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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작자 미상 ‘마조방거사문답도(馬祖龐居士問答圖)’

기자명 김영욱

비운다는 마음마저 남김없이 비워라

비운 것에서 충만감 느끼듯이
배움이 필요하면 먼저 버려야
텅 빈 충만의 경지가 곧 진공

작자 미상 ‘마조방거사문답도’, 13세기, 비단에 먹, 105.5×34.6㎝, 일본 京都 天寧寺.
작자 미상 ‘마조방거사문답도’, 13세기, 비단에 먹, 105.5×34.6㎝, 일본 京都 天寧寺.

 

十年林下坐觀空(십년임하좌관공)
了得心空法亦空(료득심공법역공)
心法俱空猶未極(심법구공유미극)
俱空空後始眞空(구공공후시진공)

‘십 년간 숲 아래 앉아 공을 보매 텅 빈 마음 깨달으니 법 또한 텅 비었구나. 마음과 법 모두 비어도 오히려 끝이 아니니 모두 빈 것마저 비워야 비로소 진공이로다.’ 유일(有一, 1720~1799)의 ‘추월대사의 세 개의 공(空)자 시에서 차운하다(次秋月大師三空字)’.

방온(龐蘊, ?~808)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묻는다. “만법(萬法)과 짝이 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이 그를 가리키며 답한다. “그대가 한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모두 들이켜면 말해주겠네.”

방온은 불가에서 흔히 방거사(龐居士)로 불리는 인물이다. 대대로 유학(儒學)의 도리를 배운 가문에서 자랐으나 출가하여 조동종의 대선사인 석두희천(石頭希遷)을 찾아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게 되었다. 그가 향한 곳은 당시 남종선 발전에 한 획을 긋고 있던 마조도일이었다.

그날의 만남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 ‘마조방거사문답도’이다. 그림을 그린 이가 남송 말기에 항주 육통사에서 활동한 목계(牧谿)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인물의 풍모와 의복에 표현된 비수가 균일한 필선을 보면 시대가 더 지나 원대의 어떤 이가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을 깨닫는 순간을 그린 선기도(禪機圖)의 전통처럼, 가르침을 전하는 마조도일이 방온보다 다소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 두 인물이 깨달은 진리의 차이는 높고 낮은 암산이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늘 그러하듯이 가르침을 전하는 이의 입가에는 담박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방온이 말한 만법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만법과 짝이 되지 않는 사람이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속세의 상식을 초월한 사람으로, 곧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앞서 같은 물음을 들은 석두희천은 방온의 입을 막아버렸고, 방온은 이때 진리를 바라보는 눈이 열렸다. 그리고 진리의 근원에 다다르기 위해 마조도일에게 다시 물은 것이다.

마조도일의 답은 간단했다. 서강의 물을 한입으로 모두 마시고 오라. 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서강의 물은 한입에 마실 수 없다. 모든 현상은 논리적 이론으로 분별할 수 없으니, 만법의 진리를 생각하는 인식의 논리도 비우라는 말이다. 분별하는 생각을 비워야만 마음도 비울 수 있고, 마음을 비워야만 일체의 법도 비울 수 있다. 즉 깨달았다는 분별도, 그 분별을 통해 얻은 마음도, 법도 다 비운 것이라는 마음마저 남기지 않고 비워야만 진실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로 채워진 것보다 비운 것에서 충만감을 느낀다. 고개를 들어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면 이내 내 마음도 텅 비게 된다. 무한한 충만감을 담은 텅 빈 하늘처럼 내 마음에도 텅 빈 충만감이 담긴다. 텅 빈 충만의 경지, 바로 진공(眞空)이다. 배움이 필요하면 다만 있는 것 비우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58호 / 2018년 10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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