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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광주 십신사지(十信寺址)

기자명 임석규

중국서 파생된 화엄밀교의 고려 전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현재는 절터를 주택가로 개발
절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어

석비와 석불 함께 발견돼
대학과 박물관에 따로 이전

돌에 다라니 새겨진 관계로
비석이 아닌 석당으로 봐야

석당은 북에 두 개가 존재
남한에는 십신사지가 유일

석당 건립연대는 세종 추정
고려시대 작품 주장도 있어

십신사지 다라니석당.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92번지 일대는 현재 주택가로 개발되어 있어서 사찰이 있던 곳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원래 십신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십신사의 터로 알려진 것은 현재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져 있는 십신사지석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제 제3호)와 십신사지석불(광주광역시 유형문화제 제2호)이 처음 보고되었을 당시 위치가 광주농업고등학교(임동 92번지)였기 때문이다. 광주농고가 1975년에 이전하면서 그 부지가 택지로 불하되었고 현재의 임동 92번지 일대는 주택가가 된 것이다. 한편 석비와 석불을 이전할 당시 기록을 보면 1975년 가을 도문화재회의에서는 석비를 전남대학교로, 석불은 광주시립박물관으로 이전키로 결정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그 후 1977년 도문화재회의에서 석비에서 동북쪽 약 20m 떨어진 임동 92-12번지의 노거수 근처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78년에 이전작업을 완료하였으나, 다시 1990년 10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십신사지석비는 형태가 비석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으로 지정되었지만, 비신의 상부에 ‘대불정존승다라니당(大佛頂尊勝陀羅尼幢)’이라는 제액이 음각되어 있기 때문에 경당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

비는 귀부와 비신, 옥개석으로 나누어 조성하였다. 옥개석과 비신의 상단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석질의 특성상 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비의 규모를 살펴보면 전체높이는 5.25m로, 280×165cm의 지대석위에 249×132×60cm 규모의 귀부를 놓고 98×49×396cm 규모의 비신을 올렸으며, 옥개석은 높이가 30cm 정도이다.

지대석은 장방형으로 다듬은 돌을 여러 개 이어서 바닥에 깔고 귀부의 다리를 음각하였다. 귀부는 비좌부분에서 가로로 2등분하여 2개의 석재를 합쳐서 제작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육면체의 틀을 유지하면서 머리와 발을 간략하게 조각하였고, 귀갑문 안에는 ‘왕(王)’자가 새겨져있다. 비신은 정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우나, 측면은 세장한 마름모꼴이다. 옥개석은 팔작지붕 형태이며 장방형철정을 사용하여 비신과 결구하였다.

비신의 전면에는 외곽에 방형 구획선을 넣고, 상단에 범어의 옴(om:唵)자를 도안화하여 새겨 넣었으며, 그 아래에 가로로 ‘대불정존승다라니당(大佛頂尊勝陀羅尼幢)’이라는 제호를 새겨 놓았다. 현재는 비면의 마멸이 심하여 옴자문양 이외의 글씨는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지만, 1978년 조사보고에서 탁본을 통하여 그 내용이 일부 판독되었다.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 ‘정사(丁巳)’라는 간지가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 석비의 건립연대를 1437년(세종 19)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고려시대 작품이라는 의견도 있다.

십신사지 석불.

이러한 석당(石幢)은 현재 황해도 해주와 평안북도 용천에 남아있지만 남한에는 이 십신사지석비가 현재까지는 유일한 사례이다. 형태는 석비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경전을 새겨 넣은 당(幢)이라는 점에서 지정명칭도 ‘십신사지 불정존승다라니석당(石幢)’으로 변경해야 할 것이다.

거대한 돌에 범자로 새겨 놓은 다라니와 조금은 생소하기도 한 ‘불정존승다라니경’이라는 경전의 내용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경전을 번역한 불타파리(佛陀波利)의 서문을 보면,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 대중 가운데 선주(善住)라는 천자(天子)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밤 하늘로부터 “너는 7일 후에 죽을 것이고, 죽은 다음에는 일곱 번을 축생으로 태어나 지옥의 고통을 겪다가 다시 눈먼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선주는 제석천에게 그 고통을 면할 수 있는 방도를 물었고 다시 제석천은 부처님에게 나아가 물었다. 그때 부처님이 설해주신 다라니가 바로 이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라는 것이다.

즉, ‘불정존승다라니’는 줄여서 ‘불정다라니’ 또는 ‘존승다라니’라고도 하는데, 부처의 특징을 보여주는 32상 중 정수리 부분의 육계(肉髻)를 불격화 한 것이다. 부처님의 공덕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지혜 즉 불지(佛智)를 인격화한 것이다. ‘불정존승다라니경’의 요체인 다라니는 주로 나와 모든 중생의 육신이 깨끗하게 정화되길 기원하고, 다시 올 수명의 깨끗함과 그 수명을 유지하는 행동의 청정함을 기도하는 내용이다. 게다가 이 다라니는 멸죄(滅罪)·연명(延命)·액난 제거 등에 효험이 많아 내세는 물론 현세 이익적 경향이 많은 경전이었기 때문에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실크로드 주변지역, 넓게는 중앙~동아시아권내에서 열렬하게 신앙되었다. 중국에 전래된 ‘불정존승다라니경’은 중기밀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이전부터 여러 승려들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가장 널리 애용된 번역본은 불타파리가 번역한 것(대정신수대장경 No.967)이다. 불타파리의 번역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다라니를 써서 높은 당위에 두거나 높은 산에 두거나, 혹은 누 위에 두거나, 탑 속에 안치하여, (중략) 당의 위를 보거나 혹은 가까이 다가서서 그 그림자가 몸에 비추거나 혹은 바람이 불어 당 위에 있는 다라니에서 먼지가 날아와 몸에 붙기만 하여도,(중략) 저 중생들은 지은 죄업으로 악도에 떨어져 지옥, 축생, 염라왕의 세계, 아귀, 아수라의 몸 등, 받아야 할 악도의 고통을 전혀 받지 않고, 또한 죄의 때에 물들거나 더러워지지 않느니라. 네거리에 탑을 세워 다라니를 안치하고 합장하여 탑돌이하며 귀의한다면 그 공덕은 무한할 것이다.”

