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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무량사구지(無量寺舊址)

기자명 임석규

부여 무량사 창건시기 통일신라로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

각종 중수기 등에 따르면
무량사 창건은 통일신라

현존하는 무량사 모습은
조선 양난 이후 복원한 것

무량사 동쪽 무량사구지
본래 초창기 절터로 추정

4차례 조사결과 사역규모
지정구역보다 훨씬 넓어

무량사 전경.

충청남도 부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이 있다. 무량사이다. 불교에서 무량(無量)은 시간·공간·수량·능력 등이 인간의 지혜나 지식을 초월해서 한이 없는 것을 말한다.

무량사의 자세한 연혁을 전하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작성된 각종 중수기 등에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확인할 수 없고, 창건시기에 대해서도 문무왕 때부터 헌강왕 때까지 약 200여 년의 시차가 있기는 하다. 이후 무량사는 헌강왕 때 무염국사(無染國師)에 의해, 또 고려 고종 때 각각 중수되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세조 때 김시습이 무량사에 머물다가 입적하였는데, 그가 무량사를 중수하고, 극락전 현판의 글을 썼다고도 한다. 명종 9년(1554)에는 무량사의 지음승(持音僧)이 비인현감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명종 때는 특히 사찰에 대한 지원과 보호조치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이다. 왕실에서 직접 내수사(內需司)를 통해 전국 주요 사찰의 주지나 지음을 임명하였는데, 이 때문에 지방 관리들과 갈등이 있기도 하였다. 아무튼 16세기 중반 경 무량사의 사세는 크게 높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16세기 후반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선조 29년(1596) 이몽학(李夢鶴)은 왜란의 혼란을 틈타 무량사를 거점으로 승려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반란의 여파는 무량사에도 큰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또 선조 30년(1597)에는 재차 침입한 왜적에 의해 부여 도천사(道川寺), 은산역(銀山驛)과 더불어 무량사도 분탕질 당했다고 하여, 이 때 무량사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량사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의 남쪽 깊은 골짜기 안쪽에 형성된 넓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좌향은 남향이며, 동쪽과 서쪽으로는 산자락이 남북으로 병풍처럼 길게 뻗어있다. 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만수천이 사지의 서쪽 가장자리를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며, 만수천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골짜기 초입에 외산면소재지를 중심으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만수산 능선을 넘어 약 5㎞정도 거리에 ‘보령 성주사지’가 있다.

무량사 경내.

만수천을 경계로 서쪽에는 현 무량사가 있고, 동쪽에는 무량사구지가 위치해 있다. 현 무량사는 인조 원년(1623) 극락전을 중건하며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한 기록이 있고, 1872년에 영산전과 명부전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무량사 경내에는 ‘부여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1265호)을 중심으로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제185호), ‘부여 무량사 석등’(보물 제233호)이 같은 축선 상에 나란히 서있고, 천왕문 바깥쪽에는 ‘무량사 당간지주’(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가 있다. 오층석탑을 비롯한 석조물들은 양식적 특징으로 봐서 무량사가 적어도 고려 초기 이전에는 창건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만수천 건너 무량사와 마주보고 있는 넓은 대지에는 ‘무량사구지’가 있다. 1989년 발간된 ‘충남지역의 문화유적’에 따르면, 이곳은 본래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는데, 곳곳에 다수의 와편과 자연석 초석이 산재한다고 하였다. 또 이곳에 있던 건물들은 조선중기 병란에 의해 소실되었으며, 이후 인조 대에 무량사가 중창되면서 사역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1998년도에 발간된 ‘문화유적분포지도’에는 본래의 사찰건물이 무량사구지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이는 무량사가 본래 만수천 동쪽 대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조선중기 양란 이후 재건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갔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를 따를 경우 무량사 경내에 고려시대 오층석탑과 석등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현 무량사와 무량사구지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사역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량사 석탑과 극락전.

2000년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에서 무량사구지 일부에 대해 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듬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1호로 지정되었다. 또 2003년에는 ‘충청남도역사문화원’에서 지정구역 북단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2005년과 2007년에도 지정구역 남단에 대한 시굴조사와 2003년도 조사지역 남쪽에 이어지는 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각각 진행하였다. 2000년도 시굴조사는 무량사 주변 경내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약 30일간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대부분의 트렌치에서 건물지 초석이나 적심석, 기단석렬, 담장시설, 와적층 등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동반된 유물로 미루어 이들 유구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일부 건물지에서는 목탄, 소토가 발견되어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길이가 최소 21.5m에 이르는 기단 석렬은 이곳에 장대한 규모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짐작케 하였다.

