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법성게’ 제7구 :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19. ‘법성게’ 제7구 :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 해주 스님
  • 승인 2018.10.01 16:07
  • 호수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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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가 하나에 들어가고 하나가 일체에 들어간다

‘일중일체다중일’은
연기다라니 이법이고

‘일즉일체다즉일’은
연기다라니 덕용 해당

하나의 법이 자성 없기에
일체 갖추어 하나 이루고

일체법은 자성이 없기에
하나의 법으로 일체 이뤄

동전 열 개를 세는 비유로
의상 스님 연기다라니 설명

십현문과 연결을 시켜서
일승의 연기세계 펼쳐 보여

‘옷깃만 스쳐도 500생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생겨난 것은 ‘인(因)’과 ‘연(緣)’이 만난 과보이니 인연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고, 만난 인연을 승화시키자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겠다. 누구나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다른 사람 내지 주위 모든 것과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한다는 인연화합의 연기도리이다.

인연(因緣)과 연기(緣起)는 보통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도 있고, 그 의미가 다르기도 하다. 인연은 속제(俗諦)의 바탕이고 연기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바탕이니, 자성이 없는 인연법을 관함으로써 걸림 없는 연기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의상 스님은 강조하고 있다.

‘법성게’에서는 인연화합해서 존재하는 모든 법의 영역을 6부문으로 나누어 연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연기분의 14구절 중 처음 2구절(제5-6구)은 연기의 체임을 앞에서 보았다. 다음 2구절(제7-8구)은 다라니의 이용(理用), 그 다음 2구절(제9-10구)은 사법[事], 그 다음 4구절(제11-14구)은 시간[世時], 그 다음 2구절은 계위[位]에 근거하여 연기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연기분의 마지막 2구절(제17-18구)은 연기법의 총론이다.

이중에 연기다라니의 이용(理用)에 근거해서 법을 포섭하는 영역을 변별한 ‘법성게’ 제7구와 제8구가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과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다.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라는 “일중일체다중일”은 연기다라니의 이법[理]이고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라는 “일즉일체다즉일”은 연기다라니의 덕용[用]에 해당한다. 인과도리를 기준으로 이(理)라 하고, 덕용자재를 기준으로 용(用)이라 한 것이니, 연기다라니를 체용(體用)으로 말할 때 이법은 역용[力用]의 용이고, 덕용의 용은 체의 측면인 것이다.

말하자면 “일중일체다중일”은 중문이고, “일즉일체다즉일”은 즉문(卽門)이다. 중문은 이루는 주체인 인(因) 외에 이루어지는 과법이 있기 때문에 인과도리문이다. 반면 즉문은 인연의 당체이니 인에 즉하고 과에 즉해서 이루는 주체인 인(因) 외에 이루어지는 과법이 없으므로 덕용자재문이다. 중문은 역용문이므로 주체와 대상이 이루어져 다르고, 즉문은 체문이므로 당체(當體)가 곧 공하여 인과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원통기’)

이 중문과 즉문은 혹은 상입(相入)과 상즉(相卽), 상재(相在)와 상시(相是), 상자(相資)와 상섭(相攝) 등 여러 가지로 일컬어진다.(‘총수록’ 고기)

‘법성게’에서 ‘불수자성수연성’ 다음에 ‘일중일체다중일’을 말한 것은 연기하는 모든 법이 낱낱에 자성이 없어서 서로서로 다른 것[他]으로써 자성을 삼고 곧 바로 연을 따라 곁이 없이[無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법융기’)

거듭 말해서, 하나의 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일체를 갖추어 하나를 이루고, 일체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법으로써 일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하나 가운데 일체여서 많은 것이 하나에 걸리지 않고, 일체 가운데 하나여서 하나가 많은 것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계도주’)

이 ‘일중일체다중일’의 경증(經證)으로는 “일중해무량 무량중해일(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여래광명각품’)이 회자되어 왔다. 이 “하나 가운데 무량을 알고, 무량 가운데 하나를 안다”란, 한량없음이 하나에 들어가고, 하나가 한량없음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와 무량, 하나와 일체의 경계는 ‘화엄경’에 수없이 펼쳐지고 있다.

도봉유문 스님 진영. 은해사 소장.
도봉유문 스님 진영. 은해사 소장.

예를 들면, “한 국토가 시방에 충만하고 시방 국토가 한 국토에 들어가도 남음이 없다”(‘노사나불품’), “일체 국토가 한 국토에 들어가고 한 국토가 일체 국토에 들어간다”(십지품), “보살마하살은 여래 몸의 한 털구멍가운데 일체 중생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 몸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여래출현품)라는 등이다.

