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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처능대사 ‘간폐석교소’, 목숨 걸고 승단 지켜려는 호법승 의지 담겨

양란 이후 즉위한 현종
출가 금하고 강제 환속
자수원·인수원 철폐하고
선교 양종 수사찰이었던
봉은사·봉선사 폐사 시도

조선 중기 태어난 처능 스님
출가 후 한문·유학도 수학
목숨 걸고 현종에게 상소
폐불의 부당함 지적하며
일목요연한 논리로 반박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10월12일 봉은사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백곡 처능의 간폐석교소’를 주제로 기조강연하며 “호법승 처능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10월12일 봉은사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백곡 처능의 간폐석교소’를 주제로 기조강연하며 “호법승 처능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정왕후에 의해 잠시나마 부흥의 빛을 보았던 불교계의 고승들은 유생들의 탄압에 의해 산중으로 들어가 살아야 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승병을 이끌고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소 호전되었지만, 위정자 및 유생들의 부당한 핍박과 시달림은 계속됐습니다.

조선 18대왕 현종은 즉위와 동시에 양민이 출가하여 승니가 되는 것을 금하고, 이미 승니가 된 승려들도 환속할 것을 권하거나 명령하였습니다. 그는 서울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과 인수원을 철폐하고 거기에 모셨던 열성의 위판을 땅에 묻어버렸으며, 사찰 소속의 노비와 위전은 모두 본사로 돌리게 했습니다. 승려들은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연히 은둔적·체념적인 삶을 택하거나 아니면 주변 환경에 적절히 대처하여 반승반속의 경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백곡 처능(1619∼1680)대사는 이와 같은 가혹한 불교탄압 속에서 정면으로 맞서 호불의 뜻을 밝혔던 호법승이었습니다. 처능은 현종이 불교를 탄압하자 그에 항의하는 장문의 ‘간폐석교소’를 올려, 조선왕조 척불책과 배불사상의 잘못된 부분을 인식시키며 바로 잡고자 했습니다. 이 탄원형식의 ‘간폐석교소’는 조선시대 모든 상소문 중 가장 길고 분량이 많은 것이었으며, 현종의 불교에 대한 박해를 어느 정도 방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처능은 광해군 9년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가던 조선 중기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속성은 전씨이고 법명은 처능이며, 백곡은 그의 법호입니다. 처능은 12세에 의현에게 글을 배우다가 불경을 읽고 그 깊은 이치에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하였고, 15세에 출가하여 속리산에서 2∼3년 동안 불법을 배웠습니다. 17, 18세 무렵 서울에 올라간 처능은 불학보다는 잠시 한문과 유학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 주로 동애 신익성(1588~1644)의 집에 머물면서 경사와 제자의 책을 읽고 시문을 체계적으로 배워 사대부들과 함께 교류할 정도로 시문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신익성의 집에서 4년을 지낸 처능은 어느 날 문득 경사에 대한 지식이나 뛰어난 문장이 하잘것없는 것임을 깨닫고 지리산 쌍계사의 벽암 각성(1575∼1660)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각성은 부휴 선수(1543∼1615)의 600여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는 고승입니다. 이러한 벽암각성의 법을 전해 받았으므로, 처능은 곧 부휴선수의 법손(法孫)이 됩니다.

처능은 이미 15세 때 속리산에서 출가한 몸이기는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출가는 이때 비로소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나이 20세를 조금 넘겼을 무렵의 일입니다. 각성의 문하에서 20여년간 수행에 전념한 처능은 수선(修禪)과 내전(內典)을 익히는 가운데 스승의 의발을 전수받았으며, 그 후 중년에는 서울 근교의 산사에 머물렀습니다. 1674년(현종 15년) 김좌명의 주청으로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에 있다가 3개월이 채 못 되어 사임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처능은 얼마동안 남북을 오가는 운수행각을 하며 속리산·성주산·청룡산·계룡산 등지에서 산림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전법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은 대둔산의 안심사였으며, 1680년(숙종 6년) 봄 모악산 금산사에서 큰 법회를 개최한 이후 7월에 세수 64세, 법랍 49세로 원적에 들었습니다.

대사의 입적 이후 사리 세 조각이 나왔는데, 이들 사리는 금산사와 대둔산의 안심사, 계룡산의 신정사에 각각 나누어 모셨다고 합니다. 현재의 금산사에서 심원암으로 가는 동쪽 길을 300m 쯤 오르면 왼쪽 산기슭에 부도전이 있습니다.

처능은 1661년(현종 2년) 무렵 ‘간폐석교소’를 상소한 것으로 보이며, 상소의 직접적인 계기는 현종이 행한 각종 폐불정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처능은 이 시기 행해진 조치들을 황망하게 인식하면서, “삼가 조보(朝報)에 인하여 엎드려 성지(聖旨)를 받잡건대, 승니를 모두 사태시켜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비구도 역시 없애기로 의논이 되었다 하는데, 신은 실로 우둔하여 전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엿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현종은 즉위하자 곧바로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또한 승니가 된 자는 모두 환속시키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죄를 부과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이듬해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은 이를 수용하여 도성 안에 있던 자수원과 인수원의 혁파를 명령하게 됩니다. 또한 자수원에 봉안되어 있던 열성(列聖)의 위판을 땅에 묻도록 했으며, 선교양종 수사찰인 봉은사와 봉선사까지도 폐하여 승려를 환속시키는 조치를 취하고자 했습니다. 처능은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상소 제출이라는 방법으로 그 부당성을 주장하려 했던 것입니다.

