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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법성게’ 제8구 :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

기자명 해주 스님

“하나와 많음이 평등하니, 하나가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

중생세간·기세간·지정각세간
각기 다르지만 삼세간 원융

‘반시’에서 검은 글자 없애면
흰종이와 붉은 줄 다 없어져

이런 이유로 중생세간 떠나면
기세간과 지정각세간도 없어
의상 스님, ‘수십전유’로 설명

“연기 실상 다라니법 보려면
마땅히 수십전법 배워야”역설

하나가 일체이고 또 열이니
중생 교화 수에 걸리지 않아

마음·중생·부처 차별 없음은
중생이 부처임을 깨닫게 해

진성이 연을 따라 이루는 연기(緣起)의 뜻 가운데, 다라니의 덕용[用]을 밝힌 것이 ‘법성게’ 제8구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라는 이 구절은 하나와 일체, 이것과 저것이 상즉하는 즉문 도리를 읊은 것이다.

“일즉일체다즉일”이 다라니의 용에 해당하는 점에 대하여 진수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 앞은 중문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힘이 없는 문[有力無力門]이고, 이것은 즉문(卽門)이기 때문에 체가 있고 체가 없는 문[有體無體門]인데, 어째서 용(用)이라 하는가?
[답] 이것은 곧 인연의 당체(當體)로서 원인에 즉하고 결과에 즉하는 뜻을 용이라 이름 한 것이고, 역용(力用)의 용이 아니다. (‘진수기’)

연기다라니의 용이란 역용의 용이 아니고 덕용(德用)의 용이다. 즉 “일즉일체다즉일”은 체(體)와 용으로 말할 경우, 체의 측면임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도봉 유문 스님도 중문인 상입은 역용의 측면이므로 서로 의지함에 힘이 있고 없음의 뜻이고, 상즉은 체의 측면이므로 서로 형체를 빼앗음에 체가 있고 없음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화엄경’은 이 하나와 일체의 상즉경계 또한 무진장하게 펼치고 있다.

“약일즉다다즉일 의미적멸실평등(若一即多多即一 義味寂滅悉平等).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라 하더라도, 의미가 적멸해 다 평등하다.” (‘보살십주품’)

경에서는 하나와 많음이 다 평등하니 하나가 곧 많은 것이며 많은 것이 곧 하나임[一即是多多即一]을 설하고, 일즉다를 말하며 다즉일을 말하는[說一卽多 說多卽一] 광대한 법을 배우게 한다.(‘십주품’) 또 한 세계가 곧 무량무변 세계이고 무량무변 세계가 곧 한 세계임을 잘 알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초발심보살공덕품’)

부처님께서 한 장소에서 설법을 하시면 온 법계에서 동시에 설법이 이루어지며, 같은 명호[同名同號]의 부처님과 보살도 한량없이 출현하신다. 뿐만 아니라 화엄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인 삼세간이 서로 다르지 않음도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화장세계에 있는 티끌 하나하나에서 법계를 본다.”(‘화장세계품’) “일체 중생신 중에 다 일체 부처님의 자재 신통을 나툰다.”(‘십회향품’) “세계 중에 갖가지 중생신이 있고 중생신 중에 다시 갖가지 세계가 있다.”(‘십지품’) “여래의 청정신 중에 널리 중생신을 나투신다.”(‘보현보살행품’) ‘여래신 중에 다 일체 중생이 발보리심하고 보살행을 닦고 등정각 이루는 등을 본다.’(‘보왕여래성기품’) ‘마야부인신 중에 천궁전과 천룡팔부 등을 나타낸다.’(‘입법계품’) ‘보현보살신 중에 삼세 일체 경계와 일체 부처님 세계와 일체 중생과 일체 부처님출현과 일체 보살중 등을 다 나타낸다.’(‘입법계품’)

이러한 교설에서 보이듯이 중생세간인 중생신, 기세간인 갖가지 세계, 그리고 지정각세간인 여래신과 보살신 등이 각기 다른 세간을 나타내고도 있으니, 삼세간이 원융함을 알 수 있다.

도봉유문 스님 진영. 운문사 제공

의상 스님은 이 융삼세간을 ‘반시’로 그려내고 있다. ‘반시’에서 만약 검은 글자를 없애면 흰 종이와 붉은 줄도 모두 없어진다. 즉 종이와 줄이 글자와 떨어진 것이 아니고, 글자에 줄과 종이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세간을 떠나서는 기세간과 지정각세간도 있을 수 없고, 중생에게 기세간과 지정각세간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을 상징한다. 이 중생세간처럼 지정각세간과 기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가 평등한 융삼세간불인 것이다.

이 융삼세간불은 십신(十身) 무애의 부처님이다. 십신 중에서 중생신·업보신은 중생세간이고, 국토신·허공신은 기세간이고, 성문신·연각신·보살신·여래신·법신·지신(智身)은 지정각세간에 해당한다. 삼세간이 다 부처님인 것이다.