이처럼 화엄세계는 한 세계에 미진 세계가 있고 그 낱낱 세계 중에 또 미진 세계가 있어서 거듭 거듭 다함이 없어 중중무진(重重無盡)이다. 이와 같은 일다자재(一多自在)의 경계를 의상 스님은 동전 열 개를 세는 비유[數十錢喩]로 설명하고 있다.

“만약 연기의 참모양[實相]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먼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을 깨달아야 한다. 말하자면 일전(一錢)에서부터 십전(十錢)까지이다. 열[十]을 말한 것은 한량없음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고, 열 가운데 하나이다.[一中十 十中一] 둘째는 하나가 곧 열이고, 열이 곧 하나이다.[一卽十 十卽一]”

수십전법에서 ‘일중십 십중일’은 ‘일중일체다중일’의 중문이고, ‘일즉십 십즉일’은 ‘일즉일체다즉일’의 즉문에 해당한다. 열[十]은 일체(一切)나 다(多)와 같이 무량의 의미이다. 의상 스님은 이어서 이 중문과 즉문을 각각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문인 일중십 십중일(一中十 十中一)의 중문은 향상래(向上來)와 향하거(向下去)의 두 가지이다. 일중십은 향상래, 십중일은 향하거에 해당한다. 향상문은 열 개의 동전을 하나에서 열로 세는 것이고, 향하문은 열 개의 동전을 열에서 하나로 세는 것이다.

향상래의 경우, 첫째는 하나로서 근본수이다.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열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다.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열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상래는 동전 열 개인 열 가지 문이 같지 않으나, 열이 하나에 들어가고 하나가 열을 용납하는 일중십이다. 나머지 여덟 동전 가운데도 마찬가지이니, 둘 내지 아홉도 하나 가운데 둘 내지 아홉이다. 따라서 하나에서 열로 세는 향상래는 모두 본수인 하나 가운데 들어오는 것이다.

향하거의 경우, 첫째는 열이다.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열째는 열 가운데 하나이다.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는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는 곧 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향하거 역시 동전 열 개인 열 가지 문이 같지 않으나, 하나가 열에 들어가고 열이 하나를 용납하는 십중일이다. 아홉 내지 둘도 열 가운데 아홉 내지 둘이다. 따라서 열에서 하나로 세는 향하거는 모두 열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란 자성(自性)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하나이며, 내지 열이란 자성으로서의 열이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열이다. 일체의 연으로 이루어지는 법은 한 법도 일정한 모양으로서 고정된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 가운데 열과 열 가운데 하나는 서로 들어가고 용납하여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고감[來去]의 모양은 자신의 위치를 움직이지 않고서[不動] 항상 오고 가는 것이다.(‘일승법계도’)

의상 스님은 이와 같이 동전 가운데 첫 번째 내지 열 번째가 같지 않으나 연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서로 걸림 없는 것처럼, 비록 원인과 결과[因果], 이치와 현상[理事], 사람과 법[人法], 앎과 행[解行], 가르침과 뜻[敎義], 주와 반[主伴] 등의 여러 많은 문이 다르나, 한 문을 설함에 따라 일체를 다 포섭한다고 한다. 즉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법(法)이 낱낱 동전에 동시에 구족[同時具足]하는 등, 십현문(十玄門)과 연결시켜서 일승의 연기세계를 다양하게 펼쳐 보인다. 도봉유문(道峯有聞. 18세기) 스님은 ‘법성게’를 주석한 ‘법성게과주’에서 이 “일중일체다중일” 이하 10구절을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십현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얼마 전 학생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찌그러지자’라는 말을 하고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았다. 같이 사진 찍는 한 학생의 얼굴이 더 좋게 보이도록 다른 학생들은 찌그러지는 표정을 짓자는 것이었다. 잠깐 뭔가 생각해보게 하는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어느 한 사람은 좋은데 다른 모든 사람이 나쁘다든지, 다른 모든 사람은 좋은데 어느 한 사람이 나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서로 힘을 밀어주고, 또 모두의 힘을 받은 개개인은 그 모두의 공덕이 현발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마땅한 도리이지만 연연 따라 나타날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중일체다중일’의 무애 자재한 삶은 바른 수행 정진이 필요하다. 불교공동체가 참 좋은 인연도량으로 거듭 나길 바란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58호 / 2018년 10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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