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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작가 미상의 ‘탁족도(濯足圖)’

기자명 김영욱

흐르는 맑은 물에 탐심을 흘려보내다

나를 품은 거대한 자연에 안겨
암석 위 앉아 물결에 발 담그면
마음까지 시원한 행복 이를 것

작가 미상 ‘탁족도’, 비단에 엷은 먹, 23.5×17.3㎝, 17세기, 개인 소장.
작가 미상 ‘탁족도’, 비단에 엷은 먹, 23.5×17.3㎝, 17세기, 개인 소장.

臨溪濯我足(임계탁아족)
看山淸我目(간산청아목)
不夢閑榮辱(불몽한영욕)
此外更何求(차외갱하구)

‘냇가에서 내 발을 씻고 산 보며 내 눈 맑게 하네. 한낱 영욕 꿈꾸지 않으니 이 밖에 다시 무얼 구하겠는가.’ 혜심(慧諶, 1178~1234)의 ‘산에서 노닐다(遊山)’.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여름빛 한껏 머금은 쨍한 녹색의 나뭇잎들이 제각기 화장한다. 안토시아닌의 붉은색, 카로틴의 등색, 크산토필의 투명한 노랑색. 저마다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탈바꿈한다. 탁 트인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장관에 모두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단풍놀이의 절정은 냇가에 발을 담가 씻는 탁족(濯足)이다. 선뜩한 단풍 바람 느끼며 즐기는 탁족은 기분 좋게 산뜩하다. 이윽고 이 산에 내가 있다는 행복을 알게 된다.

탁족의 어원은 굴원이 지은 ‘초사’의 ‘어부사(漁父辭)’와 이를 언급한 ‘맹자’의 ‘이루상(離婁上)’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는다”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즉 내 몸과 마음에 담긴 탐욕을 맑은 물에 씻어내어 정화하는 행위인 셈이다. 반반한 암석 위에 앉아 발을 씻고, 암석 위에 누워서 먼 산과 하늘을 바라보면 몸도 마음도 시원한 행복에 이른다.

조그마한 화폭에 그려진 노승도 탁족의 행복을 얻었나 보다. 가벼운 바람에 나붓거리는 나무 아래 물가에 앉아있는 노승이 앞섬을 풀어 올챙이배를 내밀고 소매 걷은 양손으로 아랫도리 옷자락을 잡아 올렸다. 야윈 두 다리 내밀고 한쪽 다리를 뒤로 돌려 꼬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생생한 탁족의 현장을 보여준다. 발을 담근 물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늘어진 눈꺼풀과 입꼬리를 약간 올려 지은 맑은 미소에는 영욕에서 초탈해 탁족의 행복을 얻은 노승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다.

탁족은 명상과 같다. 물결에 몸을 맡기고, 먼 산에 눈길 주고, 바람에 귀 기울이면 이내 자연에 마음을 열게 된다. 물음은 시원한 발끝에서 시작된다. 비로소 이곳에 존재하는 나를 깨닫고, 나를 찾고 나를 버릴 수 있다. 탁족의 마지막에 오는 소소한 기쁨과 잔잔한 평안은 나에게 무한한 행복을 안긴다.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영원한 나그네인 우리들을 설레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인적이 미치지 않는 심산은 곧 우리네 모습 그대로이다. 복잡한 생각의 무게는 걸음걸음 내려놓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 주변을 둘러싼 자연에 눈길 주고 귀 기울여보자. 나를 품은 거대한 자연에 안겨 홀로 내 안의 욕망을 가벼운 바람과 물결에 흘려보내고, 선뜩선뜩한 물결에 발을 담가 내 안의 행복을 일깨워보는 건 어떨까.

오랜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탁족의 행복한 깨달음을 얻은 화폭 속 노승이 부러운 순간이다. 그 산뜩산뜩한 행복이 참 그리운 계절이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60호 / 2018년 10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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