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석사자상이 겪은 수난
28. 석사자상이 겪은 수난
  • 이숙희
  • 승인 2018.10.10 10:50
  • 호수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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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파괴·도난·밀반출까지 빈번

고대 불교조각에서 볼 수 없는
생동감과 익살스런 미도 갖춰
일제강점기 이후도 도난 반복

천안 광덕사 석사자상 2구는
여러차례 밀반출 후 되찾기도

불국사 다보탑 상층기단 사자
네 귀퉁이 4구 중 1구만 남아
광덕사 석사자상, 조선 후기, 높이 90㎝. ‘불교문화재도난백서’(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1999).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 대웅전 계단 양쪽에 놓여 있는 조선 후기의 석사자상 2구는 여러 차례 불법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사진 1) 이 석사자상은 1985년 4월20일에서 25일 사이에 도난당하였으나 5월24일 되찾아와 원래의 위치에 놓여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덕사 석사자상은 높이 90㎝로 마모가 심하여 세부표현이 뚜렷하지 않다. 받침돌은 따로 조각하지 않고 같은 돌로 구성하였다. 사자는 정면을 향한 채 두 다리를 가지런히 세우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다. 얼굴은 거의 수평인데 입을 약간 벌린 모습이며 이빨도 매우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사자의 얼굴과 등 위에는 갈기가 얕게 선각되어 있다. 이러한 사자상은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4사자석탑에 보이는 통일신라 후기 사자상 형식을 계승한 것이다.

석사자상은 고대 불교조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단순하고 익살스러운 미를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도난·파괴되거나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어 왔으며 지금까지 그 소재지조차 파악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데 사자상이 왜 사찰이나 불상, 석탑, 부도, 석등, 능묘, 궁궐 등에 쉼 없이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연유된 것일까? 하는 등등 많은 의문이 따르게 된다.

불교에서는 흔히 사자가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조복시키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신격화되거나 제왕으로 상징되었다. 또 그 용맹함 때문에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제왕과 성인의 위력을 사자에 비유하여 불교경전에서도 석가를 ‘인중사자(人中獅子)’라 칭하였고, 그 설법 또한 모든 희론(戱論; 쓸모없는 이론)을 멸하는 것에서 ‘사자후(獅子吼)’라 하였다.
 

불국사 다보탑 석사자상, 통일신라, 높이 64㎝. ‘신라의 사자’(국립경주박물관, 2006). 

‘고승법현전’에는 사자가 크게 울면 모든 마귀들이 두려워하여 따른다는 기록이 있다. ‘화엄경’과 ‘법화경’에는 ‘사자분신(獅子奮迅)’이라고 하여 부처가 대비(大悲)를 일으키는 것을 사자가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양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대지도론’ 권4에는 불상의 32길상 중에 ‘상신여사자상(上身如獅子相; 상체의 위용과 단정함이 사자와 같다)’이라든가 ‘사자협상(獅子頰相; 두 볼의 통통함이 사자와 같다)’ 등 부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사자를 비유했을 뿐 아니라 사자는 석가불, 비로자나불 및 문수보살의 대좌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서울의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좌상의 대좌 좌우 양쪽에 배치된 사자상에서 불교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사자좌(獅子座)는 대좌의 형태에서 유래된 이름이 아니라 부처가 사자와 같은 위엄과 위세를 가지고 중생을 올바르게 이끈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이 대좌의 일부로 조형화된 사자상은 부처의 위엄을 상징하는 역할보다는 점차 수호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석탑이나 석등, 능묘 주위에 환조상으로 표현되거나 석조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장엄용의 부조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탑 주위에 독립된 사자상을 배치하는 형식은 신라시대의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이른 시기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국사 다보탑과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에서도 기단 위 네 모서리에 4구의 사자상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

불국사 다보탑에는 원래 상층기단 네 귀퉁이에 4구의 석사자상이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1구밖에 남아 있지 않다.(사진 2) 불국사를 최초로 방문한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1902년 이 탑을 조사했을 때 기단의 사방에 4구가 있었으나 1909년에 다시 왔을 때에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춘 2구가 없어졌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석사자상 1구는 일본 우에노(上野) 서양헌(西洋軒)의 정원에 진열되어 있고 나머지 1구는 파리박물관에 있다가 영국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나머지 2구 중 1구도 그 뒤 또 다른 일본인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다보탑의 석사자상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한일회담 때 논의된 바 있으며, 일본의 방송과 라디오까지 동원하여 수소문해 봤지만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석사자상, 통일신라, 높이 50㎝. ‘신라의 사자’(국립경주박물관, 2006).

경상북도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의 석사자상 역시 언제, 어떻게 도난 되었는지도 모른 채 2구만 남아 있다.(사진 3) 2구 중 암사자상은 세 마리의 새끼를 품은 채 한 마리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형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일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장 오래된 귀중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도 기단부 위에 사자상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나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한편으로는 석탑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사자상들이 탑 구조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상층기단의 네 모퉁이에 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고 탑신부를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식의 4사자석탑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탑 형식에서 비롯된 순천 선암사 화산대사사리탑은 특이한 예에 속하는 것이나 사리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 사자상 2구가 1986년 2월에 도난 되었다.(사진 4) 현재 사자상이 있었던 기단석에는 다른 석물이 대신 놓여 있다. 이러한 사자상은 법당 앞에 세워두는 석등의 조형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석등의 간주석 대신에 2마리의 사자가 가슴과 앞발을 맞대고 상대석을 받치는 쌍사자석등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였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을 비롯한 광양 중흥산성 절터, 합천 영암사 절터 쌍사자석등에는 이처럼 기발한 조형미가 있다.
 

선암사 화산대사사리탑, 고려. ‘도난문화재 도록Ⅲ(지정편)’(문화재청, 2010).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위봉사 대웅전에 있었던 목조사자상 2구는 1988년 9월5일에 도난 되었으나 20일 만인 9월24일 다시 돌아왔다. 같은 해 11월6일에는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사의 석사자상이 도난 되었으며 12월1일에는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대원사에 있던 조선 후기의 목조사자상이 사라졌다. 이외에도 경복궁 근정전 주변의 석조난간이나 계단, 다리 아래에 조각된 석사자상이나 석조 건축물의 모서리 기둥에 표현된 석사자상은 근엄하거나 사납기는커녕 하나같이 장난기 많고 앙증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렇듯, 석사자상은 우리들이 친근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조형물이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459호 / 2018년 10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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