내용은 이랬다.

‘다음 일주일 동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 단, 그 사람은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거나 오랫동안 그런 적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2주일 후, 과제를 점검하는 시간에 강사는 수강생들에게 과제를 수행한 결과를 발표하라고 말했다. 그는 첫 발표자가 여성일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키가 190cm쯤 되는 건장한 남자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강사님이 과제를 냈을 때 나는 약간 화가 났습니다. 나는 딱히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한다는 따위의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성격도 아니거든요. 사람이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동안에 과제 생각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더군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동안에 문득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이어서 나는 인간으로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나는 내가족을 끔찍이 아낍니다. 나는 내가 그들에게 꼭 해야만 하는 책임은 다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는데 그분은 바로 나의 아버지입니다. 나의 책임 범주에 아버지는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가족에 대해 충실하게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관련된 즐거운 추억을 거의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가족들에게 책임을 다하려 애쓰는 것은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나는 아버지와 어떤 일로 크게 다투었는데,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나의 감정은 꽤 부정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양심은 내 마음 속에 아버지를 불러들였습니다. 양심이 불러낸 아버지는 구부정한 허리에 머리털이 허연 모습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당당한 아버지가 아니라 늙고 초라해진 모습의 아버지. 문득 아버지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과제의 대상이 아버지라는 확신을 느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들어 있는 아내를 흔들어 깨운 다음 내 생각을 말했습니다. 아내는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즉각 알아챘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아내는 나를 품에 안아주며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나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라고 말했고, 나는 좀 어색하긴 했지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커피잔을 앞에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나는 내 마음이 비 온 뒤의 하늘처럼 맑고 환하게 개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의 표정 또한 아침 햇살이 비치기라도 한 듯 밝았습니다. 나는 약간 흥분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고 그러다 보니 숙면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나는 다른 날보다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이 거사를 하는 날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습니다. 출근한 다음 오전 일을 마치고 나서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에게 나는 ‘아버지! 퇴근길에 잠깐 댁에 들려도 될까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무거운 말투로 아버지가 승낙하셨습니다.

아버지 댁에 도착한 것은 오후 일곱 시 반 무렵이었습니다. 초인종을 누르면서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문을 여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져 아버지가 문을 여셨고, 나는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주름살이 활짝 펴지는 다음 순간, 아버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습니다. 아버지는 두 팔을 뻗어 나를 와락 껴안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그런데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말하고 있지 않니?’ 아버지는 농담을 섞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사님! 나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린 지 이틀 뒤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병실에 누워 계십니다. 아버지가 언제 깨어나실지 또는 깨어나지 못하실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아버지에게 백번 천번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려도 아버지는 듣지 못하신다는 것, 나에게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말씀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약간의 미움과 불편한 감정이 있다고 해도 가족에게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당신은 오늘 그 말을 하지 못했다가 평생을 두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말한다. 자비는 사랑을 의미하는 ‘자(慈)’와 동정을 의미하는 ‘비(悲)’가 결합한 말이며, 이중 ‘자’를 의미하는 팔리어는 메타(metta)이다. 하지만 메타의 본래 의미는 영어의 러브(love)와는 약간 다르다. 메타는 ‘사랑’보다는 ‘친절’이라는 말로 옮기는 것이 적당한, 넓은 의미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동북아 전통에도 영어의 ‘러브’에 해당하는 용어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춘향이를 향해 부르는 이 도령의 ‘사랑가’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근대의 산물이며, 고대 동북아 전통에서는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 대신 연모(戀慕), 즉 ‘그리움’이라는 말이 주로 쓰였었다.

현대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져서 거의 모든 가요가 사랑을 노래한다. 그런 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전보다는 쉬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로는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차마 이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 떼기는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점점 하기 쉬워진다. 어색한 마음을 잠깐 누르고 사랑한다고 말해보자.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57호 / 2018년 9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