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문명발전의 역설
117. 문명발전의 역설
  • 최원형
  • 승인 2018.10.15 15:39
  • 호수 14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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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훼손·재해는 발전패러다임이 남긴 그림자

지난 100년 이룩한 산업발전
지구생태계 맘껏 유린한 결과
경쟁전제한 발전, 한계에 봉착
욕망 성찰할 수 있는 지혜 절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화가 난 사람이 돌을 던지는 대신 최초로 한 마디 말을 내뱉던 그 순간 문명이 시작됐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문명이 매우 발전했다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명이 발전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흔히 문화와 문명을 혼용해서 쓰기도 하는데 문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대체로 문화는 종교, 학문, 예술, 도덕 등 정신적인 움직임을 가리키고, 문명은 보다 더 실용적인 생산이나 공업, 과학, 기술과 같은 물질적인 방면의 움직임을 가리킨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에 의해 이룩된 것을 문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니 문명이 발전한 사회란 과학 기술이 발전한 사회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발전이라는 낱말이 부상하게 된 계기는 트루먼의 취임식에서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뒤를 이어 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1949년 1월, 취임 연설에서 트루먼은 미국의 새로운 정책을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정책이란 미개발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경제적 원조를 행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개발 그리고 발전, 이 두 낱말에 새롭게 생명이 불어 넣어졌다. 미개발은 아예 그 이전에 쓰이지 않던 말이었다. 발전은 트루먼이 연설 과정에서 의미를 바꿔버렸다. 트루먼의 연설이 갖는 의미는 몇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미개발 혹은 미개한 나라의 정의였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재편했다. 유럽 몇 나라와 미국만이 선진적인 곳이며 나머지는 모두 미개하다는 의미다. 사실 황화문명이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그리고 남미의 마야, 아즈텍 문명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꽃피웠던가? 그런데 그 모든 문명을 다 서양 아래에 두었다. 재미있는 것은 소비가 속도를 내면서 증가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무렵부터라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화석연료에서 배출되는 탄소, 채굴하는 광물의 양이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구의 온도까지 모든 것이 1950년을 기점으로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발전이란 뭔가? 사전적 의미의 발전은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걸 가리킨다. 그렇다면 과연 발전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낫고 좋은 상태 혹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건지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세계화는 오늘날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식민지주의나 제국주의도 일종의 세계화였으니까. 미개발 국가를 발전시키겠다는 것 역시 이런 패러다임의 연장선상에 있다.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 경제발전이 트루먼의 연설을 통해 주류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제발전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선물했다. 그런데 한정된 지구라는 환경에 살고 있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모두가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되고 풍요롭게 산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00년여의 기간 동안 산업이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동안 화석연료가 뒷받침해주었고 지구는 어떤 착취나 어떤 폐기물도 다 받아들이고 허용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 그 두 가지 모두가 한계에 다다랐다. 그 한계의 총합이 산림파괴, 기후변화와 생물종 다양성 감소, 쓰레기라는 이름을 달고 우리 앞에 다가왔다. 기후변화는 그간의 화석연료를 사용한 대가이며 풍요로움의 대가다. 지구 생태계를 맘껏 유린한 결과 생물종 감소라는 그래서 여섯 번째 대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소수계층으로 부의 축적은 극심한 불평등을 낳았다. 불평등은 분배의 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과연 이러한 현상적인 모습들을 돌아보며 우리 인류가 지금 발전하고 있기는 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이 든다. 우리가 꿈꿔오던 발전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자각이 절실하다. 발전은 경쟁을 전제로 한다.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 많은 인구가 언제까지 경쟁할 수 있을까? 극심해지는 폭염도 강력한 태풍도 가뭄도 혹한도 모두가 발전이 가져다준 그림자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다시 붓다 가르침의 핵심인 사성제를 생각한다. 우리의 괴로움을 확연히 자각한다면 이미 오랜 전통 속에 그 지혜가 담겨있다. 물질의 풍요로움에 탐착하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욕망의 뿌리는 두려움이 아닐지. 경쟁에서 남보다 뒤질까, 남보다 덜 가질까 하는 바로 그 두려움이 모두가 인과의 그물 속에 연결돼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하는 건 아닌지. 그 욕망을 성찰할 수 있는 지혜, 욕망의 불길을 끌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한 시대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60호 / 2018년 10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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