처능의 호불상소인 ‘간폐석교소’는 크게 두 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첫째는 폐불의 이유로 추정되는 여섯 가지 주장에 대한 반박 내용이며, 둘째는 불교 무용론(無用論)에 대한 여섯 가지 조항의 반박 내용입니다. 전자나 후자 모두 여섯 가지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폐불의 이유로 거론되고 있는 사항들에 대한 처능의 반박 담론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간폐석교소’ 내용 전체를 살펴볼 수는 없으며, 오늘은 첫째 내용, 즉 이방역(異邦域), 수시대(殊時代), 무윤회(誣輪回), 모재백(耗財帛), 상정교(傷政敎), 실편오(失偏伍) 등 여섯 가지 폐불 주장에 관한 처능의 호법론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방역’은 불교가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가 아니고 이방(異邦)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능은 ‘간폐석교소’에서 이방역의 주장에 대해 중국 사람이라고 다 우수한 것은 아니며, 사상의 탄생지보다는 사상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반박합니다. 또 중국이 중심이고 나머지 지역이 변방이라는 주장은 부당하다고 지적합니다.

‘수시대’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중국인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이 통치했던 상고시대에 출현한 성인이 아니므로 배척되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처능은 이 같은 논리에 대해 “모두 때는 다르나 일은 같은 것이며, 시대는 다르나 이치는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곧 진리의 보편성, 상대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입니다.

인과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 윤회를 없는 것처럼 꾸며 댄 것이 ‘무윤회’입니다. 윤회설과 혼불멸설은 유생들이나 국수주의자들, 특히 배불론자들에겐 끊임없이 불교를 공격하는 빌미로 작용했습니다. 처능은 다양한 업력의 결과가 다양한 인간군상과 사회현상을 만들어 낸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도전 이후 지식인 사회에 널리 유행되었던 윤회설과 인과응보설의 비판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어서 한결 이채롭고 명징한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승려가 농사를 짓지 않고 놀고먹으면서 재물을 소비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모재백’입니다. 조선시대 배불론자들에게 이 문제가 더욱 크게 부각되었던 것은 고려시대 사원경제의 각종 폐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처능은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유생들의 사고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예를 제시한 이후, “그러므로 벼슬자리에 나가 일하는 사람이 반드시 농사를 지어 밥을 먹는 것이 아니며, 안방에 깊이 사는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길쌈하여 옷을 지어 입는 것이 아닙니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정교’는 출가자들이 정교를 손상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의 정교는 물론 유교의 강상(綱常)이나 공자의 가르침 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배불론자들은 불교가 치세와 백성의 교화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 땅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결국 ‘상정교’의 문제는 승려 개개인의 범법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처능은 ‘상정교’의 문제를 승려 개개인의 단순한 범법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선비가 설혹 죄가 있더라도 직접 공자의 허물과 관계없으며, 승려가 잘못이 있다고 해서 어찌 그것이 석가모니의 허물이겠는가?”라는 주장을 통해서도 이 같은 측면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실편오’는 승려들이 요역을 기피하여 병역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각종 공역이나 사역에 동원되고 있었고,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가적인 위기 때는 승군을 조직하여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군역의 문제는 논란의 중심에 있어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처능은 이에 대해 “중국에 바친 종이도 모두 승려들이 만든 것이고, 상사에 바치는 잡물도 모두 승려들이 준비합니다. 그밖에도 온갖 역사의 독촉이 너무 많아 아문(衙門)에서 겨우 물러나오면 관청의 명령이 계속 내리는데, 바빠서 때를 놓치면 옥에 갇히기도 하고, 창졸해서 어쩔 줄 모르면 매질을 받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승려들이 군역의 문제를 떠나 실질적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해 공헌한 바가 많다는 사실을 사례를 들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백곡 처능대사는 대문장가이면서 선교와 내외전을 두루 겸비한 학승이자 고승이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불교 교단을 지켜내려 했던 그의 호법 의지는 분명 이러한 면모를 자양(資糧)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처능은 한국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호법승’으로서의 위상을 오늘날까지 간직하게 됐습니다. 처능대사의 ‘간폐석교소’는 ‘호법승 처능’으로서의 위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글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연은 서울 봉은사가 주최하고 중앙승가대 불교학연구원이 주관해 10월12일 서울 봉은사에서 열린 ‘문정왕후와 백곡처능의 호법 활동’ 주제 학술대회에서 원행 스님이 ‘백곡 처능의 간폐석교소’를 주제로 한 기조강연을 요약한 것입니다.

 

[1460호 / 2018년 10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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