이러한 삼세간은 해인삼매에 의한 것이다. 삼세간의 해인은 통틀어 말해서 불해인(佛海印)이다. 부처님 정각의 보리심[佛正覺菩提心] 바다에 비친 만상이 실은 바닷물뿐인 것처럼 일체가 부처님인 것이다.

이 상즉도리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서 일어난 파도[東風波]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서 일어난 파도[西風波]의 비유로 설명되고 있다. 동풍파와 서풍파가 둘이 아닌 것이 상즉이다.

두 파도의 체가 물로서 둘이 아니므로 상즉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이 파도는 자성의 파도가 아니기 때문에 저 파도에 있고, 저 파도는 자성의 파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파도에 있는 것이 즉문이다. 만약 이 파도가 아니면 곧 저 파도가 없고 만약 저 파도가 아니면 곧 이 파도가 없는 것은 중문이다. (‘도신장’)

의상 스님은 이 즉문의 연기법 역시 수십전유로 보이고 있으니, 일즉십(一卽十)은 향상거(向上去), 십즉일(十卽一)은 향하래(向下來)로 설명한다.

향상거의 경우, 첫째는 하나이니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가 곧 열이다.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즉십은 하나에서 열로 올라간다.

향하래의 경우, 첫째는 열이니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이 곧 하나이다.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즉일은 열에서 하나로 내려온다. 나머지 여덟 문은 예에 준하니, 이 뜻으로 하나하나의 동전 가운데 열 가지 문을 갖춘다고 한다.

그래서 수십전유로 보인 동전을 초발심보살의 공덕에 견주고도 있다. 즉 ‘처음 발심한 보살의 일념(一念) 공덕이 다할 수 없다.’(‘초발심공덕품’)는 교설은 첫째 동전과 같으니,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또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은 둘째 동전 이후와 같으니,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그리고 하나의 동전이 곧 열 동전인 일즉십(一卽十)은 “처음 발심한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범행품’)는 도리와 같으니, 수행의 바탕[體]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상 스님은 연기실상다라니를 수십전법으로 설명하면서 “만일 연기 실상의 다라니법을 보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수십전법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균여 스님도 의상 스님의 이 말씀에 주목하고 보현행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수십전법의 방법을 따라 연기관을 배워야 할 것을 강조한다. “수십전법은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약이고, 열반의 걸림없는 공덕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다”라는 ‘개종기(開宗記)’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더하고 있다.

“만약 수십전법을 배우면 보는 곳마다 집착이 없게 되고 듣는 곳마다 집착이 없게 되므로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였다. 수십전법을 배우면 자기 몸을 떠나지 않고서도 하나하나의 터럭 구멍에서 많은 부처님을 뵙고,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많은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머무르는 곳이 부처님의 법계임을 보고, 또한 자기의 몸이 부처님 몸이고 자신의 마음이 부처님의 지혜임을 보게 되므로 열반의 무애 공덕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일승법계도원통기’)

균여 스님은 또 이러한 수십전법에서 세로로 나열된 열 개의 동전에 세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낱낱 동전 자체는 체전(體錢)이고, 첫째 내지 열째 동전은 위전(位錢)이고, 하나 가운데 열이고, 하나가 열인 동전은 덕전(德錢)이다. 같은 동전인데 연 따라 다르고, 연 따라 다르지만 동전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가 열이고 일체이니,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함에 중생의 수에 걸리지 않는다. 선재동자의 선지식 가운데 자재주동자는 이러한 산수를 잘하는 해탈문을 보이고 있다. 화엄법계의 계산법은 하나가 일체이고 일체가 하나인 셈법임을 알 수 있다.
설잠 스님은 하나의 법이 있으므로 일체가 있고 일체가 있으므로 하나가 있으며, 중생이 있으므로 제불이 있고 제불이 있으므로 중생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와 일체, 중생과 제불이 둘이 없고 걸림 없음을, 송대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의 게송을 빌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죽영소계진부동 월천담저수무흔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대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고, 달빛이 못 바닥을 뚫어도 물에 흔적이 없다.(‘화엄일승법계도주’)

‘야마궁중게찬품’의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는 상즉 법문은, 단적으로 중생이 부처임을 깨닫게 해준다.

마음이 중생이고, 마음이 부처이다. 내가 중생이냐, 내가 부처이냐는 마음쓰기 나름이다. 요즈음 ‘내안의 나’를 만나러 힐링의 길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내안의 나를 만난다는 것은 참 나를 만나는 것이고, 참 나를 만난다는 것은 본래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본래의 나는 바로 부처님이니, 본래의 나인 부처님을 만남은 부처님과 다르지 않은 중생들을 만남이다. 나와 더불어 있는 모든 존재가 바로 나임을 보게 되면, 일체에 걸림 없이 자재한 삶의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60호 / 2018년 10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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