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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⑨

권력과 부 쌓은 지방세력, 왕실과 함께 불교수용 주체로 등장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
읍락서 중앙집권으로 발전

17대 나물마립간에 이르러
전진서 불교수용 가능 높아

지증마립간때 ‘왕’ 호칭 사용
법흥왕, 율령반포·불교공인

철제 농기구·우경 보급으로
농업 생산성 비약적인 증가

잉여생산력으로 계급 분화
유력 농민·부유한 상인 등장

국보 517호 영천 청제비. 법흥왕 23년(536) 7000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저수지를 축조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국보 517호 영천 청제비. 법흥왕 23년(536) 7000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저수지를 축조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 즈음 신라는 사회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7대 나물마립간부터 22대 지증마립간의 시기로서, 신라사를 5시기로 구분할 때 제2기에 해당된다. 역사학에서는 이 시기의 왕호를 기준으로 ‘마립간(麻立干)’시대로 부르거나, 왕권이 매우 미약하고 지방에 대한 지배가 느슨한 상태라는 점에서 ‘연맹왕국(聯盟王國)’시대라 일컫기도 하였다. 또 고고학 분야에서는 이 기간에 조성된 왕경 중심 지배층의 독특한 무덤양식을 근거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시대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최근 발견된 신라의 3개 비석에 의거하여 6부가 각각 독자적 공동체로 정치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으며, 국가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회의체에 공동으로 참여하여 결정하고 집행하는 등 6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지배체제를 ‘부체제(部體制)’라 이름하고, 독자적인 시대로 설정하자는 주장이 새로 제기되었다. 나물마립간 때부터 지증마립간 때까지 150여년간은 신라가 읍락국가(또는 부족국가, 성읍국가) 단계인 사로국부터 중앙집권적 왕국인 신라로 발전하는 시기의 중간과도기에 해당된다. 또한 불교사 측면서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나물마립간, 또는 눌지마립간 때부터 법흥왕 14년(527) 불교 공인까지의 ‘전래시기’에 해당되는 때이기도 하다.

신라는 원래 진한 12개 읍락국가의 하나인 사로국으로 출발하였는데, 주위 다른 읍락국가들과의 연맹을 통해 발전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16대 흘해이사금까지 박(朴)·석(昔)·김(金) 3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면서 지배자의 칭호를 이사금(尼師今, ‘삼국유사’에서는 尼叱今)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17대 나물마립간(365~402) 때에 이르러 3성이 교대해서 왕위에 오르는 현상은 없어지고 김 씨가 왕위를 독점하고 세습하게 되었으며, 이사금 대신에 마루, 즉 높은 곳에 있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나물마립간 때에 사로국의 영역은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일대를 지배하는 연맹왕국을 형성하고, 고구려를 매개로 하여 중국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 인용한 ‘진서(秦書)’에 의거하여 나물마립간 26년(381)의 사신 파견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위두(衛頭)를 (고구려 사절을 따라) 전진에 보내어 토산물을 전하게 하였는데, 부견(苻堅)이 위두에게 ‘그대의 말에 해동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인가?’ 라고 질문하니, ‘이는 마치 중국에서 시대가 변하고 명호가 바뀐 것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옛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통해서 신라가 크게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 위두가 사신으로 간 381년은 전진왕 부견이 고구려에 승려 순도와 불경을 보내준 372년으로부터 불과 9년 뒤이다. 부견은 열성적인 호불군주로서 379년 도안을 맞이하기 위하여 양양을 공략케 하였으며, 382년에는 구마라집을 데려오기 위하여 구자국을 멸망시키려고 하였던 사실이 유명한데, 이들 명승들이 뒷날 중국불교의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중국 왕조와의 교류는 계속되지 못함으로써 불교전래의 계기는 되지 못하였다.

한편 나물마립간은 가야와 왜를 동원해서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고구려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45년(400)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5만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어 신라의 왕성에 침입한 왜인을 격퇴시켜 주고, 가야 지역까지 공략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른 눌지마립간(417~458)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이어 17년(433) 고구려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의 동맹을 체결하였다. 눌지마립간 때에는 고구려를 통하여 확실히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와 달리 ‘삼국사기’에서 마립간이라는 왕호의 최초 사용을 눌지마립간 때부터로 기록한 것을 보아 왕권의 강화과정에서 하나의 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본다. 자비마립간(458~479)을 거쳐 소지마립간(479~500) 때에 이르는 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고, 소지마립간 15년(493)에는 웅진으로 서울을 옮긴 백제의 동성왕과 혼인을 통하여 동맹을 더욱 굳게 하였다.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전도하려고 왔던 정방과 멸구자 등이 순교를 당한 것은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신라가 이상과 같은 대내·대외의 발전과정을 거쳐서 중앙집권적 왕국으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지증마립간(500~514)과 법흥왕(514~540) 때에 이르러서였다. 우선 지증마립간 4년(503) 정치적인 개혁으로 국명을 ‘신라(新羅)’로 결정하고, 마립간 대신에 “왕(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국명과 왕호를 바꾼 한화정책(漢化政策)은 단순한 명칭의 변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선진적인 정치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6년(505)에는 주군제(州郡制)를 제정하여 지방에 대한 지배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단계로 진입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거친 뒤의 법흥왕은 마침내 율령의 반포와 불교의 공인을 통해 연맹왕국의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서 중앙집권적인 왕국, 곧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와 통치이념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발전과 왕권강화의 기반에는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이러한 변화가 바로 불교 수용의 조건을 마련하였다. 4세기 후반~6세기 전반의 시기에 철제 농기구의 광범한 보급과 농업생산에 우경(牛耕)의 본격적인 이용,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는 획기적인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또한 농업생산성의 향상은 교역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인 변화는 사회체제 전반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요구하게 되었다.

