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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장 화범 스님

“모두가 보살의 동체대비심 가질 때 불국정토 열립니다”

사바세계 영원한가 아닌가 등
제자들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부처님 아무런 응답없이 침묵
논쟁만 생길 뿐 도움되지 않아

중도는 수학에서 ‘0’의 개념
플러스·마이너스 아닌 의미
양극단 치우치지 않는 경지

“죽음처럼 위대한 창조 없다”
스티브 잡스 말은 ‘생사불이’
생사불이 알면 불교이해 가능

화범 스님은 “부처님 지혜와 자비광명을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보살의 동체대비심”이라며 “중생을 사랑하라는 것이 화엄법계에서 강조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화범 스님은 “부처님 지혜와 자비광명을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보살의 동체대비심”이라며 “중생을 사랑하라는 것이 화엄법계에서 강조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부처님 당시 형이상학적인 질문만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우주법계는 과연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육체를 떠난 영혼은 영원불멸한가, 불멸하지 않은가? 또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궁금하십니까? 생활인으로 살아갈 때에는 앞뒤좌우 없이 바쁘게만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에 와서 이런 생각을 한번 쯤은 해보셔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수행과 깨달음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원하다고도 할 수도 있고 영원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끝없는 논쟁만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부처님께서는 몰라서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응답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화엄법계 우주관, 다시 말해 이사무애, 사사무애, 원융무애, 중중무진법계에 대해서 말을 해봐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답을 유보하신 것입니다. 대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삼라만상 두두물물 저 광활한 우주법계는 모두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살았을 때는 신 중심의 세상이었습니다. 신법 위주의 사회에서 형이상학적 접근은 창조주를 정당화하는 논리였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면 이단으로 쫓겨날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신 중심의 종교들은 형이상학적 질문에서 신에 꽉 막힙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한 말씀으로 존재의 실상에 대해 정의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가 100조라고 한다면, 그 세포는 다시 200조, 300조로 쪼개어집니다. 그 작은 세포가 모두 작은 소우주입니다. 지금도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진리가 되었건 보현문수의 진리가 되었건 소크라테스의 진리가 되었건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한 마디로 갈파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하는 그 자체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젊음과 아름다움이 영원토록 유지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계속 변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간적으로 변하는 것뿐만 아닙니다. 공간적으로도 ‘나’라는 개체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여러분 속에 제가 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족공동체 중에서 내가 규정되어지고 사회 공동체에서 내가 규정되어지고 세계 공동체에서 내가 규정되어집니다.

가족을 떠나서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성입니다. 오직 연기적 관계론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50만 마리의 초식동물이 먹고사는 초원이 있다고 합시다. 거기에는 초식동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동물이 살아갑니다. 주변에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사자, 표범들이 있습니다. 이 동물들은 초식동물을 잡아먹어야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동물이 없다면 초식동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고 그 동물들은 다시 먹고살 풀이 없어서 생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식동물이 있고 그것이 자연생태계의 생존양식입니다. 이것이 연기적 관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양변에 치우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고행주의도 쾌락주의도 아닌 중도입니다. 중도는 수학의 0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0을 제로라고 합니다. 제로는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닙니다. 그것을 한문으로는 불이(不二)라고 옮깁니다. 불이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둘이 아니라는 말이고, 둘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생로병사는 동시동작입니다. 죽으니까 태어나고 태어나니 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시고 해인삼매에 들어가서 지금 천문학에서 이야기하는, 현대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삼천대천 세계를 보신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에 대한 표현입니다. 은하계에는 태양계가 수천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은하의 1000개가 모인 것이 소천세계입니다. 다시 소천세계 1000개가 모인 것이 중천세계, 중천세계 1000개가 모인 것이 대천세계,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로 우주가 구성 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우주가 어떻게 존재를 하는가? 여기서 관계성을 이야기를 하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소천세계에도 동서남북이 있는데 우리는 남선부주에 살고 있습니다. 그 우주의 바다를 ‘화장찰해(華藏刹海)’라고 하는데 그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그 꼭대기에 천상세계가 있고 중간에 인간계가 있고 아래에는 지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앙을 표시하는 컬러를 황색이라고 하고 황천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여기로 간다고 합니다. 중앙에는 비로자나법신불이 있습니다. 그 세계로 가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죽으면 구천세계를 떠도는 49일 동안 업에 따라 육도윤회를 합니다. 그 시기에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49재입니다.

그래서 삼천대천 세계입니다. 이것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모두 변화합니다. 오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인드라망(因陀羅網)’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우주는 거대한 그물로 되어 있는데 그 그물코마다 투명한 보주가 달려있습니다. 그 보주 속에는 또 다른 보주가 들어있고 그 보주 속에는 또 다른 보주가 들어있어서 보주라고 하는 작은 작은 구슬 속에 수많은 보주가 들어있는 것을 중중무진법계(重重無盡法界)라고 하셨습니다. 거듭 거듭 겹쳐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작도 끝도 없는 마니보주 속에 수많은 우주공간이 있다, ‘그물코’라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 스님께서는 제자들이 화엄법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니까 방을 하나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방에 거울을 설치하고, 제일 앞에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그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시지만 또 다른 공간에 비춰진 수많은 공간을 통해 수많은 우주가 중중 첩첩으로 겹쳐서 중중무진법계, 찰찰미진수(刹刹微塵數)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하니까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수많은 우주공간은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는 비로자나, 진리 그 당체로부터 온 것입니다. 비로자나의 작용이 원만보신 노사나불, 백억화신 석가모니불, 구품도사 아미타불, 당래화생 미륵존불, 시방삼세 일체제불, 제존보살 마하살로 펼쳐지기 때문에 마하반야바라밀, 우주법계 충만한 수없는 모든 부처님과 수없는 보살, 수 없는 중생을 전부 교화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보살의 정신입니다.

스마트폰을 처음 만든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가 참선하면서 ‘화엄경’의 대목을 보고 거대한 우주를 손바닥에 넣을 수는 없을까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스마트폰을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지만 50대 중반에 췌장암에 걸렸습니다. 미국의 뛰어난 의학이 이 사람을 수술하면 살릴 수 있다고 했지만 그는 수술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소신을 밝히며 죽었습니다. ‘애플’의 모든 경영권을 동료들에게 넘겼습니다. 그가 죽기 전 한 이야기는 오늘날 모든 사람이 명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위대한 창조물이 있다면, ‘죽음’처럼 위대한 창조물은 없다.” 생사불이(生死不二)입니다. 생사불이를 깨달으면 불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대우주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이 아니라 4차원을 초월해서 헤아릴 수 없는 차원으로 연기적으로 극찰미진수 우주법계가 존재한다. 현미경으로 보는 세포는 또 다른 거대한 우주이며 망원경으로 보는 은하계는 미세한 점들일 뿐이다. 우주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우주가 중첩되어있고, 시간적으로는 찰나 간에 세계를 관통한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우주 법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주와 내가 하나이며 모든 존재는 연기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스스로 존재한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우주는 비로자나 부처님 법신으로 충만한 세계입니다. 그 충만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 광명을 모든 중생에게로 회향하는 것이 보살의 동체대비심입니다. 결국 중생을 사랑하라는 것이 화엄법계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 보살의 정신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삶의 현장에서 앞장서서 실천한다면 이 나라는 분명히 꿈과 희망이 있고 젊은이들의 미래가 있는 불국정토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9월10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 스님) 보제루에서 봉행된 ‘금정총림 범어사 53선지식 1000일 화엄 대법회’에서 이날 법사를 맡은 화범 스님의 설법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1457호 / 2018년 9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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