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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금순 박사의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고찰’

기자명 한금순

법정사 항일운동, 3‧1운동 앞서 스님‧주민 주도한 조선독립운동

1918년 10월7일 제주 도순리서
스님·주민 700명 국권회복 요구
제주도 최대규모 항일운동 기록

법정사 주지 김연일 스님 주도
1914년부터 일제 부당함 강조
신도에 항일의식 심어주며 준비

일제 강제 진압·법정사 소실
참여자 중 66명 검거돼 고문
김연일 스님 등 46명에 실형
훗날 32명에 건국훈장 추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스님과 서귀포 일대 마을주민 700여명이 일본인의 축출과 국권회복을 주장하며 일제에 항거한 제주도 내 최대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일경은 법정사 항일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법정사는 불에 타 소실됐고, 현재 터만 남아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스님과 서귀포 일대 마을주민 700여명이 일본인의 축출과 국권회복을 주장하며 일제에 항거한 제주도 내 최대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일경은 법정사 항일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법정사는 불에 타 소실됐고, 현재 터만 남아있다.

한금순 박사의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고찰’은 제주 서귀포신문사가 10월4일 서귀포시청 문화강좌실에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재조명과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개최한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편집자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7일 제주도 도순리를 중심으로 한 서귀포 일대의 마을 주민 700여명이 일본인의 축출과 국권회복을 주장하며 일으켰던 제주도내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삼일운동보다 먼저 일어난 항일운동이었고, 주도자들은 삼일운동 참여자들보다 무거운 형을 받아 수형생활을 할 정도로 일제 탄압의 강도를 드러내주고 있는 항일운동이기도 하다.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에게는 징역 10년형을 구형하는 등 참여자 46명에게 형을 선고하였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들은 검거되어 경찰의 수사단계를 건너뛰고 검사분국에서 사건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제주도에도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검사분국이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자들을 목포로 이송하여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에서 조사하였다. 재판 전 가혹한 조사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생겼고 수감 중 옥사한 사람도 있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신체적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해방될 때까지 일제의 감시로 활동에 제약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위해 법정사 주지 김연일 등 법정사 승려들은 1914년경부터의 법정사 활동에서부터 일본의 국권 침탈의 부당함을 신도들에게 설명하여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거사 실행 6개월여 전부터는 군대조직과 같은 거사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들의 거사 목적은 국권회복임을 천명하며 독립을 위해 일본인 관리와 상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겠다는 요지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곤봉, 깃발 등을 사전에 제작하고 화승총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계획적인 사전 준비 끝에 1918년 10월7일 새벽 거사가 실행되었다. 법정사 예불에 참석하였던 34명의 선봉대가 도순리 법정사를 떠나 하원리 월평리 등을 거쳐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에는 인근 마을에서 동조하여 참여한 주민이 700여명이었다. 거사 현장의 선봉대장 강창규의 지휘 아래 항일운동 참여자들은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고, 지나가던 일본인 일행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때렸으며 중문리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웠다. 총으로 무장한 서귀포 경찰관 주재소 기마 순사대의 공격으로 참여자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참여자 중 66명이 검거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일제는 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법정사 항일운동의 파급을 우려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목적을 사교도의 혹세무민으로 매도하였고 참여주민의 숫자도 300여명으로 축소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항일운동으로 평가된 이후 현재, 김연일 등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32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항일운동 발상지는 제주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의열사를 건립하여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를 추모하고 있다.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일제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국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표명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자들은 거사를 준비하고 조직해나가면서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선언하였고 지역주민들 역시 거사가 항일운동임을 인지하고 참여하였음을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법정사 항일운동에 서귀포 지역의 많은 마을에서 참여하게 된 이유를 찾아보면, 법정사의 역할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주불교는 조선의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사찰들의 대외적 활동은 미미한 상황이었다. 제주도에는 관음사가 창건되어 대외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서귀포 지역의 포교를 위해 법정악에 법정사가 창건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914년 이래 1918년까지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은 법정사 예불을 통해 일본의 국권 침탈이 부당하며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설법하였다. 이에 법정사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에 동의한 서귀포 지역 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1918년 법정사의 승려들은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거행하기 위해 6개월 전부터는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이 기간 동안 법정사 신도와 인근 주민들에게 항일운동의 의지를 알려 준비에도 동참시켰다. 정구용은 1918년 9월말에 “각 면 각 리장은 바로 리민 장정을 모아 솔군하고 10월7일 오전 4시 하원리 지내에 집합하라. 그러한 한편 4일은 대거 제주향을 습격하고 일본인 관리를 체포하고 일반 일본인을 내쫓아야 한다”고 격문을 써서 각 마을 구장에게 나누어주어 미리 거사를 알렸다.

