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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현 초청 일본불교 성지순례-하

  • 집중취재
  • 입력 2018.10.29 11:14
  • 수정 2018.10.30 13:44
  • 호수 1462
  • 댓글 0

평화로움과 성찰로 이끄는 ‘오래된 일본’의 33관음 순례길

시코쿠 등 일본은 도보순례 천국
고대 말부터 200여 순례길 조성
히지리 등 불교 수행승들이 개척

야마가타현도 오래된 순례길 다수
관음 사찰 중심으로 순례길 조성
쇼나이 지역 유서 깊은 사찰 포함

코쇼지는 신불습합 대표적 도량
관음보살과 백여우 함께 봉안해
소코지는 버섯삼나무 정원 유명

야마가타현을 대표하는 사찰 중 하나인 소코지. 산문(山門) 앞에는 350여년 간 역대 주지스님들의 손을 거치며 조성된 아름다운 버섯모양의 삼나무들이 이색적인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편리와 빠름은 미덕으로 간주된다. 산과 강의 속살을 헤집은 도로들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고, 길들은 각질마냥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다. 자동차, 전철, 기차, 비행기 등 교통수단이 인간의 발을 대신한다. 속도가 중시될수록 사람들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이동방식에 익숙해지고 몸이 세상과 접촉하는 기회는 상실된다. 대자연 속을 한가로이 거닐며 느끼고 사유하는 도보순례가 각광을 받는 것은 도시화와 속도전에 지친 이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전문가 말마따나 ‘도보여행의 대중화는 근대 산업혁명 이후 최근까지 이어져 온 휴양과 즐거움 위주의 대중관광이 21세기 들어와서 정신고양과 자아성찰을 중요시하는 진정성 추구여행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일본은 도보순례가 발달한 나라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600km 더 긴 1400km의 시코쿠를 비롯해 고대 말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일본 각지에 200여개의 순례길이 만들어졌다. 대부분 불교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순례길이 형성된 것은 과거의 수행승들에 의해서였다.

일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진 것은 552년 백제 성왕 때 노리사치계 스님에 의해서였다. 이후 일본불교는 고통 받는 이들을 구제하자는 애초의 목적은 희석되고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불교로 굳어져 갔다. 당시 출가자들은 일본 전통사회의 시체부정 금기인 ‘사예(死穢)’에 따라 초상집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저 천왕과 귀족층을 위해 기도하고 의식을 행했던 관승(官僧)의 위치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바뀐 것은 10세기 이후 히지리(聖)라 불리던 사도승(私道僧, 遁世僧)들이 나타나면서부터다. 이들은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도로, 다리, 우물 등을 정비했다. 길거리나 들판에 버려진 시체들을 한곳에 모아 묻은 뒤 염불도 해주었다. 사람들은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았던 이들 히지리를 존경했고, 불교도 자연스럽게 백성들 속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히리지들은 전국을 순례하는 것을 중요한 수행의 하나로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길은 곧 구도이자 성찰이었으며, 전법이기도 했다. 이들에 의해 헤이안시대 일본 진언종의 고승인 홍법대사 쿠카이(空海, 774~835) 스님과 관련된 영성의 땅[靈場] 시코쿠에 88개소 편로가 정착되고, 전국시대와 에도시대를 거치며 본격적인 순례문화가 정착됐다.

이곳 야마가타현에도 오래된 순례길이 있다. 데와삼산(出羽三山)이라는 갓산(月山), 하구로산(羽黑山), 유도노산(湯殿山)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지역이 불교와 일본의 전통신앙이 모두 흥했던 만큼 오랜 세월 불교와 신도를 믿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야마가타현은 최근 새로운 순례길에 수요가 늘고 있는 것에 맞춰 쇼나이 지역의 유서 깊은 사찰들을 중심으로 33관음사찰 순례길을 복원했다. 관광객이 붐비는 내륙지방과 달리 호젓하게 성지를 순례할 수 있고, 산과 평야, 바다에서 나오는 음식들의 매력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교와 신도가 습합된 코쇼지 전경.

우리 일행이 33관음사찰 중 제2번 관음사찰 콘고쥬인(金剛樹院), 제31번 관음사찰 츄렌지(注連寺)를 순례하고 다음날 찾은 곳은 제6번 관음사찰 뱍코산(白狐山) 코쇼지(光星寺)였다. 쇼나이공항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이 절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색깔이 분명했다. 선종 계열의 조동종 사찰이지만 일본의 전통종교와 불교가 습합돼 전해지고 있었다. 일행이 차량에서 내려 사찰 쪽으로 걸어올라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백의관음과 흰여우 조각상이었다. 이 절은 관음보살과 백호를 동시에 모시는 사찰로 백호관음제를 비롯한 이색적인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일본 신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도리이(鳥居)를 지나 건물에 들어서자 관음당이 나왔다. 십일면관음보살, 마두관음보살, 교통관음보살이 모셔져 있고, 검은 승복에 맨발인 채 일행을 안내하던 스님은 이곳의 관음보살이 영험해서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일행이 참배를 마치고 이동한 곳은 건물 내부에 흰여우를 모신 백호전이었다. 스님은 북과 커다란 그릇처럼 생긴 크리스털 종을 쳐가며 직접 의식을 보여주었다.