2003년도 조사는 2001년도 조사구역의 북단에 대한 발굴조사로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건물지 5동과 장방형 기단석렬, 배수시설, 답도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5동의 건물지는 남향인 중앙의 제1건물지를 중심으로 그 좌우측과 후면에 4동의 건물지가 배치된 양상을 보인다. 그 중 제1건물지는 전체모습이 비교적 명확하여 크기가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확인된 건물지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후면 일부 적심 사이에는 고막이 시설이 확인되었고, 전면 내진 주변에서는 구들 혹은 암거로 추정되는 시설이 발견되기도 했다. 적심시설 아래에서는 소토와 함께 통일신라시대로 올려볼 수 있는 세선문의 토수기와가 포함된 와적층이 확인되어, 이전 시기에 또 다른 건물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2005년도 조사는 지정구역의 남쪽 약 6600㎡에 대한 시굴조사로 실시되었다. 조사 당시 통일신라말기와 고려 중기에 해당하는 2개의 문화층을 확인하였으며, 건물지의 초석과 적심시설, 기단, 석렬, 와적층 등 유구를 발견하였다. 이때의 조사로 초창기 무량사는 사역이 지정구역보다 남쪽으로 훨씬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2007년도 조사는 2003년도 조사지역의 남쪽에 바로 이어지는 대지 1655㎡에 대한 발굴조사로 진행되었다. 조사구역 중앙에서 2003년도에 조사된 제1건물지와 같은 축선 상에 배치된 제6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2차에 걸친 중건을 통해 3시기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대체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초창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 내부 중앙에서 불상 대좌의 하부시설로 추정되는 부석시설이 발견되어 이 건물지를 금당지로 제1건물지는 강당지로 비정하였다. 제6건물지 동쪽에 자리한 제7건물지 역시 2차로 중건되었으며, 마지막 시기의 건물지 내부에서는 온돌시설도 확인되었다.

네 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 무량사 창건기 건물들이 통일신라시대 때 이미 무량사구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북 축선 상의 금당과 강당을 중심으로 양 옆에 부속 건물을 배치하였으며, 사역규모는 지정구역보다 훨씬 넓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출토유물 중에는 연호가 새겨진 다수의 와편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무량사는 적어도 고려전기에 두 차례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외에 명문 와편 중에는 건물의 용도를 짐작케 해주는 ‘미륵당(彌勒堂)’ ‘식당(食堂)’ ‘묘고방(妙高房)’ 등 건물의 명칭이 새겨진 것도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또 2001년 조사 때에는 석불좌상의 우측 무릎 일부가 발견되었고 2003년 조사 때에는 석불좌상의 불신과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토제와 철제 말도 출토되었다.

무량사 석탑과 석등.

무량사 경내에는 오층석탑과 석등 외에 대좌편, 석탑재, 초석 등 다수의 소재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조사 결과를 보면 무량사구지에서는 대체로 고려~조선에 이르는 시기의 건물지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2003년과 2007년도 조사 때에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건물지의 일부와 와적층이 확인되었다. 무량사의 초창시기가 통일신라 하대까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만수천 동쪽 대지에는 늦어도 통일신라 후기에 이미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재 무량사 경내에서는 통일신라 때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을 확인할 수 없다. 현 무량사 부지를 발굴 조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무량사는 본래 만수천 동쪽에 창건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무량사가 만수천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중심영역이 현재 무량사일원으로 옮겨간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시기는 석탑이 조성되는 고려초기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중심영역이 옮겨 간 이후에도 무량사구지는 사찰의 별도영역으로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중기 병란으로 무량사구지에 있던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 후에는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무량사구지는 2007년 발굴조사를 마지막으로 현재는 복토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현재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찰과 관련된 문헌기록들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일제강점기 이후 작성된 중수기에는 대체로 무량사가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무량사 경내에 남아 있는 다수의 석조물들은 고려시대 이후의 것들이어서, 중수기에 기록된 창건시대와 맞지 않아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2000년 이후 무량사구지를 발굴조사하면서 무량사의 초창시기를 통일신라까지 올려볼 수 있는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중수기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음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무량사구지에서 ‘무량사(無量寺)’명 와편이 다수 출토된 것을 고려하면, 본래 무량사의 사역은 만수천 동서 양쪽을 모두 아우르는 상당히 넓은 범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량사와 무량사구지의 관계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두 영역간의 관계를 규명할 추가 정밀조사가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통해 무량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도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58호 / 2018년 10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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