이것은 다라니의 공덕과 봉안방법에 관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전에서는 이 다라니를 절 입구의 당간에 깃발처럼 걸거나, 아니면 아주 높은 산이나 누각에 안치하거나 또는 탑 내부, 또는 네거리에 탑을 세우고 그 안에 다라니를 안치하도록 하고 있다. 보기만 하여도, 옷깃이 스치기만 하여도 그 공덕을 받을 수 있는 경전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조탑 사상은 중국의 경우 요나라 불탑들의 중요한 조성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위의 내용 중 이 다라니를 베껴서 높은 당 위에 안치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어쩌면 요대 이후 성행했던 거대한 석경당을 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안북도 불정사지 다라니석당(현 소재지 묘향산 보현사).

‘불정존승다라니’가 번역된 7세기 후반 이전에도 중국에서는 경전을 석주에 새긴 경당(經幢)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요나라 때 특히 그 제작이 성행한다. 처음부터 경당을 탑의 내부에 봉안하지는 않았지만, 요대에 들어서 사리 신앙이 더욱 유행하게 되고, 법사리의 장엄 또한 다양하게 전개되면서 법사리로서 다라니를 새긴 경당을 탑 내부에 봉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요의 이런 전통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면에는 그들보다 먼저 존승다라니신앙을 지니고 있던 발해 사람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존승다라니 신앙은 발해에서도 유행했다고 생각되는데, 심양에서 발견된 석경당에는 존승다라니가 새겨져 있었고, ‘개원2년(開元二年)’ ‘ 심주(瀋州)’라는 문자가 확인되기도 하여 714년에 이미 요동 지방에 존승다라니신앙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일본 시가현(滋賀縣) 오오쯔시(大津市)에 있는 이시야마데라(石山寺)에는 정관3년(861) 발해사신 이거정(李居正)이 전해준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加句靈驗佛頂尊勝陀羅尼記)’가 소장되어 있기 때문에 요대 존승다라니신앙의 전통은 발해에서 전승되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불정존승다라니’에 대한 신앙은 고려에도 전해졌다. 현재 황해남도 해주시 청풍동과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보현사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경당이 남아 있다. 특히 보현사 석경당이 가장 크고, 조형적으로도 뛰어난데 원래 평안북도 피현군 성동리 불정사에 남아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십신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현의 북쪽 5리 평지에 있다. 범어로 쓴 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1860년대), ‘광주읍지(光州邑誌)’(1899년) 등 후대의 기록에서도 동일 인용되고 있다. 한편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년)와 ‘범우고(梵宇攷)’(1799년)에는 십신사가 폐사되고, 범자비만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대동지지’, ‘광주읍지’의 기록은 십신사 자체의 존속기록이 아니라 범자비가 남아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십신사의 폐사 시기는 1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십신사지에는 다라니경당뿐 아니라 석불도 한 구 전하고 있다. 석불도 경당과 함께 1990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으로 이전해 놓았다. 현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불은 십신사지석비와 동일한 화강반암을 사용하여 제작한 높이450cm, 폭72cm, 둘레 210cm 크기의 8각 석주(石柱)에 불상과 대좌를 간략히 조각한 형태이다. 대좌의 전체 높이는 53cm로 최하단부에는 8각 석주의 형태가 남아 있고 그 위에 단판연화문 대좌가 조각되어 있다. 대좌의 양 측면에는 화불이 양각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구체적인 도상은 확인하기 어렵다. 불상의 세부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육계와 나발의 표현이 없으나, 30cm정도의 구멍이 나있어 보관 또는 보개가 결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타원형의 얼굴에 눈과 입술은 얇게 표현되어 있으며, 미간에는 백호공이 새겨져있고,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석주자체에 조각을 해서인지 양팔과 몸체의 볼륨감이 없고 손과 옷 주름만 형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이고 수직으로 내려뜨린 옷자락과 발의 표현은 비교적 뚜렷하게 좌우대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보주 또는 꽃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오른팔의 가사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불교미술은 기본적으로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도상적 근거에 의해 제작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미술에 대한 도상학적 접근은 작품이 제작되었거나 신앙되었던 지역이나 그 시대의 불교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이런 면에서 광주 십신사지 ‘불정존승다라니석경당(佛頂尊勝陀羅尼石經幢)’은 중국 오대산신앙에 기반 한 화엄밀교신앙이 어떤 식으로 고려불교에서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60호 / 2018년 10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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