관음보살과 여우의 낯선 동거. 불보살님을 모신 도량에 어떻게 여우가 들어앉게 됐을까. 스님에 따르면 이 절의 역사는 헤이안시대인 서기 8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계 최고 관직인 승정(僧正)을 맡은 고승 한 분이 동북 지역을 순례하며 법을 펼치던 중 하구로산에 이르러 짚고 다니던 석장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동북쪽을 향해 길게 뻗어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신령스러운 땅이 있다고 확신했다. 승정은 그곳에 가겠다는 원을 세우고 십일면관음보살에게 매일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파란 옷을 입고 하얀 여우에 올라탄 여신 다키니손텐(陀枳尼尊天)이 나타나 흰여우를 시켜 그곳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정말 흰여우가 나타났고 스님이 여우를 따라가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승정은 이곳에 절을 짓고 십일면관음보살을 본존으로, 대변재천과 다키니손텐을 좌우에 모셨다. 이곳을 일러줬던 여우는 인근 숲에 살며 승정을 보호했고, 스님도 여우와 승정과 권속들을 보살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한다.

인도와 더불어 가장 많은 신이 있다는 일본. 그렇기에 여우도 신앙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사찰에서 만나는 여우들은 여전히 생소하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불교와 신도가 분리되기 이전까지 일본의 많은 사찰들이 이러한 형태의 신불습합의 신앙관을 지녔을 것이 분명하다.

코쇼지를 순례하고 나서 일행이 향한 곳은 모가미가와(最上川) 강이었다. 1971년 현립 자연공원으로 지정된 모가미가와는 야마가타현 남동부에서 발원해 요네자와 분지와 쇼나이 평야를 거쳐 일본 동쪽바다로 흘러드는 전장 229km의 일본 3대 급류의 하나다. 일행은 후루구찌항에서 수상관광선에 올랐다. 배는 물길을 가르며 서서히 나아갔다. 배 앞쪽에서 안내를 맡은 기시 아키오씨는 모가미가와에 얽힌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모가미가와는 곡식과 문물을 운송하던 ‘어머니의 강’이라며, 여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가 와도 쉽게 탁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 이곳에는 5m 이상의 폭포가 48개나 되며, 높이 124m의 시라이토 폭포는 일본에서 6번째로 크다고 한다.

일본 민요를 잘 부르는 모가미가와 뱃사공.

강을 사이로 양쪽의 산들은 험준했고 수백 년 된 삼나무들이 빽빽한 산림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가미가와 풍경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기시 아키오씨가 이 강에 전해오는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가미가와 후나우다’라는 뱃노래였다. 이 지역에서 민요를 가장 잘 부른다는 가이드의 설명처럼 그의 노래는 흥겨우면서도 애잔하고, 구슬프면서도 서정적이었다.

뱃길로 1시간쯤 이동해 도착한 곳은 쿠사나기항이었다. 쇼나이관광물산관에서 식사를 마친 후 ‘소마로’라는 관광시설을 방문했다. 일본드라마 ‘오싱’의 촬영지이기도 한 소마로는 200년 간 요정 건물이었다. 1995년 폐업하고 방치되던 것을 1999년 이 지역 기업인이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을 인수해 관광시설로 만들었다. 광고와 드라마 촬영지로 이용되는 이곳은 유메지 타케히사라는 유명작가가 그린 미인도들을 관람할 수 있으며, 게이샤가 되기 위해 교육받는 마이코들의 공연도 볼 수 있다.

소코지 주지스님이 사찰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소코지(總光寺)는 소마로에서 차량으로 30분 거리에 있다. 야마가타현을 대표하는 소코지는 33관음사찰 중 12번째다. 조동종 사찰로 일본 남북조시대인 1384년 게츠안 료엔(月庵良円) 선사에 의해 창건됐다. 일본의 오래된 선종 사찰이 그렇듯 소코지도 정원으로 유명하다. 산문으로 향하는 길 양쪽에 길게 늘어선 120그루의 버섯 삼나무는 1956년 야마가타현의 천연기념물로 일찌감치 지정됐다. 에도시대인 17세기 초 심어졌다는 이 나무들은 350여년 간 역대 주지스님들의 손을 거치며 조성된 아름다운 버섯모양의 이색적인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버섯 삼나무를 지나면 200여년 된 거대한 산문이 나타난다. 5대 마츠야마 번주가 썼다는 큰 현판과 정교하면서도 장엄한 목조인왕상의 시선이 강렬하다. 경내 마당을 가로질러 본당에 들어서면 뒤편으로 일본 명승지로 지정된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연못과 분수, 바위, 나무들이 어우러진 이곳은 선종 사찰답게 조용하면서도 아름답다.

일본 명승지로 지정된 소코지 본당 뒤편 정원.

우리 일행을 위해 젊은 주지스님이 사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했다. 또 선의 대중화를 위해 매년 4월부터 12월까지 불자들을 대상으로 정례좌선회와 일반인들을 위한 좌선체험을 실시한다고 했다. 경전을 필사하는 사경과 부처님을 그리는 사불 강좌도 수시로 열고 있었다. 종교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사찰이 어떻게 수행과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여러 사찰들을 참배하고 명소들을 방문했다. 야마가타현은 산림과 평야지대, 강과 바다에 의지해 수천 년 동안 살아왔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오래된 일본’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든 순례의 최종 도착지가 자신의 내면이듯 야마가타현도 순례자들을 성찰과 여유로움으로 이끌어준다.

야마가타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462호 / 2018년 10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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