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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정암사 주지 법상 스님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이 중생 깨달음 위해 제시한 방편”

부처님은 중생의 깨달음 위해
수많은 보살을 방편으로 제시
관음보살도 방편으로 설한 것
관음보살보문품은 부처님 말씀

불교는 신에 의지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공부
이를 바로 알고 공부할 때만
불교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

법상 스님은 “부처님은 삼독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며 “부처님 법을 바르게 공부해 삼독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법상 스님은 “부처님은 삼독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며 “부처님 법을 바르게 공부해 삼독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경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줄여서 보문품(普門品)이라고 하는데 관세음보살보문품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제28품 가운데 제25품에 해당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숱한 보살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보살을 만들어내시고 이것도 모자라 많은 부처님을 만들어내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입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도 부처님의 입으로 만드셨습니다. 입으로 만든 것은 실상(實相)이 아닌 방편이라고 합니다. 방편은 이렇습니다. 아이가 떼를 쓰면서 울고 있는데 어떻게 그치게 해야 될까요? 나뭇잎 같은 가짜 돈을 가지고 그만 울라며 돈이 있다고 주었을 때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면 그것이 방편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닦도록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슬쩍 내세운 분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부를 헛되게 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진짜 있다고 한다면 불교가 아닌 관음교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관세음보살은 방편이라는 점입니다. 부처님은 실존하는 보살이기도 하고 실존하지 않는 보살이기도 합니다. 관세음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하면 실존하는 보살이고, 관세음보살이 또 하나의 보살이라고 하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하나밖에 없는 가르침이라고 해서 일승교(一乘敎)라고 합니다. 부처가 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집에 아버지가 두 분이 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말은 아주 대단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도 합니다. 죄를 짓고 안 짓는 것도 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중국의 유명한 천태지자(天台智者) 스님께서는 ‘당도왕경(當途王經)’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당도라는 것은 도로 가운데에서도 아주 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은 대개 무역으로 인하여 전파되기도 하는데 무역상의 왕래도 곧 길을 따라 이루어지기에 ‘법화경’도 보문품으로 인하여 유통시키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한 것입니다.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은 통석(通釋)과 별석(別釋)이 있습니다. 통석은 전체를 해석하는 것이고, 별석은 글자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전체를 보려면 관세음보살과 보문품을 떼어놓고 보아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중생의 음성을 듣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보문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널리 문을 열어놓았다는 의미입니다.

또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은 “대자대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대자대비를 줄여서 자비라고 합니다. 자비는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를 달게 받으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참회를 할 때 용서되는 것이지 참회하지 않는 자에게는 죄를 받도록 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또 보문이라는 말은 지혜장엄(智慧莊嚴)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이 대자대비이고 보문은 지혜장엄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다섯 가지를 갈무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깨달음입니다. 보문에는 복덕장엄(福德莊嚴)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혜가 있어야 복덕이 날로 증장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장엄과 복덕장엄을 부처님께서는 ‘마니주’라고 하는 구슬에 비유하셨습니다. 중국의 소설 ‘서유기’에서는 마니주를 ‘여의주’라고도 했습니다. 여의주와 마니주가 같은 말인데 바로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 ‘서유기’에서는 여의주를 막대기에도 비유를 했습니다. 늘어나라고 하면 늘어나고 줄어들라고 하면 줄어듭니다. 우리 마음이 온갖 변덕을 부리지만 마음 자체는 그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관세음보살보문품’의 한 자 한 자에 대해 해석해 보겠습니다. ‘관(觀)’은 ‘법신(法身)’과 같은 의미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를 형상화한 것이 바로 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로 모든 중생을 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법신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곧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보문은 적절히 몸을 나투는 것이기 때문에 응신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소리를 들어서 남모르게 이익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익을 주는 것일까요? 삼독과 칠난을 벗어나게 하는 이익을 줍니다. 삼독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탐심이 일어나면 안 갖고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진심, 성질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치심, 어리석음이 발달해서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칠난은 ‘관세음보살보문품’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물의 난, 불의 난, 나찰의 난, 왕의 난, 귀신의 난, 갇히고 억압되는 난, 원수지는 난입니다.