고용석은 김봉화의 동생으로부터 거사 동행을 권유 받아 거사 전날 법정사로 향하기도 하였다. 법정사 항일운동이 인근 주민들에게 이렇게 사전에 고지되었는데도 일제 경찰에 발각되지 않았던 것은 주민들 또한 항일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항일운동이라는 거사가 중대한 일이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이 지켜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법정사가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1918년 10월7일 새벽 도순리 법정사에 모인 선발대 34명이 절을 출발했다. 우선 먼저 도순리 위쪽의 상동으로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동참을 권유하였다. 이어 영남리에 들어가 구장에게 민적부를 받아 장정을 참여시켰고, 서호리와 호근리 강정리를 거쳐 하원리로 향하였다. 하원리에서 강창규의 지시에 따라 100여명이 일본인 일행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구타하였다. 하원리를 거쳐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인근마을에서 700여명이 참여하였다.

참여자들은 중문 경찰관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고 경찰서의 기구와 문서 등을 불살랐다. 서귀포 기마 순사대가 출동하여 66명을 검거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은 계속 조사하면서 체포하여 4차례에 걸쳐 구속이 행해졌다. 도순리 하원리 월평리 영남리 대포리 상예리 서홍리 법환리 중문리 회수리 덕수리 등에 주소를 둔 사람들이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고 이들 중 46명에게 형이 내려졌다. 연령대별로는 40대가 17명으로 제일 많이 검거되었고 다음으로 30대 15명 20대 14명 순으로 검거되었다. 재판은 한 차례만 있었고 채 4개월이 걸리지 않고 판결이 종료되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이 징역 10년형을 받는 등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 주로 적용되었고 방화죄와 상해죄, 총포 화약 취급령 위반죄 등이 적용되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분명히 선언한 항일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혹세무민의 난리 정도로 왜곡하였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관련 일제의 자료를 연대순으로 비교 검토하면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왜곡이 의도적임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물론 항일운동의 기세를 꺾어야만 하는 일제의 정책에 의한 것임은 자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은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을 비롯한 강창규, 방동화, 정구용 등의 승려와 박주석 등이다. 이들 주도세력들은 1914년부터 법정사에 거주하면서 항일운동을 준비하였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경주 기림사 승려였다. 김연일이 어떻게 제주도로 들어왔을까를 살펴보면 그 정점에 승려 박만하가 있다. 제주도 출신 승려인 강창규, 김석윤, 방동화 등의 스승이 박만하이며 또한 박만하는 제주도 관음사 초창기 활동을 도운 승려이기도 하다. 박만하의 제주도 제자인 강창규와 김석윤, 방동화는 나라 잃은 현실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항일 활동을 함께하는 동료들이었다.

강창규는 법정사 항일운동에서 선봉대장으로 앞장서고, 김석윤은 제주의병항쟁의 주역이었으며 법정사 창건에 기여하였고 박만하를 중심으로 한 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법정사가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도록 하는데 힘을 보태었다. 이 둘은 1894년 당시 전북 임실군의 사찰에 있었다. 이들의 항일 의식은 바로 이 시기 이 지역의 동학혁명의 사회적 흐름을 체험하고 온 자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주도로부터 시작하는 독립운동 의지를 가지고 제주도에 들어온 김연일은 법정사에서 신도들에게 반일사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고 결국 지역 주민 700여명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키웠다.

법정사의 김연일을 비롯한 승려들은 법정사 예불일을 통하여 일제의 국권침탈의 부당함을 신도들에게 역설하여 왔다. 지역의 불교도 및 농민들을 모아 조직을 구성하는 등으로 거사 6개월 전부터 구체적인 조직을 구성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노출되지 않고 예불일을 기하여 항일운동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한 금 순문학박사
한금순
문학박사

이는 당시 제주도민들의 외세에 대한 인식도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간 제주도민은 광청리 중심의 방성칠의 난, 대정 중심의 이재수의 난 등으로 외세 침탈의 폐해를 인식한 저항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의 정치 사회 경제적 수탈에 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법정사 승려들의 국권회복 활동 계획에 지지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1459호 / 2018년 10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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