청동기문화 단계에서는 청동기가 무기류나 장신구의 제작에 주로 사용되었고, 그 수량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농기구로는 목제나 석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철기문화의 수용은 무기류의 발달뿐 아니라 농기류의 다양한 발전을 가져와서 농지의 개간 단계부터 밭갈이, 씨뿌리기, 수확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농기구가 제작 사용되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1~3세기부터 철제 농기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유물의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고분과 유적에서 발견되는 철제 농기구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수량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런데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더불어 농업생산에서 획기적인 기술상의 변화는 소에다 쟁기를 메워 밭을 가는 우경의 보급이었다. 신라에서 우경 보급의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지증마립간 3년(502)에 “각 주군의 지방관에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고,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밭갈이하였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그러나 철제농기구의 보급상황을 고려할 때 이 때 처음으로 우경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기록은 이전부터 실시돼 오던 우경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권장하는 조치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다. 소지마립간 18년(496)에는 왕이 남쪽 교외에 나가서 농사짓는 것을 직접 관람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의 사례로는 ‘삼국사기’ 흘해이사금 21년(330)에 둑의 길이가 1800보인 벽골지(碧骨池)를 개착하였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백제의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된다. 신라에서는 눌지마립간 13년(429)에 2170보의 둑의 길이를 가진 시제(矢堤)를 축조하였고, 법흥왕 18년(531)에는 담당 관리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케 하였다는 사실을 보아 4~6세기에 저수지와 제방의 축조와 정비가 상당히 널리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경북 영천에서 발견된 청제비(菁堤碑)는 법흥왕 23년(536) 7000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저수지를 축조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4~6세기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업생산성의 향상은 결과적으로 잉여노동력과 잉여생산물을 증대시켰으며, 교역을 촉진시켜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 시장의 개설과 도시의 발달, 교통과 운수의 발달로 이어졌다. 소지마립간 12년(490) 처음으로 왕경에 시장을 개설하여 사방의 화물을 유통케 하였으며, 지증마립간 10년(509)에 동시(東市)를 개설하고, 이를 관리하는 시전(市典)을 설치했다. 시장의 발달은 도시의 발달로 이어져 왕경은 정치 중심지임과 동시에 각지의 물산이 집중되는 경제 중심지도 되었다. 자비마립간 12년(469) 왕경의 방리(坊里)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던 것은 도시의 발달에 따른 왕경의 정비조치였다. 또한 지방 도시로서는 지증마립간 15년(514)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은 교통과 운수의 발달을 수반하였다. 눌지마립간 22년(438) 우거(牛車)의 법, 지증마립간 6년(505) 선박 이용을 권장하였다. 또한 소지마립간 9년(487)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수리케 하였다. 국가는 증가하는 교역량과 도시나 읍락들 사이의 물자 교역을 위해 도로망을 지속적으로 정비해야만 했으며, 또한 지방의 행정조직이 체계화되면서,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도 도로망의 정비가 요구되었다. 당시 도로 건설 개념은 오늘날과 같이 도로를 새로 놓는 것이 아니라, 주로 기존의 도로를 확장하고 정비하는 수준이었다. 당시의 중요한 교통로는 육로와 수로로 나뉘어졌는데, 육로는 소백산맥의 계립령(조령)을 넘어 문경-상주-선산-대구-경주로 연결되는 길과 죽령을 넘어 영주-안동-영천-경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수로는 낙동강과 그 지류를 이용한 내륙의 길과 동해안의 연안을 따라 삼척-강릉으로 연결되는 해로가 있었다.

그런데 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잉여노동력과 생산물의 증가는 읍락공동체 안의 농민층의 분해로 계층분화를 가져왔으며, 토지와 생산기술을 소유한 부유층과 토지에서 유리되는 빈민층으로 나눠지는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소지마립간 11년(489) 유식(遊食)하는 백성들을 모아 농업에 종사케 한 조치는 계층분화로 몰락하게 된 농민에 대한 대책이었다. 또한 상업·수공업의 발달과 도시화는 이에 종사하는 계층의 증가와 분화를 가져왔는데, 이들 중 농업생산에서 유리된 계층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6세기 읍락공동체의 해체와 이로 인한 계층의 분화과정에서 새로운 지방 세력으로 등장한 유력한 농민과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이 불교 수용과정에서 신라의 왕실과 함께 하나의 유력한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결국 4~6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불교수용의 기반을 조성하는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기원전 6~5세기 석존 당시 인도의 사회경제적 변화과정과 비교 고찰이 요구되는 문제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59호 / 2018년 10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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