천태지자 스님께서는 관세음보살을 기가 막히게 번역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관세음보살이 ‘음력 14일 달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달이 초하루부터 점점 보름달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보름달이 되기 직전 14일은 보살의 경지이고 완전히 보름달이 되는 15일은 부처님의 경지라는 의미입니다. 음력 14일의 달은 지혜를 뜻합니다. 부처님의 지혜가 점점 쌓여 가는 것이 보살의 경지는 14일, 부처님의 경지는 15일로 본 것입니다. 또 천태지자 스님께서는 관세음보살을 ‘음력 29일 밤’이라고도 하셨습니다. 16일부터 29일까지는 달이 이지러집니다. 달이 점점 작아지는 것은 번뇌망상이 점점 자꾸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한 달은 30일인데 왜 29일이라고 했을까요? 30일까지 가면 부처님의 경지가 되고 29일에 머물고 있으면 보살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세(世)’는 유위세(有爲世)가 있고 무위세(無爲世)가 있습니다. 유위세는 생멸, 나고 죽음의 세계, 범부의 세계입니다. 무위세는 진실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극락국토까지 관장하십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변세(二邊世)와 불사의세(不思議世)가 있습니다. 이변이라는 것은 대립의 세계입니다. 나고 죽음, 생사와 열반은 대립입니다. 불사의세는 부처님의 세계, 불가사의한 세계이며 실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실상묘법연화경’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보기는 봅니다. 벌이 꽃을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변세를 봅니다. 좋다, 나쁘다, 싫다, 좋다 등 현실을 모두 이분법의 세계로 봅니다.

‘음(音)’은 소리입니다. 음을 다른 말로 하면 근기입니다. 음은 곧 말과 같은 뜻입니다. 왜 말이 근기일까요? 근기에 따라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근기에 따라 말을 하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음은 근기입니다. 근기도 많이 나누어지는데 ‘인천’의 근기가 있습니다. 하늘 사람의 근기는 “나쁜 일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은 받들어서 행하라”입니다. 우리는 잘 안됩니다. ‘이승’의 근기는 생사를 싫어하고 무위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어긋나는 것입니다. 나고 죽음을 싫어하면 아기로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몇 백년 지나도 그대로인 화석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 ‘보살’의 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낫습니다. 남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로 빠지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도 숱한 일을 하지만 자신이 잘났다는 상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상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인데 상도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근기는 ‘일체무애(一切無礙)’의 근기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보살(菩薩)’은 불교의 존칭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어서 ‘보(普)’는 편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누구를 가리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무량하여 더 이상 넓힐 수 없다면, 자기 견해에 머물러 있는 것이 편법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진리가 자꾸 바뀌지만 사실 진리는 바뀌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을 말로써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문(門)’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진리의 문은 일승의 문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절대 두 개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경전에서는 왕에 비유하기도 하고 아버지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또는 어머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왕도 하나고, 아버지도 하나이며, 어머니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도 이렇게 긴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서원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다고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와 같이 넓고 깊을까요? 바로 중생을 위해서입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근기는 보살의 근기이기도 하고 부처님의 근기이기도 합니다. 33가지 몸을 나타내어 설법을 해서 일체 모든 중생이 부처님 법을 믿고 자신을 스스로 구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33가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탐, 진, 치 삼독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삼독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불교는 신에게 의지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자신이 자신을 구제할 수 있는 바탕을 갖추기 위해서 불교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인 줄 확실하게 알면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임을 확실하게 아시고 공부를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9월12일 경남 김해 정암사에서 봉행된 ‘관세음보살보문품 공부하기’ 입재법회에서 법상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459호 / 2018년 10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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