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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도토리 밤으로 방생 실천

기자명 최원형

재미로 줍는 도토리, 숲속 동물에겐 생명 지탱할 식량

가을은 혹독한 추위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준비의 시간
도토리나 밤 숲속에 두는건
자연과 공존하는 생명 방생

‘도토리 밤 채취금지’

동네 산 초입에 붙어 있던 현수막 글귀다. 야생동물이 먹어야 하니 채취를 금지한다는 설명이 아래 짧게 적혀 있었다. 바로 그 현수막 옆에서 도토리를 열심히 줍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모든 이들 눈에 현수막이 눈에 띄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막 내용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라왔다. 그러다 행여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몇 번을 곱씹다가 꿀꺽 삼켰다. 산에 오르다보니 이번에는 중년 부부가 열심히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같이 간 딸에게, ‘저기 현수막에 도토리 밤 채취 금지라고 적혀 있지 않았니?’라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으면 하는 기대감에. 그러나 도토리 줍기에 여념이 없었던 때문인지 한 귀로 들어간 내 목소리가 다른 귀로 달아난 때문인지 그들의 행동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은 꽤나 값이 나가는 명품 아웃도어였다. 차림새로 보건대 일용할 양식이 없어 도토릴 줍고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뭘까? 도토리는 작고 귀여워 바닥에 떨어져있으면 줍고 싶은 마음이 생기긴 한다. 그런데 막상 한두 개 주워온 도토리는 문명의 이기들 속에 잘 섞이지 못하고 어딘가 겉돌며 말라가다 결국 쓰레기통에 처박히곤 했다. 내 경험이다. 나처럼 주워간 사람이 열 명이라면 적어도 스무 개 남짓은 된다. 백 명이라면, 아니 천 명이라면?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보니 제 가치로 쓰이지 못한 채 쓰레기로 버려졌을 도토리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하물며 봉지 가득 주워가는 사람들의 숫자에 곱하기를 한다면 그 수는 가히 천문학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기호식품으로 먹는 도토리묵을 만들기 위한 거라면 도토리가 어지간히 많아야 가능하다. 게다가 도토리 껍질을 까고 앙금을 내리고 말려 가루를 만드는 과정은 또 얼마나 복잡한가. 그런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느니 차라리 식당에서 편하고 맛나게 사먹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기실 밤과 도토리가 여물어 절로 떨어지는 소리가 숲에 가득한 계절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시간, 고요한 숲에서 잠시 땀을 식히려 앉아 있다 보면 툭툭 떨어지는 도토리 소리가 적막을 깬다. 여물어 떨어지는 도토리 소리를 듣고 있자면 그 소리가 먹여 살릴 수많은 생명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은 다람쥐만이 아니다. 어느 해 가을날 뒷산을 산책 하던 중 바닥으로 내려와 분주하던 어치 몇 마리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혼자 걷던 중이라 내 움직임이 어치들에게 들키지 않았던지 숲 바닥에서 다들 뭔가를 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발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입 안 가득 문 도토리를 낙엽이 수북한 바닥에 숨기는 중이었다. 그때까지 다람쥐만 도토리를 숨겨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치들의 그 행동은 무척이나 신기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도토리가 싹이 터서 참나무가 될 확률은 낮다. 적당히 땅 속에 묻혀야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어치들이 바닥에 숨겨놓은 도토리가 제대로 뿌리를 뻗고 교목으로 자랄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러니 숲이 울창할 수 있는 데에는 어치의 공이 적지 않다. 멧돼지며 고라니가 농가까지 내려와 밭을 헤집어 놓아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해결책으로 이들의 사냥을 합법화했다. 잡식이나 초식인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도토리는 겨울을 나는 식량으로 매우 요긴하다. 먹이가 풍부하다면 산에 사는 이 동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민가까지 내려올까? 도토리거위벌레는 도토리에 알을 낳아 잎사귀 몇 개가 붙은 가지를 잘라 아래로 떨군다. 바닥으로 떨어진 도토리 속 알은 애벌레로 부화한다. 도토리를 먹고 애벌레는 무럭무럭 자라 도토리거위벌레가 된다. 이것이 바로 생태계이다. 숲에 살고 있는 어떤 생물이든 익충일 수도 해충일 수도 없다, 균형이 맞기만 하다면.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재미삼아 줍는 도토리가 누구에게는 생명과도 맞바꿀 만큼 절실한 식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어느 시기든 그 중함이 다를까 싶지만 특히나 가을은 혹한의 시기를 앞두고 있는 동물들에게 더없이 귀한 시간이다. 따뜻한 봄날 새순이 돋을 때까지 길게는 반년 가까운 시간 혹독한 추위 속에 살아남아야한다. 그 고난의 시간 동안 생명을 지탱해 줄 식량을 비축하는 시기가 바로 이 가을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충분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없어도 생존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도토리나 밤을 숲에 그대로 놔두는 것도 여러 생명을 살리는 방생이다. 그게 우리가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지혜가 아닐지.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58호 / 2018년 10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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