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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유안진의 ‘사리(舍利)’

기자명 김형중

수행으로 허망한 몸에 사리 만들 듯
무상한 인생 극복하려는 삶 읊은 시

부모가 내게 처음 붙여준 호칭
이름은 상 없는 문자부호일 뿐
고승이 남기는 사리에 빗대어
이름값 다하고 살자 교훈 전해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 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갯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의
사리처럼 남을 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름은 부모가 나에게 처음 붙여준 호칭이다. 그 이름은 곧 나를 대신하다가 점점 나 자신이 되고 만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나는 좋아서 춤을 춘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비난하면 분노한다.

이름은 형상이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이 없는 소리나 문자 부호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대신하고 상징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위하여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칭송을 받으면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영웅이나 선비들은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도 바친다. 성인도 명예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있다. 장수들은 그 이름 때문에 전쟁터에서 죽었다.

유안진(1941~현재) 시인은 무상한 인생이지만 그래도 인간이 죽으면 고승이 수행의 결정체로 사리를 남기듯이 자신이 몸부림치면서 살아온 흔적이 이름 속에 묻어서 이름만 남기고 모든 것이 허망하게 사라진다고 읊고 있다.

사리는 진실한 수행의 결정체이다. 우리의 육신은 불에 타면 재가 되어 사라지지만 우리의 행덕(行德)과 정신세계는 나의 이름 속에 묻어져서 남는다.

시인이 자신의 이름을 고승의 사리에 빗대어 시로 읊은 것은 참신하고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고승의 사리가 남듯이 이름 석 자는 남는다는 뜻과 우리가 살면서 자신의 이름값은 다하고 살자는 교훈이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긴 여운이 남는 시이다.

무상한 세상에서 희망은 죽음을 극복하는 보약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살 수 밖에 없다. 나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

나를 처음 만난 부모가 내게 붙여준 그 이름값을 하기 위하여 고승이 허망한 몸뚱이를 수행을 통해서 사리를 만들듯이 그렇게 살리라고 다짐하는 시이다. 무상하고 허망한 인생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는 사리 시이다. 허망하고 무상한 세상에 그래도 하나의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다면 무엇일까?

지난 토요일에 통영에 갔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9호 소반장 기능보유자 추용호 선생을 만났다. 그는 통영의 12공방 가운데 유일하게 3대째 공방을 계승하고 있는 분이다. 그런데 150년이 된 그 공방이 도로계획에 의하여 철거되게 되었는데, 30년을 통영시와 소송과 투쟁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공방을 지켜내느라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다. 소반장 추용호 선생에게는 그 어떤 문화재보다도 150년이 된 작은 공방이 더 의미 있고 소중하다. 추용호 선생이 죽으면 공방의 이름만 고승의 사리처럼 근대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추용호의 사리는 통영의 소반이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458호 / 2018년 10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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